새롭게 발견하고 찾아낸 문예비평적 산문
영원한 청년 윤동주, 그는 왜 저항시인인가?
윤동주의 생애와 슬픔 속에서 마음을 읽는다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 부활하여 별빛처럼 우리의 갈 길을 밝혀 주고 있는 윤동주의 영전에 이제 우리는 의롭고 애처로운 그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지은이 머리말
<윤동주의 마음을 읽다>를 쓴 지은이는 “윤동주 시인은 나의 아바타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동주의 삶과 그 정신세계를 써 내려간 지난 1년의 나는 어느새 절반의 윤동주로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슬픈 생애의 윤동주 시인은 나의 아바타가 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품어 온 ‘윤동주론’의 운명이 이렇게 조우遭遇하여 실현될 줄은 짐작하지 못한 터였다. 어이없는 식민지 청년시인의 고단하고 고독하고 막막한 생애를 따라, 그의 곧고 순결한 마음 갈피를 한 잎 한 잎 살피며 써내려갔다”고 하였다.
윤동주 시인 순절殉節 73년을 맞이하는 2018년까지도, 학계와 평단에서는 윤동주의 인간과 문학에 관한 글이 적잖이 발표되고 있다. 시詩를 선택함으로써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고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의지의 시인이었지만, 한편 따뜻하고 온유하며 진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윤동주를 문학과 인간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논술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윤동주의 마음을 읽다> 지은이는 “윤동주라는 정보를 통한 지식의 나열이나 방법론의 과잉은 자칫 윤동주의 삶과 문학적 진실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면서, 윤동주와 그의 시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내면의 특질을 속속들이 짚어내려 애썼다”고 했다. 그래서 지은이는 흔히 순수 시인으로 알려지거나, 시대적 상황논리에 따라 저항시인이라고 평가되어 온 윤동주라는 텍스트가 왜 저항의 언어로 읽힐 수 있는지 그 논리적 준거를 마련해 주고, 윤동주 시에서 죽음의 인식이 드러내고 있는 실존적 의미를 해명하는 것으로 글을 이어갔다.
28년간의 짧은 일생을 옥사獄死로 마감한 윤동주 시인의 길을 따라가 보면, 때로 인간적인 번민과 서성거림이 없지 않지만, 일생을 곧은 신념과 의지로 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국에 대한, 조국의 광복에 대한 일념이 어쩌면 그토록 굽힘이 없고 진지하였으며, 뼈아픈 고독 속에 자신을 가책苛責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허다한 지식인과 내로라하는 문사文士들이 친일, 변절하여 일정한 호사를 누릴 때, 백성은 식민지 노예로 전락해 가는데도 모던보이 모던걸 들이 환락에 빠져들 때, 지은 허물도 없이 성찰과 자학과 참회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곧은 푯대 위에 세웠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윤동주를 나약한 시인으로 치부하여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은 윤동주의 생애를 제대로 탐구해 보지도 않은 채 내뱉는 신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윤동주는 실제 행동과, 동지들과의 획책으로서도 조선독립 운동을 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그는 시詩로써 독립운동의 길을 택한 암흑기의 시인이었던 것이다. 시는 당장은 무력하고 무능해 보일지라도 그 한심한 영혼의 행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오히려 깊은 울림의 진폭과 자각적 충만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인자因子로 작용하는 법이다.
지은이의 머리말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1945년 2월 16일 적국의 싸늘한 형무소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청년시인 윤동주! 꺼져 가는 조국의 밤하늘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 죽어서 100세를 맞은,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 그의 고귀한 정신은 부활하여 오늘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빛처럼 우리의 곁에 살아 있다. 이제 우리가 의롭고 애처로운 그의 일생에 바른 답을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