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고증으로 되살린 시인의 삶, 이것이 시가 태어난 현장이다!
한 편의 시는 진공 상태에서 빚어지지 않는다. 작품을 둘러싼 시대, 작가의 삶 등 특수하고 고유한 맥락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작고한 시인을 독자들 곁으로 생생하게 불러내기 위해, 저자는 증언 자료, 전집, 연구 논문, 기사 등의 자료를 최대한 수집해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 시인의 삶의 조각을 촘촘히 맞추기 위한 방대한 자료 수집은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를 알아야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저자는 “지나온 삶의 길보다 더 긴 시구를 가진 시는 없다”고 힘주어 서술한다.
저자가 시인의 삶에서 포착한 사소한 풍경들은 시인의 비밀스러운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를 활짝 열어 준다. 옛이야기에 흠뻑 빠진 유년의 김소월, 사랑채 가득 레코드 음반을 산더미처럼 모았던 음악 애호가 김영랑, 하얀 구두를 신고 향기로운 미국산 MJB 커피를 즐기던 세련된 취향의 이상 등 시인의 구체적인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학교생활, 성장 환경, 가족사, 독서 편력, 시작 노트 등을 면밀히 살펴 작품을 지탱하는 사유의 내력을 밝히고, 그 감성의 결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추적하기도 한다.
‘시인 공화국의 정부(政府)’(김소월), ‘우리 시 문학의 가장 큰 빛’(김영랑), ‘한국 현대시 최고의 실험적 모더니스트’(이상) 등의 거창한 칭호로 단순화할 수 없는 시인의 면면은 시가 태어나는 현장을 사실감 있게 전하는 무대가 되어 준다. 작가가 치밀한 고증으로 되살린 25명 시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지난 한 세기 한국 시단의 풍경이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질 것이다.
근현대 한국 시사(詩史)라는 큰 산맥의 윤곽을 그리다
이 책은 전문 연구서가 아니라, 시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대중 교양서이다. 저자가 가려 낸 25명의 시인도 중·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배우게 되는 시인들이다. 아무리 문학과 담 쌓고 지내는 이들도 그들의 대표 시는 하나쯤 알고 있는, 우리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들이다. 저자는 25명의 시인을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이들의 삶과 주요 작품을 살펴보고, 근현대 한국 시사(詩史)라는 큰 산맥의 윤곽을 그려 나간다.
1장에서는 한용운, 김소월, 박용래, 박재삼 등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서정을 계승한 시인들을 다룬다. 한없이 예민한 감성으로 한국인의 서정을 길어 올려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을 노래한 시인들이 가닿은 예술적 경지를 맛볼 수 있다. 2장에서는 이육사, 이용악, 윤동주, 김수영, 신동엽 등 역사적 격랑 속에서 시대의 고뇌를 작품 속에 묵직하게 담아 낸 시인들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해방 정국, 6·25 전쟁, 독재 등 민족사의 격랑에서 우리 시가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는지 살필 수 있다. 3장의 주인공은 김영랑, 정지용, 백석, 서정주 등 우리나라 시어의 지형도를 새롭게 썼다고 할 만한 시인들이다. 첨단의 감수성으로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시어의 범위를 확장시켜 온 이들의 모습을 통해, 시인은 언어를 다스리는 예술가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4장에서는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 청록파 3인이 일제강점기의 폭압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순수문학을 지켜 냈는지 면밀히 관찰할 수 있다. 5장에서는 김기림, 이상, 김광균, 김종삼, 김춘수 등 모더니즘의 계보를 잇는 시인이 등장해, 시대를 앞선 감각과 실험 정신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신석정, 유치환, 노천명, 기형도 등 내면세계를 응시하고 탐구하는 데 주력해 온 시인들이 등장해, 어떤 방식으로 자기만의 언어를 쌓아 올렸는지 찬찬히 보여 준다.
근현대 한국 시 문학의 흐름을 큰 틀에서 조망해 보고 싶은 청소년, 교사, 성인 대중에게 이 책은 꽤 유용하다. 시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면,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본격적인 공부 이전에 입문서 정도의 역할을 이 책에 기대해도 좋다.
스물다섯 시인이 삶의 종착지에 남긴 한 편의 시,
한 예술가의 ‘유언’이자 ‘묘비명’과도 같은 작품 25편을 담다
이 책에서는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찬찬히 따라간 후, 그 종착지에서 ‘마지막 시’를 면밀히 살펴본다. 보통 우리는 한 시인의 문학적 정수를 담은 대표작으로 그를 기억하지만, 이 책에서는 시인이 추구한 문학과 삶의 빛깔을 들여다보는 렌즈로 ‘마지막 작품’을 다룬다. 김수영의 「풀」,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등 마지막 시가 널리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작가는 평전의 작품 연보와 시 전집, 각종 연구 자료들을 살피며 시인의 마지막 숨소리를 찾았다. 창작 시점과 발표 시점 등의 서지적 사항이 명확하게 고증되지 않은 작가의 경우 말년에 쓰인 작품 여러 편 중 한 편을 선택했고, 월북·재북·납북 시인의 경우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창작하거나 발표한 작품으로 선정했다. 이념을 앞세워 문학을 도구화하는 북한에서는 시인이 뛰어난 문학성을 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마지막 작품을 가려내는 데 최대한 엄밀함을 기했지만,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마지막 작품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한 예술가가 생의 종착지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작가는 마지막 작품을 열쇠 삼아 시인의 마음속에 이는 회한과 반성, 죽음의 공포, 그리움 등의 격랑을 섬세하게 그려 보인다. 시인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의식했건 하지 못했건, 생의 끝자락에 남긴 한 편의 시를 읽을 때면 ‘마지막’이라는 말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인생의 말기에 이르러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선과 함께, 한 인간으로서의 깊은 고백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작품을 알게 되었을 때 시인의 인생이 제대로 꿰어지고, 비로소 그의 시가 주는 감동이 극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