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인보는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종용하는 터라 힘껏 다리를 들고 “비켜”라고 소리치며 귀찮게 구는 아이를 뿌리쳤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종이 부적을 붙임으로써 이미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진흙탕으로 들어가버렸을 꽃의 혼령을 제압했다. 나중에 사람들은 왜 모였는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와르르 소란한 소리와 함께 흩어져 돌아갔다. (…) 주위는 한없이 고요했다. 이 순간 그는 정말로 세상에 꽃의 요정이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세상에 그토록 아름다운 신비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사람도 살기 싫어하는 세상에는 신선 역시 살지 않을 것이고, 요정은 능력이 무한하기 때문에 굳이 이런 곳에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늘에는 은하가 흘러가고 밤하늘은 깊은 쪽빛이었다. 세상 모든 곳이 똑같이 아름다운 하늘에 덮여 있는데, 어째서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편안하고 평화롭게 살고, 어떤 곳에서는 개처럼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권 44-45쪽
큰불이 봄날의 기류를 어지럽히면서 들판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은 높은 곳에서, 지촌의 모든 협곡 깊은 곳에서, 들쑥날쑥한 설산 봉우리에서 불어와 불이 전진하는 방향을 막았다. 불이 끊임없이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불이 끊임없이 되돌아가 미친 듯한 기세로 밀고 들어올 때 철저하게 태우지 못한 곳을 말끔히 청소하게 만들었다. 이는 한창 진행 중인 정치 운동과도 사뭇 닮아 있었다. 처음에는 기세등등하던 광경이 서서히 평온해졌지만, 이는 결코 운동이 지나간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효과적인 살상을 계속 진행하는 중이었다.
―1권 335쪽
바로 그 순간, 소박하고 말주변 없는 이 친구가 책의 마법에 걸렸다. 책은 자신의 운명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책은 재난이 닥칠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지체 없이 사람에게 마법을 걸었다. 때로는 이 마법을 받아들일 사람을 고를 시간이 있었지만, 때로는 그런 것도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이 시대에는 책이 불타는 재난이 너무나 거세게 일었다. 책을 태운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지식인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큰 재난에 부닥친 책들은 마법을 걸면서 대상을 선택할 겨를이 없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오로지 다서만이 도서관 문 앞에 나타났다.
―2권 54쪽
일행은 언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과연 늑대가 쓰러져 있어야 할 자리에 늑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햇빛이 언덕 위의 풀과 꽃, 잡목들을 비췄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자연적인 언덕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조성된 거대한 폐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발밑에는 가지런한 바위와 가지런하지 않은 바위가 가득했고, 바위 위에는 이끼와 풀이 무성했다. 바위들 사이로 구불구불한 자태를 드러낸 나무는 이삼백 년은 더 된 것 같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이 젊은이들은 옛 노래에서 묘사한 고대 왕국이 정말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믿게 됐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높고 큰 폐허에 서 있는 그들의 마음속에 문득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햇빛이 가려진 깊은 나무 그늘 속에 정말로 요원하고 어렴풋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폐허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바위가 하나 보였다. 풀도 나무도 자라지 않은 깨끗한 바위에는 늑대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2권 408쪽
오히려 위험 요소는 목재를 채벌하고 운송하는 과정에 훨씬 많았다. 이 작은 마을에는 나무를 베다가 쓰러지는 나무에 부딪히는 바람에 어깨뼈가 부러져 불구가 된 사람도 있었고, 한밤중에 트럭 기사 하나가 사람을 태우고 깊은 협곡으로 들어갔다가 차도 사람도 마을로 돌아오지 못한 일도 있었다. 라쟈쩌리는 성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다오쯔롄에게 차를 세우도록 하여 사고 지점을 둘러봤다. 협곡 깊숙한 곳, 우거진 잡초 속에 파란 트럭 파편이 어렴풋이 보였다. 길가에는 망자를 위해 지촌 사람들이 세워놓은 초혼 깃발이 이미 색이 다 바랜 채 바람에 찢겨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다오쯔롄이 협곡을 향해 술을 한 병 뿌렸다. 라쟈쩌리도 담배 두 개비에 불을 붙여 도로변의 부드러운 표토에 향처럼 꽂아뒀다.
―3권 156쪽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앉아서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생기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들러서 술기운을 빌려 지촌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고 얼마나 변했는지, 얽히고설킨 은원恩怨 관계는 또 얼마나 많고 복잡한지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내 눈에는 이런 모습이 사실 지촌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역사와 함께 재건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였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지촌처럼 첩첩산중 골짜기에 깊숙이 들어앉아 수천 년을 버텨온 듯한 마을의 역사는 일찌감치 흔적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져 어렴풋이 흩날리는 파편 같은 이야기들만 전해질 뿐이기 때문이었다. 한 세대 한 세대 내려오면서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뒤돌아볼 필요가 없었던 것은 역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금 사람들이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지촌 사람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겪은 변화가 이미 과거의 천 년을 뛰어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데 모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고, 술과 이야기로 서로를 격려하고 자극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3권 3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