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숲의 정적」으로 등단한 김영옥의 첫 소설집 『숲의 정적』. 작가는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방식에 천착하는 글을 쓰고 있다. 세상에 치이고 인간관계에 부대끼면 사람은, 자연으로 숨어든다. 녹색은 들끓는 욕망을 다스려주고,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준다. 소설에서 자연은, 도피처이며 새로운 삶이 뿌리내리는 보금자리가 되어주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자연은 위안처가 되지 못한다. 외려 인간을 옥죄거나 무력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사방에서 둘러싸 옥죄는 ‘녹색’, 사람을 삼키고도 무심한 ‘늪과 저수지’, 강의 ‘물’, 천지만물과 기억마저 덮고 묻어버리는 ‘눈’, 사람을 찌르고 들어오는 ‘햇빛’은 인물들을 위협한다. 이 상황을 견디게 해주거나 구멍에서 놓여나게 해준다면 무엇이든 괜찮다. 하지만 인물들은 살기 위해 딴청을 부리고, 삶을 위한 필사적인 환상을 직조해낸다.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을 물리치려고 밤낮없이 베틀 앞에서 천을 짜내듯, 소설 속 인물들은 조각보와 양산과 사람을 닮은 모형을 만든다. 페넬로페가 밤새 짜낸 천은 아침이면 실로 풀어내야 한다. 겹겹이 쌓인 눈 아래 사물은 그대로다. 다만 덮을 뿐이다. 물을 끊어낼 순 없다. 마냥 흘러갈 뿐이다. 죽음을 지울 순 없다. 잠시 잊을 뿐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노동, 내 손끝에서 만들어진 무언가는 시간의 무자비함을 잊게 한다. 시간은 내 손길 아래, 내 식대로 모양새를 만들어간다. 권태, 불안, 고독과 고통의 그림자가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