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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다른 곳에

천국은 다른 곳에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
  • 새물결
  • |
  • 2010-10-08 출간
  • |
  • 560페이지
  • |
  • 148 X 210 mm
  • |
  • ISBN 978895559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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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최신 장편 소설
바르가스 요사 소설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원숙기의 대표작
평생 지상의 천국인 정치적 유토피아와 천국의 관능을 추구해온 바르가스 요사,
드디어 정치와 예술의 원숙한 화해에 도달하다.


예술은 ‘미친 지랄’이다.
“혁명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

세상의, 우리의, 당신의, 천국은 어느 곳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세계 속에서 천국을 세우려고 하다
세상을 버린 자, 세계 밖에서 천국을 꿈꾸려 하다


1844년 4월의 어느날 새벽 4시.
잠에서 깨어난 플로라 트리스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늘부터 반드시 세상을 바꾸고 말리라"고 결심한다. 페루 식민지의 장교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족, 결혼, 사회 등 몇 겹으로 세상에서 저주받은 자였다. 하지만 이 땅의 버주받은 자는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들이 아무 권리도 없이 '종'처럼 살고 있는 남프랑스로 향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저 유명한 19세기의 여성 '체게바라'가 탄생한다. 하지만 몸은 병들고 그녀의 나이 벌써 41살. 하지만 지상에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그녀의 불굴의 의지는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 그녀의 외손자 폴 고갱, 남프랑스에서 반고흐와의 동거 및 엽기적인 사건 이후 가족와 아이 등 세상을 모두 버리고 '나의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타히티로 떠나다. 도덕은 위선이고 예술은 생명을 짓누르는 것일 뿐이었다. 예술이 세상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예술을 매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상에서 노예처럼 살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는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라 천국의 삶 속에서 예술을 되찾기 위한 유토리아에의 열정이었다. 하지만 그도 늙었고, 마음은 이미 병들었다.

희망과 열정과 ‘혁명’을 잃은 우리 시대에 던지는
바르가스 요사의 새로운 문학적 메시지.
"비록 천국은 항상 우리가 찾던 것과는 다른 곳에 있지만 천국을 찾으려 할 때만이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바르가스 요사 소설 30년의 모색을 결산하는 새로운 이정표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두 축을 따라 큰 궤적을 그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소설과 인간의 관능성에 대한 탐구가 그것이다. 전자가 일종의 ‘큰 이야기’라면 후자는 ‘작은 이야기’ 쯤에 해당될 것이다.
먼저 ‘정치 소설’과 관련해 남미 소설을 상징하는 용어가 '마술적 리얼리즘'인데서 잘 알 수 있듯이 남미 현실에서는 초현실적인 것과 봉건적인 것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치 태곳적의 것 같은 식민지 고유의 뿌리 깊은 유물과 서구 제국주의의 최신식 사조가 나란히 공존하는, 예를 들어 미신과 가톨릭이 함께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다소 형용모순적인 개념보다 이를 더 절묘하게 보여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르가스 요사는 이러한 이종 교배적인 현실에 대해 '마술적 리얼리즘' 계열의 주류 작가들처럼 환상과 마법과 현실을 뒤섞는 방법을 택한 것과 달리 현실을 중심에 놓고 역사와 인간을 고찰하는 '정공법'을 택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당에서의 대화』나 그의 창작의 전반기를 대표하는 『세상종말전쟁』은 이러한 경향을 굵직하게 보여준다. 즉 그의 소설은 누보로망 이나 포스트모더니즘 운운하는 서구적 흐름이나 ‘마술적 리얼리즘’ 등의 제3세계적 흐름과는 달리 그만의 독특한 창작방식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세상종말전쟁』 같은 장편소설을 '현대의 대하 서사시'로 만들어주고 있다. 바르가스 요사의 이번 노벨 문학상을 두고 한편으로 '너무 늦었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의 정치 소설은 대부분의 문학이 ‘탈정치화’ 또는 ‘마법화’ 추세에 있던 20세기 후반의문학과 정치에 있어 일종의 ‘정통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문학의 정치적 성향이 결국 그의 대통령 후보 출마라는 현실 정치에의 참여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후지모리의 집권으로 이어진 페루의 일련의 현실 정치 과정에서 이러한 '정치적 실천'은 작품에서는 수면 이하로 가라앉고 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사의 문학은 다른 한편으로는 초기부터 인간의 관능성에 대한 탐구라는 또 다른 궤적을 그려왔다. 아마 20세기 작가 중 인간의 관능과 에로티시즘을 그만큼 재기발랄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온 작가도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것이 앞서와 같은 '정치적 참여 작가‘의 손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층 더 놀랍기만 하다. 『녹색의 집』이나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를 이러한 계열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특히 기이하게 '정치'와 인간의 저 ’어두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에 대한 탐구가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 식으로 엉뚱하게 대립하고 있는 우리 상황에서는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요사에게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축은 아수라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지 한 권의 소설 속에서 하나로 융합되어, 본격적으로 함께 다루어진 적은 드물었다. 이러한 점에서 고갱을 중심으로 한 '예술가 소설'과 고갱의 외할머니인 플로라 트리스탕의 '혁명가 열전'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이 소설은 여러모로 바르가스 요사 소설의 진화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흥미로운 징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진정한 새로움은 이처럼 형식적인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그동안 이 소설가의 정치적 성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진보 대 보수’ 또는 ‘전형’ 논쟁과 관련해서도 새로운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해줄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작가가 평생 추구해온 정치적 해방과 에르티시즘에 대한 탐구에 있어 기존의 보수?-진보 식의 이분법을 넘어서고 있어, 그것이 이 작품을 청년기의 모색에 대한 일종의 완숙기의 결산으로 만들어주고 있다.특히 마치 고갱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기라도 하듯 실감 나게 '늙은 화가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의 반쪽은 작가의 새로운 예술관을 충분히 보여주고 남음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마치 바르가스 요사의 입장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한 고갱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선택받은 한줌의 사람들을 위한 지상 천국을 세우기 위해 이 불완전한 세상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런 곳은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단 말이야.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이 세상의 불완전함에 맞서 싸워야 하는 거야. 이 세상을 개혁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거야.”
즉 해방에의 추구는 ‘미친 짓’이요 ‘지랄 같은 것’이요, 고갱의 경우처럼 타히티에서 다시 마르키즈 제도로 가서까지 추구해도 다 헛된 짓일 뿐이지만 오직 그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가장 끝으로 나간 고갱과 달리 저주받은 세상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고갱의 외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탕의 목숨을 건 열정에 의해 다른 식으로 증언되고 있다. 즉 ‘사생아, 선동가, 화냥년, 남편과 자식을 저버리고 애인을 둔 년, 생시몽주의자이며 이카리아 공산주의자’인 플로라 트리스탕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인간 해방이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지고의 가치임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소설의 한 장, 한 장이 고갱 이야기와 플로라 이야기가 교직되는 식으로 쓰여짐으로써 우리는 전혀 다른 두 세계를 롤러코스트 타듯이 왕복하면서 작가의 새로운 세계관이 새롭게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 소설이 비단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화가들보다 화가들을 더 잘 아는 소설가의 예술가 열전

물론 이 소설은 19세기 미술사의 가장 유명한 스캔들 중의 하나인 고갱과 반 고흐의 반목과 반 고흐의 자해, 그리고 고갱의 타히티행의 전모를 완벽하게 재현해낸 한 편의 예술가 소설로 읽어도 너무나 흥미롭다. 특히 타히티에서 걸작을 하나하나 생산해낼 때의 고갱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은 명불허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하는 이 소설의 압권 중의 압권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객관적 묘사에 바로 고갱의 독백이 이어지게 만드는 절묘한 장치로 마치 독자들이 고갱의 속마음을 거의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것은 이 소설을 절묘한 일종의 '심리적 팩션' 소설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요사의 대가다운 솜씨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처럼 빼어난 예술적 솜씨는 반고흐와 고갱의 기행(奇行)들을 당대의 예술적 진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예술의 상황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구 예술은 원시 예술에 표현된 인간 존재의 총체성을 상실함으로써 몰락하고 말았다. 원시 문화에서는 달랐어. 예술은 종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고, 먹고 화장하고 노래하고 성욕을 채우고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지. 넌 그림을 통해 그 중동무이된 전통을 되살려보려고 노력했던 거야.”
그리하여 레비스트로스처럼 '슬픈 열대'라는 한탄에 머무르지 말고 '검둥이'가, '코케'가 되어야 한다는 고갱, 즉 바르가스 요사의 주장은 '세계화' 시대를 배경으로 놓고 보면 바로 우리 시대의 이야기나 진배 없이 되는 것이다. 즉 고갱은 모든 예술을 집어삼키는 산업과 제도에 맞서 예술을 둘러싼 허울을 잡아삼키는 '식인종'이 되기 위해 타히티 행을 택했는데, 위의 고갱의 말 중 '파리 놈들'을 '디지털'로 바꾸어보면 요사가 19세기 최대의 예술적 스캔들을 이 소설의 주제로 삼은 이유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소설에서 성(性)이 관능 그 자체가 아니라 문명의 억압을 깨는 것으로 새롭게 자리 매김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19세기의 예술적 스캔들이 21세기의 예술적 스캔들로 바뀌어 읽히는 이유이다.

정교하게 교직된 예술과 정치의 이중주 ― 폴 고갱의 외할머니, 플로라 트라스탕 이야기

동시에 이 소설에서 정작 흥미로운 부분 중의 하나는 19세기의 또 다른 실존 인물인 플로라 트리스탕을 통해 그의 소설에 오랜만에 '정치'가 귀환한 것이다. 페루 대통령 선거 출마 등과 관련된 일련의 정치 참여 이후 '정치적인 것'은 거의 그의 작품 세계에서 사라진 것으로 평가됐으나 이 소설에서는 정치가 전면에 다시 부각되고 있다.
물론 '정치의 귀환' 그 자체가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정작 재미있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양상이다. 즉 이 소설에서 정치는 '이데올로기'와 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천국, 즉 희망'과 짝을 이루어 거꾸로 '정치=이데올로기'라는 쌍에 맞서고 있다. 분명 현실 정치에서 한발 물러난 사람의 시선이다. 하지만 한층 더 원숙해지고, 이데올로기의 시대인 20세기에 대한 반성으로 적실해 보이지 않는가? 즉 이데올로기와의 결별과 정치와의 화해인 셈인데, 이것은 바르가스 요사가 겪어온 사회와 비슷한 경로를 따라온 한국 사회가 그와는 반대로 최근 이데올로기의 고수와 정치적 무능을 보이는 것과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고갱의 외할머니인 플로라 트리스탕이 마흔한 살의 나이에 죽음을 앞에 두고, ‘개만도 못한’ 남편이 ‘선사한’ 총알이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채 ‘노동자 해방’과 ‘여성 해방’을 위해 남프랑스로 떠나는 것은 고갱이 타히티로 떠나는 것과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정작 플로라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19세기의 '여자 체게바라'로 불리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불굴의 삶만이 아니라 그녀가 만나는 공상적 사회주의와 가톨릭 세계의 세밀한 묘사이다. 그것은 왠지 스탈린주의와 관료 사회주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소위 억압이 없는 유토피아 건설 운동이 얼마나 쉽게 광적인 이데올로기로 또 대중 위에 올라탄 관료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즉 막상 이 희대의 여주인공과 그녀가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는 20세기 사회주의의 비극의 맹아를 그대로 보여주는데 , 여기서는 분명 작가의 회한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즉 천국을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자는 바로 악마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하는 시선 말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해 정작 작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은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까?
“플로라 할머니는 정의를 찾아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을 테지. 불평불만, 음모, 이웃사랑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야비한 이해관계로 뒤얽힌 복잡한 미로를 들쑤시고 다닌 끝에 마침내 최종 판결을 내렸겠지. 할머니, 그렇게 유난을 떨어댔으니 겨우 마흔한 살 나이로 인생 종친 거잖아! 반면에 폴은? 정의? 개똥 같은 소리였다. 그래서 쉰세 살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플로라 할머니보다 12년을 더 살고 있는 것이다. 폴, 너도 멀지 않았어. 제기랄. 아름다움, 예술, 진짜 중요한 것을 고려한다면, 네 삶도 벌써 끝장난 거야. 정의와 천국, 그렇다. 그것은 개똥 같은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선택받은 한 줌의 사람들을 위한 지상 천국을 세우기 위해 이 불완전한 세상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런 곳은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단 말이야.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이 세상의 불완전함에 맞서 싸워야 하는 거야. 이 세상을 개혁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거야. 안정되고 전도양양한 삶을 살다가, 서른 살도 넘은 주제에 그 모든 걸 내팽개치고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마누라에 자식새끼까지 다섯이 나 주렁주렁 달렸는데! 이게 미친 지랄이 아니고 뭐야?”

천국은 다른 곳에 있으며. 정의니 유토피아 운운은 모두 '미친 지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세상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19세기의 희대의 인물 두 명을 교직 시켜 짜낸 바르가스 요사의 이 소설은 모든 위대한 소설들이 그렇듯이 바로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자 바로 ‘나의 이야기’가 아닐까?

[책속으로 추가]
『어느 사생아의 인생 역정』

혁명이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 결혼을 구실로 여성을 노예로 삼는 그런 사회와 조직적으로 맞서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는데 말이지. 페루의 경험이 진짜 보배였지. 아레키파와 리마에 머무르는 동안, 넌 완전히 변했어.
자신의 시체를 유럽에 묻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 폴리네시아에 묻히고 싶었다. 코케, 이런 점에 있어서는 플로라 할머니를 꼭 빼닮았어. 세계주의자가 되려했던 그 미친 할머니를 말이지. 태어나는 곳은 우연의 소산일 뿐이다, 진정한 조국은 본인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넌 타히티를 선택했어. 넌 그 아름다운 야만인들의 땅에서 한 사람의 야만인으로 죽어가겠지. 이런 생각을 하자 답답하던 심정이 한결 풀리는 것 같았다. 폴, 이제 더 이상 자식들과 친구들을 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단 말이야

예술은 이 협소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파리의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학자들과 수집가들이 예술을 가두어두고 있는 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으로 떨치고 나가 다른 문화와 섞여들어야 한다, 다른 풍경, 다른 가치, 다른 종족, 다른 신앙, 다른 형태의 삶과 도덕과 하나로 섞여들어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파리 놈들이 말랑말랑하고 쉽고 경박하고 상업적인 것으로 바꿔치기한 건강함을 회복할 수 있다 예술은 이 협소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파리의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학자들과 수집가들이 예술을 가두어두고 있는 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으로 떨치고 나가 다른 문화와 섞여들어야 한다, 다른 풍경, 다른 가치, 다른 종족, 다른 신앙, 다른 형태의 삶과 도덕과 하나로 섞여들어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파리 놈들이 말랑말랑하고 쉽고 경박하고 상업적인 것으로 바꿔치기한 건강함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본능과 꿈과 상상력과 육욕을 일깨우는, 이성을 위해 결코 육체를 희생시키지 않는, 피투성이 신들을 섬기는 법을 배울 것이다. 문신을 새기는 법도 배울 것이다. 그래서 그 알쏭달쏭한 문신의 의미를 알아내고, 과거의 풍성한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신비한 지혜를 터득해낼 것이다

그리고 이웃 사람의 살을 먹고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폴은 타락한 술주정뱅이 화가, 위험 분자, 세상의 수치, 부도덕의 원천이었다.
그림과 조각이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떨어져나가면서 유럽과 프랑스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중세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예술은 사람들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집트·그리스·바빌로니아·스키타이·잉카·아스텍 등의 고대 문명과 이곳 마오리족의 고대 문명을 생각해보라.

폴은 서서히 현실감을 잃고 순수한 느낌·이미지·얼크러진 환상의 세계로 잠겨 들어갔다. 그

지금의 네 모습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투쟁하는 여전사로서의 네 모습은 바로 그 여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너는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지. 이 세상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지독하게 잔인하고, 사악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었어. 너는 너의 그 꼴같잖은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맛보았다고 믿었단 말이지.

한편 코케는 마르키즈 제도로 옮겨가고 싶어 몸살을 앓고 있었다. 타히티로부터 천오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그 먼 식민지 땅에서 지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섬에 대해 잔뜩 기대를 걸고 있는 폴을 설득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폴이 자신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폴의 정신 상태는 이제 환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폴은 이렇게 주장했다. 가톨릭 사제, 개신교 목사, 프랑스 본국인, 중국인 상인 등이 타히티와 그 주변 섬에서 말살시켜버린 모든 것이 마르키즈 제도에 순수한 본질 그대로 처녀성을 유지하며 살아 있다, 마르키즈 제도에 살고 있는 마오리족 사람들은 지금도 옛날 모습 그대로 살고 있다, 그들은 자부심이 강하고 자유롭고 야만적이고 박력 넘치는 원시 부족으로 자연과 하나 되어 그들의 신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벌거벗고 살 정도로 순수하며 기독교도 아직 모른다, 축제·음악·신성한 제사·몸에 새긴 의미심장한 문신·의식으로 치르는 집단 성교·부활을 위한 식인 축제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 폴은 어린 시절부터 뒤집어쓰고 있던 부르주아의 탈을 내팽개치고 난 이후로 줄곧 그런 곳을 찾아 헤맸다. 폴은 사반세기 동안이나 그 지상낙원의 흔적을 추적해왔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레키파에서 그런 수모를 당했기 때문에, 넌 그에 대한 반감으로 불의에 대해 알 수 있었고, 불의를 증오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었던 거야. 아버지의 고향은 네게 프랑스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어. 그렇지만 널 반항아로, 정의의 투사로, ‘천덕꾸러기’로 만들어 놓았어. ‘천덕꾸러기’, 그래 넌 자신만만하게 네 자신을 그렇게 불렀어. 네 자서전을 쓸 때 말이야. 그러니 어찌됐던 간에, 플로라, 넌 아레키파에 감사할 일이 많아.

돈으로 썩어문드러진 유럽 문명을 버리고 순수하고 원초적인 세상을 찾아가노라, 겨울을 모르는 그 땅과 하늘, 예술이 상거래 상품으로 취급당하지 않고, 삶 그 자체·일종의 종교·일종의 스포츠로 여김 받는 곳,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예술가도 손만 뻗치면 풍성한 나무에서 먹을 것을 부족함 없이 구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찾아가노라. 그러나 현실과 네 이상은 달라도 너무 달랐어, 코

원시적이고, 건강하고, 기독교를 모르고, 마냥 행복한 문화, 몸뚱이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문화, 그 빌어먹을 죄의식으로 일그러지지 않은 문화. 코케, 너를 남태평양까지 끌어들인 그 문화에서 이제 살아남은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었어. 편견에 휩쓸리지 않은 곧이곧대로의 사랑, 양성을 구비한 사람이든 누구든 모든 사람을, 모든 형태의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 지혜로운 너그러움. 그러나 이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유럽은 머지않아 ‘타아타 바히네’마저 끝장내고 말 것이다. 고대의 신을, 고대의 신앙을, 고대의 관습을 끝장내버린 것처럼. 고대에 존재했던 그 건강하고 유쾌하고 힘이 넘치는 그 문명을 끝장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 옛날 호시절에 사람들은 알몸으로 다녔고, 몸에 문신도 새겼고, 사람도 잡아먹고 했었는데. 그러나 마르키즈 제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코케, 그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그곳으로 가야한단 말이야.

너는 이 그림을 손으로 그린 것도, 머리로 그린 것도 아냐. 상상이 지어낸 산물이었다. 옛날 버릇이 다시 나왔던 것이다.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그 은밀한 욕망, 격렬하게 튀어나온 그 감정, 사납게 달아오른 그 본능, 괜찮은 그림을 그린다 싶으면 여지없이 끼어드는 그 충동에 따라 그린 그림이었다. 코케, 이런 그림은 절대 죽지 않아

‘페루 출신 미개인’은 신비주의 예술가였다, 현대에 있어 가장 종교적인 그림은 그 화가가 1888년에 브르타뉴 지방 피니스테르의 작은 마을 퐁타방에서 그린 <설교 후의 비전>이라는 그림이다, 그 그림은 중세에 꽃을 피운 이후로 죽 침체되어 있던 정신적·종교적 불안감을 현대 예술로 부활시켰다.
마오리족의 전통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이 섬, 썩어문드러진 유럽을 점점 닮아만 가는 이 섬에서 말이야.

세상을 벗어나, 저 아득한 원시의 땅으로 달아나, 물질문명과 연을 끊고, 열과 성을 다해 그림에 몰두하며, 흉허물 없는 우애로 다져나가는 그 공동체. 진짜 멋들어진 소리였어! 그 미친 네덜란드 놈에게는 뭔가 아름답고, 고상하고, 공평하고, 너그러운 면이 깔려 있었지. 놈은 순수한 예술가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했어.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들, 뭔가를 꿈꾸는 사람들, 속세로 내려온 성자들, 하나의 이상을 위해 혹은 한 여자를 위해 싸움판에 뛰어든 중세의 기사와 같이 예술에 몸을 던진 사람들. 그래, 바로 네 할머니가 염원했던 꿈과 다를 게 없는 꿈이었지. 할머니는 그런 꿈을 꾸며 다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프랑스를 돌아다녔어. 할머니는 인류의 악을 근절시키기 위한 혁명군을 모집하러 다녔던 거야. 플로라 할머니와 그 미친 네덜란드 놈은 서로 죽이 잘 맞았을 테지, 코케.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자유분방하고 건강미 넘치는 사람들, 편견도 원한도 모르는 사람들, 삶에 순응하며 자연스럽게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 원시적인 열정과 힘이 넘치는 사람들. 인생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코케, 그렇지 않아? 물질로 타락한 유럽에서 벗어나 이국의 땅을 찾아가겠다는, 문명이라는 것이 유럽에서 뿌리뽑아버린 원초적이며 종교적인 힘을 찾아가겠다는 꿈을 꾼 사람은 바로 빈센트였어. 그러나 놈은 유럽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 반면에 너는 타히티에 올 수 있었고, 급기야 마르키즈 제도까지 올 수 있었어.

“그래 이제 만족하나, 빈센트, 자네 꿈을 내가 이루었다네.” 폴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여기 쾌락의 집이 있네, 오르가슴의 집이 있단 말이야. 아를에 있을 때 넌더리가 나도록 떠들어댄 그 집이 말이야. 우리 생각처럼 되진 않았어. 빈센트, 자네도 알겠지?”

내 그림이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해주었으면 좋겠어, 폴. 예수가 말로 사람들을 위로했듯 말이야. 고전 회화에서 후광은 영원한 것을 암시하는 거야. 나는 그 후광을 내 그림에서는 색의 방사와 진동으로 표현하고 싶은 거야.

모험과 광기와 탐구와 실패와 투쟁으로 일관된 격렬했던 일생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같았다

이제 ‘다른’ 여자가 되겠다, 사슬을 끊을 것이다, 진짜 사는 것답게 자유롭게 살 것이다, 부족한 점을 채우겠노라, 지성을 개발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을 할 것이다, 많은 일을, 다른 여자들이 네가 살아왔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성스러운 믿음 혹은 종교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너는 또 민족주의도 신랄하게 너처럼 솔직하게 자신을 까발린 여자는 그때까지 전혀 없었으니까. 너처럼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떠벌린 여자는 없었으니까. 너처럼 사회나 관습이나 결혼제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항한 여자는 없었으니까

당시 넌 글을 쓰는 것만으로, 너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핍박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여성들의 평등권을 보장하고, 이 사악한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실현시키고 하는 일이 이기주의적인 사랑타령보다, 이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쾌락만 추구하는 삶보다 훨씬 중요한 거니까. 지금 네 삶을 송두리째 붙들고 있는 걱정거리는 오직 인류에 대한 사랑이란 말이지. 플로라, 네 딸아이 알린느조차 네 그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끼어들 여지가 없을 정도란 말이야. 알린느는 지금 암스테르담의 어느 재봉사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중이지만, 딸아이에게 편지 쓸 생각도 못하고 몇 주일이 훌쩍 지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잖아.

사생아, 선동가, 화냥년, 남편과 자식을 저버리고 애인을 둔 년, 생시몽주의자이며 이카리아 공산주의자.

선택받은 한줌의 사람들을 위한 지상 천국을 세우기 위해 이 불완전한 세상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런 곳은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단 말이야.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이 세상의 불완전함에 맞서 싸워야 하는 거야. 이 세상을 개혁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거야.

안정되고 전도양양한 삶을 살다가, 서른 살도 넘은 주제에 그 모든 걸 내팽개치고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마누라에 자식새끼까지 다섯이나 주렁주렁 달렸는데! 이게 미친 지랄이 아니고 뭐야?

서구 예술은 원시 예술에 표현된 인간 존재의 총체성을 상실함으로써 몰락하고 말았다. 원시 문화에서는 달랐어. 예술은 종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고, 먹고 화장하고 노래하고 성욕을 채우고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지. 넌 그림을 통해 그 중동무이된 전통을 되살려보려고 노력했던 거야

목차

01. 오세르와 플로라 - 1844년 4월
02. 악마, 어린계집아이를 훔쳐보다 - 마타이에아, 1892년 4월
03. 사생아와 도망자 - 디종, 1844년 4월
04. 신비스러운 물 - 마타이에아, 1893년 2월
05. 샤를 푸리에의 그림자 - 리옹, 1844년 5월과 6월
06. 안나, 자바 아가씨 - 파리, 1893년 10월
07. 페루에서 온 소식 - 로안느와 생테티엔, 1844년 6월
08. 알린느 고갱의 초상화 - 푸나아우이아, 1897년 5월
09. 바다 여행 - 아비뇽, 1844년 7월
10. 네버 모어 - 푸나아우이아, 1897년 5월
11. 아레키파 - 마르세유, 1844년 7월
12. 우리는 무엇인가? - 푸나아우이아, 1898년 5월
13. 구티에레스 수녀 - 툴롱, 1844년 8월
14. 천사와 싸우다 - 파피테, 1901년 9월
15. 캉가요 전투 - 님므, 1844년, 8월
16. 쾌락의 집 - 아우오나(히바오아), 1902년 7월
17. 세상을 바꿀 말들 - 몽펠리아, 1844년 8월
18. 늦바람 - 아투오나, 1902년 12월
19. 괴물 도시 - 베지에르, 카르카손느, 1844년 8월/9월
20. 히바오아의 무당 - 아투오나, 히바오아, 1903년 3월
21. 마지막 전투 - 보르도, 1844년, 11월
22. 장밋빛 말 - 아투오나, 히바오아, 19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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