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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 박홍규
  • |
  • 들녘
  • |
  • 2017-12-27 출간
  • |
  • 320페이지
  • |
  • 150 X 211 X 25 mm /434g
  • |
  • ISBN 979115925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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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헤세는 힐링의 묘수를 전파했던 천재 소설가가 아니다.
개인을 억압하고 개성을 말살하는 체제악에 맞섰던 반항아였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유리알 유희』의 작가, 우리가 사랑한 헤르만 헤세의 삶과 문학을 새롭게 읽는다!
헤르만 헤세만큼 전 국민적인 명성을 쌓고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서양 작가는 드물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사춘기 무렵 통과의례처럼 접하는 필독서가 된 지 오래고, 소박한 농부의 모습으로 포도밭을 일구는 헤세의 모습은 『정원일의 즐거움』과 같은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자연주의 작가로 각인되었다. 특히 청춘들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명문과 함께 헤세를 내면의 성장에 천착한 작가로 간주하여 『데미안』에 열광했는데, 이는 괴테가 말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와 함께 세기를 넘어 젊은 영혼들에게 각성과 도전, 열정을 불러일으킨 유의미한 자극제가 되어주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헤세는 언제부터인가 ‘힐링의 작가’로서도 입지를 굳혔다. 출판 관계자들은 물론 독자들마저 “그의 책을 읽으면 아픔, 슬픔, 고통이 사라진다”라고 홍보하거나 “헤세의 글은 심리치료에 탁월한 효용성을 발휘한다”고 말해온 탓이다. 그러나 이는 헤세가 강조한 ‘자아 찾기’를 오독한 결과다. 헤세가 말하는 자아 찾기란 대중이라는 기계의 일부로 타락하지 말고 그 기계의 현실에 저항하라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어떤 작가도 개인의 내면에만 집착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나온 헤세 관련 책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한다. 헤세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다룬, 특히 사회라는 체제가 개인을 억압한 우리 상황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작가로서 개인의 자살과 같은 비극을 내면 심리의 갈등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생겨난 비극으로 보았다. 그런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를 혁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는 헤세의 작품이 수없이 번역 출판되었고, 그의 삶이나 작품에 대한 해설서도 매우 많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쓴 헤세 평전이나 체계적인 연구서는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지적 공백을 메우고자 쓰는 한국인 최초의 헤세 평전이자 전(全) 작품 읽기의 시도로서 우리가 사랑해온 만큼 오독 또한 횡행했던 헤세와 그의 소설이 간직한 진면목을 탐색하는 신선한 작업이 될 것이다.


청춘이 사랑하는 헤세,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헤세
헤세는 인기 작가다. 불안하고 고독한 청춘을 노래한 작가, 내면세계에 천착한 작가, 자아 찾기로 대표되는 치열한 내적 투쟁을 전개한 작가, 동양적인 신비를 노래한 작가, 정원을 일구며 소박한 자연으로 회귀한 작가… 등등과 같은 이미지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헤세는 또한 독자들이 사춘기 시절에 뜨겁게 만나는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수레바퀴 아래서』나 『데미안』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명문장 역시 대중매체를 통해 회자되기 일쑤다. 그뿐일까? 우리나라의 소위 ‘훌륭한’ 분들 역시 공통적으로 “헤세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데미안』을 읽기 전에는 부모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모르고 공부도 게을리 했는데 그 책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구절을 읽고 별안간 대오 각성하여 열심히 공부해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가장 빠른 나이에 장군까지 진급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받드는 정치인이 되었다”라고 말한 정치인도 있다. 그래서일까? 중고교 시절이나 대학시절 교양 필독서 목록에는 헤세의 책이 빠지는 법이 없다. 지극히 관념적인 자아 찾기, 작가의 평생을 지배했던 고독함, 개성에 대한 탐색은 어느덧 헤세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헤세는 정말 그런 작가일까?

헤세는 개인의 내면에만 천착했던 작가일까?
헤세는 부르주아적 삶을 경멸했으면서도 그 언저리를 맴돌았고,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군대에 자원했고, 집단을 경멸하면서도 항상 그 주변을 서성거렸던, 한마디로 매우 약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다가 50세가 되어서는 자살을 시도했던 배경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출세와 대오 각성을 위한 전기가 되어준 작가라거나 범접하지 못할 힐링의 묘수를 선사해주는 작가로 인식한다. 하지만 헤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헤세가 말한 자아 찾기란 대중이라는 기계의 일부로 타락하지 말고 그 기계의 현실에 저항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세상의 어떤 작가도 개인의 내면에만 집착하지 않는 법이다. 어떤 개인도 사회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세는 사회라는 체제가 개인을 억압한 우리 상황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작가이다. 그 체제의 결과로 불거진 개인의 자살과 같은 비극을 내면 심리의 갈등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생겨난 비극으로 보고, 그런 비극의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를 혁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질 만능, 지식 만능, 권력 만능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의 어린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를 자살하게 만드는 수레바퀴를 부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세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넘치는 천편일률적인 힐링용 책들이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 이 책이 유독 사회 변혁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헤세의 참모습에 방점을 찍는 이유이다.

반항하라, 우리는 반항하기에 인간이다
저자는 화려한 연미복을 입고 힐링의 묘수를 전파하는 천재 소설가 헤세가 아니라, 노동자나 농부처럼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산속 포도밭에서 힘들게 일하며 소박한 수채화를 그리는 그의 참 모습을 소개한다. 헤세는 출세가 아니라 출가를 권했다. 헤세는 군대를 비롯한 인공의 조직이 아니라 순수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힐링이나 안주가 아니라 방랑을, 안정이 아니라 끝없이 고뇌하라고 말했다. 그는 복종이 아니라 반항을,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집단성이 아니라 개성을 믿었다. 나아가 헤세는 개성과 개인을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라고 했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헤세의 말을 빌어 “자신의 개성을 지키고 자신의 존재를 믿으라”고 말한다. 특히 청춘에게 “반항하라! 기존의 모든 것에 저항하라! 우리는 반항하기에 인간이다”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자본주의에 철저히 저항하며 평화와 자연을 사랑한 헤세의 모습은 흡사 체 게바라를 닮았다. 긴 방랑 속에서 스스로 진실을 인식하고 책임을 자각하며 독립한 개인으로 굳게 서는 모습이 바로 헤세 삶과 작품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집단적 광기가 난무하는 황무지 같은 한국의 현실에서 우리가 당당한 개인으로 서기 위해 헤세를 다시 한 번 정독해야 하는 이유다.

[책속으로]
헤세의 작품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들은 고뇌를 극복한다기보다 그 고뇌 때문에 죽는다. 대부분 교양적 시민이 아니라 비교양적인 본능에 충실한 반(反)시민적 인간상을 지향한다. 그리고 고뇌도 어린 시절에 가정과 학교에서 배운 도덕을 비롯한 시민적 가치관 때문에 생기는 것이어서 헤세 작품을 제대로 읽는다면 반시민적, 반가정적, 반교육적, 반교양적 인간이 되라고 하는 것 같다. 그의 작품이 1960년대 말 서양에서 생긴 히피의 성경처럼 여겨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따라서 헤세 작품은 모범적인 기성인이 보기에 대단히 위험하다. 헤세는 스스로 히피처럼 살기도 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내면세계의 형성과 자아실현이 헤세 문학의 본질이라고들 말한다. 가령 전혜린은 “헤세 작품에 통틀어 나타나는 주제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이었고 참된 자아로 가는 길이었으며 이 모토에 그는 끝까지 충실했다”고 한다. 도대체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자아는 무엇이고, 다시 “참된 자아”란 무엇인가? 나는 그런 난해한 자아론보다 독일의 현실에 저항하는 개인의 자아, 즉 개성이라는 것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억압적인 현실 이해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본다. 사실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독일문학의 전통도 개성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억압적 현실을 극복하고 개인의 개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지 않은가? 뒤에서 보듯이 이는 루터 이후 독일의 지적 전통이었고, 그러한 지적 전통은 언제나 현실의 억압을 극복하는 데 모아졌다. 그러나 현실의 극복이 실제로는 불가능하기에 무제한적인 자아도취적 경향이 생겼을 테고, 그것이 방해되는 곳에서 당연히 비판이 제기되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최후로 극단적인 폭발로서의 낭만적 혁명이 나타난 것 아닐까?_[1960년대 말 히피들이 헤세의 작품을 성경처럼 여긴 이유] 중에서

한스가 죽은 이유를 『수레바퀴 아래서』의 번역자는 그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인지도 모른다고 하지만(267) 의문이다. 한스와 달리 헤세에게는 어머니가 있었고, 또 헤세는 고뇌와 시련을 글로 승화시킨 반면 한스는 그런 출구를 발견하지 못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존재 여하는 한스의 죽음은 물론 그의 고뇌와 시련에 무관하다. 소설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서 헤세는 플라이크로 하여금 거기 참석한 교사들이나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스를 죽였다고 하는데 왜 번역자는 어머니의 부재를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일까? (…) 『헤세 문학과 이상정치』에서 홍순길은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가 “참고 견디어 끝내는 내면의 성숙을 가져왔다”고 하는데(170) 과연 죽음이 그런 성숙인가? 또 홍순길은 『수레바퀴 아래서』를 “어린 시절의 고향과 양친의 품속 같은 행복한 시절의 산물”이고 헤세는 “추억의 실타래만 계속 잡아다녀도, 내면의 고백만을 읊조리고 향수와 우울 섞인 심정만을 토로해도 성공적인 작품을 쓸 수 있었”고 “그런 식으로 출세한 작가”라고 한다.(185) 과연 그런가? 『수레바퀴 아래서』는 단순한 청춘의 애가가 아니다. 체제 비판 소설이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이라는 체제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어느 10대의 이야기다. 여기에 정치와 경제는 구체적인 체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10대의 생활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적인 가정, 학교, 직장은 이미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전제한다. 앞의 제2장에서 인용한 교장의 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19세기 말 독일의 권위주의적 사회를 말이다. 『페터 카멘친트』가 에콜로지의 교과서라면 『수레바퀴 아래서』는 반학교의 교과서다._[『수레바퀴 아래서』는 반(反)학교의 교과서다] 중에서

그러나 이 소설은 1947년 『데미안』 미국판 서문에서 토마스 만이 말한 대로 “당시 시대의 핵심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적중시”킨 작품으로 봄(황진, 225)이 옳다. 전쟁의 책임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리며 죽어가는 태도를 봐도 그렇다. 여기서 헤세는 결코 인간을 우리 학자들이 동양적인 것이라고 말하듯이 “조화롭게 완성된 단일성”으로 보지 않는다. 조화는커녕 혼돈과 무질서를 초래한 파괴적 전쟁의 원인을 인간의 이원성, 즉 정신과 감각,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본다. 이 같은 대립의 극복을 통해 다시 “조화롭게 완성된 단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_[『데미안』은 인격 완성 소설인가?] 중에서

1930년에 출판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우리나라에서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데미안』과 함께 가장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흔히 그 소설의 주제라고 말하는 창백한 지성과 분방한 사랑이라는 대립구도가 너무나도 관념적이라고 느껴지는 탓이다. 특히 니체류의 아폴론적 인간상과 디오니소스적 인간상의 대비를 소설로 쓴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니체의 모작이라면 헤세의 가치가 훼손될 수도 있다. 나에게 이 소설은 그런 관념적 대립보다는 정신과 자연의 불일치가 초래한 체제와 시대의 문제를 풍자하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 그러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주인공들은 이제 『수레바퀴 아래서』의 소년들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나르치스는 평생 수도원에 은둔하는 수도사이고, 골드문트는 평생 수도원 밖을 떠도는 방랑자다. 또한 성격도 다르다. 나르치스는 이지적이고 차분하지만 골드문트는 낭만적이고 열정적이다. 지성형과 감성형이라는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신을 찾는 점에서 같다. 두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의 주인공을 꼽는다면 골드문트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비중에서 보면 그 제목은 『골드문트와 나르치스』로 하는 것이 옳았을지도 모른다._[『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에서

『유리알 유희』가 나치의 대두 이후 황폐해진 현실에 반항하는 유토피아의 추구로 쓰였음은 분명하다. 헤세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폭력과 테러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는 점에서 같다고 여긴 것이다. 헤세는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고, 심지어 그런 것 자체를 의식하지도 않고, 인간의 기본욕구이자 생명의 표출인 순수한 유희에 불과한 입장을 대변해야겠다는 믿음 아래 그 소설을 썼다. 처음에 헤세는 유토피아 소설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1938년부터 사회참여적인 태도로 바뀜에 따라 정신과 삶의 변증법적인 종합을 추구하는 소설에 집중했다. (…) 『유리알 유희』의 전기 형식은 그 소설이 ‘성장 소설’(Entwicklungsroman)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헤세가 그 전에 보여준 청춘의 고뇌를 회상하는 감상주의는 배제되었고, 도리어 냉정한 객관성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헤세는 전기 작가와 편집자를 내세우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미 『데미안』이나 『황야의 이리』에서 사용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은 헤세가 평생 추구한 개인화나 개성화가 그가 속한 집단과 조화를 이루는 이상사회의 묘사에 있다. (…) 따라서 『유리알 유희』는 주인공의 이름을 딴 소설이 아니게 된다. 그 전에 헤세의 소설 제목은 주로 주인공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페터 카멘친트』,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말이다. 이는 주인공 크네히트의 생애가 카스탈리엔이라는 하나의 사회에 용해됨을 뜻한다. 즉 개인만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조화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_[『유리알 유희』] 중에서

부모든, 교사든, 언론인이든, 예술가든, 지식인이든, 그 누구든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개성을 키워주는 일이라고 헤세는 말한다. 그 어떤 정치 슬로건이 아니라, 홀로 바르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발적 왕따를 키우는 일이다. 물론 개성은 결국 개인에 의해 찾아지는 것이지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누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헤세는 자신을, 또는 다른 그 누구도 모범으로 살지 말라고 끝없이 경고한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헤세의 모습이 바로 이 점이다. 위인이란 없다. 자기 자신이 있을 뿐이다. (…) 그동안 물질적으로는 훨씬 풍요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나 빈곤해졌다. 이미 한 세기 전에 헤세는 독일에서 그것을 알았다. 어쩌면 우리가 그 독일, 그 서양을 모방하여 지금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독일이나 한국이나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을 회복해야 할 때다. 헤세는 우리에게 그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반항하라고 헤세는 말한다. 안이하고 달콤한 힐링의 속삭임에 굴복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반항하라. 반항하기에 인간이다._[헤세의 삶과 문학은 개인의 독립선언이다] 중에서

목차

저자의 말_모든 것에 저항하라!

1. 헤세와 우리
헤세는 왜 한국에서 베스트-스테디셀러 작가가 되었을까? | 내가 읽은 헤세는 사회적인 작가다 | 반(反)자본주의적 삶을 위해 투쟁한 헤세 | 헤세와 조국 | 헤세는 아나키스트다 | 한국인은 헤세를 오해했다 | 헤세와 동양의 지혜 | 헤세 르네상스의 문제점 | 1960년대 말 히피들이 헤세의 작품을 성경처럼 여긴 이유 | 헤세와 정치 | 헤세 생애의 간단한 스케치 | 헤세 문학의 간단한 스케치

2. 죽음으로 반항하라
비스마르크 시대 | 칼프와 바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 반항의 싹이 튼 유년 시절 | 신학교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을 키우다 | 서적상 견습생이 되다 | 『자정이 지난 뒤의 한 시간』 | 환상에서 깨어나다 | 첫 결혼과 첫 성공 | 『페터 카멘친트』 | 『페터 카멘친트』는 에콜로지의 교과서다 | 『수레바퀴 아래서』 | 『수레바퀴 아래서』는 반(反)학교의 교과서다 | 20세기 초엽의 독일문학과 헤세

3. 방랑으로 반항하라
정원일의 즐거움을 누린 가이엔호펜 시절 |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 | 어지러운 시대의 시 | 방랑자를 만나다 | 구스토 그레저는 어떤 사람일까? | 헤세의 베른 시절 | 『게르트루트』와 『도상에서』 | 헤세는 인도를 어떤 관점으로 이해했을까? | 『로스할데』 | 『크눌프』 | 동화를 사랑한 헤세

4. 양심으로 반항하라
시대의 광기를 비판하다 | 전쟁과 그레저 | 도덕과 이성을 넘어 | 『데미안』 | 새로운 내면세계와 만나다 | 세계라는 알을 깨트려라 | 『데미안』은 인격 완성 소설인가? | 『어린 아이의 영혼』 | 『방랑』 | 아내 마리아, 우울증으로 요양소에 입원하다 |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 『차라투스트라의 귀환』 |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성찰

5. 사랑으로 반항하라
헤세가 사십사 년 동안 살았던 몬타뇰라 | 「클라인과 바그너」 |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 1920년대 초반의 헤세와 그레저 | 『싯다르타』 제1부 | 『싯다르타』 제2부 | 『싯다르타』 이후, 그리고 『요양객』 | 『뉘른베르크 여행』 | 『황야의 이리』 | ‘하리 할러의 수기’ | 전쟁 | 음악 | 가장무도회 | 마술극장의 자동차 | 1927년부터 1929년 사이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수도원 이야기 | 방랑과 창조의 이야기 | 재회와 죽음의 이야기

6. 봉사로 반항하라
『정원에서 보낸 시간』 | 나치의 시대 | 『동방순례』 | 나치와 헤세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란 무엇인가? | 타락한 잡문 시대 | 카스탈리엔은 어떤 곳인가? | 크네히트 | 유희 명인 | 이탈 | 유작시 | 세 편의 이력서 | 『유리알 유희』에 대한 평가와 전후의 헤세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 냉전과 만년

맺음말_헤세의 삶과 문학은 개인의 독립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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