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도 생각했는데 낙하산은 모아다 어디 쓰는 걸까? 너희 생각엔 어때?”
“이유가 뭐든 무슨 상관이냐. 키드, 네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다.”
디에고가 비스킷을 입에 가득 넣은 채 말하는 바람에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넌 머리가 깡통이니까 모르는 거야”라며 녀석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스파크는 럭키스트라이크를 한 대 물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뺨을 오므리고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아주 맛없게 피운다.
“잘은 모르지만 팔아서 돈 벌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어? 그런 걸 살 사람이 있어?”
“명주잖냐, 그거. 가볍고 튼튼하다고.”
그러자 묵묵히 순서대로 깡통을 데우고 있던 에드가 입을 열었다.
“아니, 요새는 나일론제도 섞여 있다. 실제로는 낙하산으로 나일론이 더 적합하거든. 습기에 강하고 말이지.” _ 76~77쪽
소시지와 사과 링 구이가 다 될 때까지 식당에서 다른 부대의 뒷정리를 도왔다. 모든 부대가 한꺼번에 먹었다간 로지가 터져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을 조금씩 비껴 식사를 하도록 조리 타이밍도 조정한다.
끝마무리는 분말 달걀로 만든 스크램블드에그다. 알루미늄 봉지를 뜯어 거대한 볼에 통째로 가루를 쏟고 물을 더해 주걱으로 섞었다. 순식간에 기이한, 의심할 여지없이 달걀이 아닌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굳이 따지자면 이스트와 메이플시럽 냄새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런 연상은 팬케이크에게 실례이니 그만두었다. 거기에 식당에서 칸막이 틈새로 풍겨온 사내들의 땀내 나는 공기가 더해졌다. 독가스실에 달려 들어가는 편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_ 141쪽
앨런 선임하사의 명령으로 지하실을 살펴보러 갔던 던힐과 라이너스가 돌아와 보고했다.
“키드 말이 맞는데요. 부부는 둘 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을 맞아 죽었습니다. 몸싸움을 벌인 흔적은 없이 몸을 맞대고 앉아 있었습니다.”
“자살인가?”
“그렇겠죠.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 댄 자국도 남아 있습니다.”
식탁에 몸을 기대고 있던 맥이 어깨를 으쓱하고 바로 결론을 내리려 했다.
“그럼 동반자살이겠지. 남편이 아내를 쏘고 왼손으로 아내의 시체를 끌어안은 다음 이번엔 자기를 쏜 거야.”
“하지만 전쟁터에서 자살할 필요가 뭐가 있지?” _ 254쪽
“그래. 한밤중에 자다 깨면 야전복을 입은 녀석이 발치에 잔뜩 서 있거든. 고개를 들면 얼굴이 창백한 독일군이 빤히 들여다보고 있고 말이지. 얼마 동안 보고 있으면 없어지니까 그냥 둔다.”
현실주의자인 줄 알았던 라이너스에게 유령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나도 꿈이나 공상 속에서라면 죽은 사람을 만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깨어 있을 때는 한 번도 없었는데. _ 348쪽
“또 탐정 놀이냐? 엉? 너희들 때문에 아주…… 귀찮아 죽겠다고, 이 거지같은 놈들아. 내가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 웃었냐? 심심한데 잘됐다고?” _ 403쪽
“레몬 파이의 필링은 콘스타치와 설탕을 잘 섞으면서 물을 더해 부드럽게 한다. 냄비에 중탕으로 걸쭉해질 때까지 가열한다. 그 뒤 버터와 계란 노른자를 투입.”
“어이, 뭐가 그렇게 시끄럽냐?” 간수가 또 문을 두들겼다.
“그냥 레시피를 외우는 것뿐인데. 난 조리병이니까.”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도, 암호를 송신하는 것도 아니다. 머리도 점점 맑아졌고 자신감이 생겼다. 간수는 잠시 침묵했다가 “작은 목소리로 해라”라고만 주의를 주었다.
허락도 받았겠다, 나는 계속해서 레시피를 읊조렸다. 보리 수프를 끓이고 진짜 계란을 풀고 P-38로 콩과 참치 통조림을 딴다. 치즈를 뿌려 노릇노릇하게 굽고 삶은 새우에 타바스코와 갈릭 오일을 뿌렸다. 야전 취사 차량의 연기 냄새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뜨거운 오븐과 떠들썩한 말소리, 스푼으로 접시를 두들겨 밥 달라고 재촉하는 식욕 왕성한 병사들. 배고팠던 나날을 달래주는 따뜻한 수프. _ 454~455쪽
아니, 어쩌면 지금 이 풍경이 가짜일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어났더니 또 여느 때와 같은 전쟁터더라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광장의 분수, 벤치에 누워 무방비하게 자는 노인, 인도 곳곳에 떨어진 담배꽁초. 꽁초가 이렇게나 많으면 분명 아이들이 떼로 몰려들어 주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아이도 달려오지 않았다. 울면서 부모를 찾지도 않고, 우리가 준 초콜릿이며 비스킷을 게걸스레 먹지도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거대한 분홍색 아이스크림 모양 간판이 광고탑 위에 붙어 있었다. 깨끗한 쇼윈도, 네온사인,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 청결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러고 보니 좋은 냄새가 나는 여자도 오랜만이었다.
평화롭다. 이게 바로 평화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싸웠다.
그렇건만 이 허무함은 뭔가? _ 5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