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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전쟁 1954-1962

알제리전쟁 1954-1962

  • 노서경
  • |
  • 문학동네
  • |
  • 2017-09-29 출간
  • |
  • 672페이지
  • |
  • 138 X 222 mm
  • |
  • ISBN 9788954646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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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식민주의 종식을 외치며 제국에 맞선 알제리 민중의 전쟁!
왜 프랑스인까지 알제리 독립을 공개 지지했는가?
알제리의 민중과 그에 동조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투쟁
부정의不正義에 항거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알제리전쟁사!

전쟁이 아닌 치안교란?

1954년 10월 31일 심야에 알제리 각지에서 FLN이라는 낯선 단체의 동시다발 테러로 시작된 전쟁, 법적으로 1840년부터 식민지였기에 많은 이가 당연시했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알제리는 프랑스다’라는 등식을 과감히 거부한 전쟁, 영국에 버금가는 광대한 해외영토를 경영해온 제국 프랑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반식민주의 투쟁, 점점 격렬한 전투로 비화되고 7년여를 끌면서 수많은 청년들을 전쟁터에 투입하고 숱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내 이길 수 없었던 전쟁, 그렇기 때문에 알제리 독립 이후로는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고 말하지 않았던 전쟁, 심지어 20세기가 다 저물 때(1999년)까지 정당하게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적떼의 반란’ ‘치안교란 사태’로 치부했던 전쟁, 이것이 알제리전쟁이다.

무엇이 이적행위인가?
군사적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고 승리는 당연히 프랑스의 차지여야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제국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던 프랑스에 저항한 것은 알제리인들만이 아니었다. 양심 있고 양식 있는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 언론인들이 이미 제국주의의 폭압과 부정의, 그로부터 신음하는 식민지인의 고통을 고발했고, 여기에 사르트르와 아롱 같은 참여적인 지식인들이 가세해 알제리 독립을 공개 지지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깊어지면서 특히 프랑스 군인과 경찰에 의한 알제리 전투원과 민간인을 상대로 한 학살과 고문이 출판사들에 의해 여론화되자 많은 이가 이 전쟁의 목적을 다시 생각하기에 이른다. 식민지 보존에 위해 전쟁에 강제 징집된 수많은 청년들의 희생은 프랑스 본국을 뒤흔들었고, 이것이 알제리가 독립을 이루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한다. 알제리의 투쟁을 도운 사람들 중에는 철학자이자 편집자였던 장송처럼 FLN을 직접 지원한 지하조직 사람들도 있었고, 마르티니크 섬 출신의 파농처럼 아예 그 일원으로 활약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크다 해도 어떻게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가. 이 날선 질문 앞에 이들은 자신의 행동은 ‘배신’이 아니며 ‘정의’를 위한 것이라 했다. 부정의에 맞서는 것이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탈식민주의의 다양한 입장
반식민주의 논자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는 이 사상적 흐름을 살찌웠으며 그로써 다음 세대의 지적 성장을 보장해주었다. 이 책은 그런 반식민주의의 역사적 사건으로 1956년 1월 27일 파리에서 열렸던 ‘바그람 대회’를 꼽는다. 알제리와의 전쟁을 반대한다는 취지의 이 대회에는 파리의 프랑스 지식인은 물론 식민지의 지식인들까지 다양한 인사가 참여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사르트르의 유명한 ‘식민주의는 체계다’라는 간명한 명제가 나왔다. 이와 같이 식민주의와 식민지전쟁에 반대한 것은 좌파만이 아니었다. 소르본느의 사회학 교수 레몽 아롱도 결국 이 싸움에서 알제리는 독립을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알제리 출신의 카뮈는 이들과 입장과 달랐다. 그는 식민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알제리의 독립은 프랑스와 알제리 모두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립이 아닌 공존으로 문제를 풀려 했던 그의 주장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그는 결국 침묵으로 일관한 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알제리전쟁 기간에 알제리 현지에는 많은 프랑스인이 머물고 있었다. 그중 정부의 지원을 많아 알제리 현지를 조사한 인류학자 제르멘 틸리옹의 입장은 카뮈의 것과 다소 유사하다. 그녀는 프랑스-알제리의 동맹을 중심으로 식민주의에서 벗어나면 알제리가 북아프리카의 중요 국가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다른 견해를 지닌 인류학자(사회학자)도 있었다. 그가 바로 피에르 부르디외이다. 현대 사회학에 큰 영향을 준 부르디외 사회학은 알제리 연구가 그 시작이었음을 이 책은 강조한다. 알제리전쟁 초기였던 1955년 알제리 땅을 밟고 종전 무렵은 1961년까지 부르디외에게 알제리는 가장 큰 학문적 연구대상이었다. 『알제리 사회학』이나 압델말렉 사야드와의 공저 『뿌리 뽑힘』은 알제리의 식민지 현실, 그리고 프랑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살아가는 하층프롤레타리아의 처지를 누구보다 깊이 있게 탐구한 명저로 꼽힌다. 이렇게 식민지의 현실과 알제리 독립의 정당성을 지지한 학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선구적 입장들은 출판을 통해 대중으로 퍼져나갔다.

출판사들의 저항, 장송망 사건, 그리고 법적 투쟁
피식민지인들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고 투쟁에 나선 지식인들과 일반 시민들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는가?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저항정신에서 유래한다고 밝힌다. 이 책 역시 그런 입장에 동조한다. 특히 출판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알리고 제국주의의 사멸을 주장했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존재했다. 가톨릭 계열의 출판사 쇠유, 레지스탕스 지하출판사의 전통을 갖고 있던 미뉘, 판매 금지된 미뉘의 책들을 펴냈던 스위스의 시테 출판사, 세3세계라는 거시적 주제 안에서 알제리 문제에 집중했던 마스페로 출판사 등이다. 이들은 인권의 나라 프랑스가 학살과 고문을 자행하고 있음을 시민들에게 고발했고,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이렇듯 반대의 여론을 형성해가던 알제리전쟁에서 특히 충격적인 사건은 ‘장송망 검거사건’이었다. 프랑스인이 알제리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었다. 심정적인 동조에서 언론이나 출판을 통한 참여까지. 그러나 프랑스의 적에 해당하는 알제리 무장단체를 직접 돕는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이 지하조직의 구성원들은 배우에서 일반 시민까지 출신도 매우 다양했다. 국가에 대한 저항권은 그 범위와 한계가 어디까지를 질문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 지하조직의 중심적 인물은 사르트르의 제자이자 철학도로, 유명한 시사지 『레탕모데른』과 쇠유 출판사의 편집자이기도 한 프랑시스 장송이었다. 장송망 조직원들의 행동이 저항의 극한을 보여준다면, 프랑스 변호사들의 식민지인 변호는 프랑스 법적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알제리전쟁 전부터 식민지인들에 대한 공동변호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57년 알제 도심에서 폭탄테러를 가한 혐의로 법정에 선 자밀라 부히레드를 변호한 자크 베르제스의 경우이다.

알제리인들의 투쟁과 분열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반식민주의 투쟁, 식민지 독립, 냉전과 제3세계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세계질서에 빨려드는 두 나라의 정치사회적, 역사적 측면을 조망하면서도 그 안에서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인물 군상 하나하나의 존재를 세밀하게 부각시켜 질문하고 성찰한다는 점이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것이 제2부로,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알제리인 자신의 투쟁과정을 자세히 소개한다. 포괄적인 북아프리카 지역사 연구가 아닌 심화된 알제리 역사, 그중에서도 현대의 분기점이 된 알제리전쟁사에 대한 본격 연구로는 국내 최초의 연구서일 것이다. 독립투쟁에 헌신한 알제리 여러 정파 간의 이견과 충돌, 내적 분열은 독립 이후 세계의 모든 신생국가가 처해야 했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1990년대 알제리 내전의 재연, 최근의 파리 테러 등은 알제리전쟁을 모르고선 이야기할 수 없다.

민중당 - 민족해방전선 - 학생운동 - 임시정부
FLN은 단순한 테러 무장조직이 아니었다. 이들의 정체 파악이 어려웠던 것은 이들이 민중당에서 파생된 비밀 지하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민중당은 메살리 하즈라는 민족지도자가 주축이 된 정통성 있는 정치조직이었다.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수형의 상징인 메살리 하즈는 알제리인의 정신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또 ‘북아프리카의별’이라는 정치조직의 역할도 대단히 컸다. 이런 단체들과 또다른 지도자 페르하트 압바스에 공명해, 알제리 민중은 세계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 이미 알제리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세티프 진압사건 같은 무자비한 프랑스의 탄압은 민중을 산악으로 내몰았다. 마키로 불리는 산악무장대의 출현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들은 1954년 11월의 공식적인 전쟁선언이 있기 전까지 투쟁정신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곧 FLN의 출현으로 대프랑스 투쟁은 더 조직적이고 치열해졌다. 그러나 이 알제리인들은 무장투쟁만으로 문제가 풀리리라 생각지 않았다. 숨맘 계곡에서 개최된 범민족 대회, 이른바 숨맘 대회에서 몇몇 중요한 강령들을 채택한다. 강령의 핵심 중 핵심은 “정치가 군사에 앞선다”라는 선언이었다. 이 숨맘의 강령에 따라 알제리의 독립은 이제 국제 여론전의 양상을 띤다. 이 과정에서 참여자 모두 익명으로 기사를 썼던 『엘무자히드』가 한몫을 하며, 프랑스와 알제리의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에 나서고, 페르하트 압바스를 수반으로 추대한 임시정부가 서방을 상대로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분투한 끝에, 유엔총회에서 알제리 문제가 공식 의제로 상정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을 겪고 마침내 1962년 프랑스 에비앙에서 휴전협정이 이뤄진다.

참다운 지성이란 무엇인가?
메살리 하즈의 민중당, 무장투쟁의 FLN, 이들을 계승하여 군사활동이 아닌 정치활동, 즉 외교로써 유엔의 승인을 얻으려 분투했던 국제 감각의 임시정부 수반 페르하트 압바스 외에도 또 이 책은 총파업으로 민중저항을 주도하다 감옥에서 생을 마친 매력적인 정치범 라르비 벤 미히디, 도심의 여성 전투원들, 카빌리의 산악무장대, 대학생 단체에 집중하여, 많이 아는 것이 지성이 아니라 깨어 있는 정신의 성장이 지성이라는 성찰을 주며 무엇이 참된 지성(지식인)인가를 되묻게 한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어렵게 독립했던 우리에게 알제리전쟁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강자에 맞선 약자의 싸움, 그 저항과 분열의 역사는 우리의 과거를 냉정히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미뉘 출판사Les Editions de Minuit’는 1942년 독일 점령기에 작가 베르코르(‘장 브륄레르’의 가명)와 피에르 드 레스퀴르가 창간한 작은 출판사였다.5 미뉘 출판사의 베르코르는 나치 점령기에 비시 정부에 타협적이던 거대 출판사 갈리마르와 그라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들 출판사가 종전 후 전쟁문학을 출판목록에 넣는 것을 마뜩찮게 보았으며 그런 출판정신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 미뉘가 생각하는 저자는 문학으로 시대의 문제를 이끄는 작가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를 껴안은 시민으로서 예술에 전념하는 작가였다. 그랬기에 식민지 정치사회를 말하는 출판물과 새로운 문학사조 누보로망의 관계는 단절적이지 않았고, 참여적 정치문헌과 실험적 순수문학의 양 날개는 공존할 수 있었다. (162-165쪽)

그러나 정작 말썽을 일으킨 미뉘의 책은 1957년 10월 출간된 『자밀라를 위하여』였다. 변호사와 기자가 그들이 도운 알제리 여성 자밀라 부히레드에 관한 수사와 재판 기록을 수록한 책이었다. 알제전투가 있기 수개월 전인 1956년 10월부터 알제 시내의 고급 식당가와 항공사를 겨냥해 폭탄테러가 있었고 젊은 여성들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중 22세의 자밀라 부히레드가 테러 혐의로 체포되어 알제 군사법정에 넘겨졌고 이때 변호사 자크 베르제스와 기자 조르주 아르노가 자청하여 자밀라 부히레드의 변호에 나섰던 것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묻힐 수도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앙드레 프로사르, 피에르 라자레프 같은 이름난 언론인과 우익 『로로르』와 『프랑스수아르』 기자들이 이 책을 대서특필해 보도함으로써 일반의 관심을 증폭되었고 이는 곧 판매로도 이어졌다. (167쪽)

1957년부터 차츰 형성된 조직망 가담자가 얼마인지는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장송도 스위스인, 벨기에인이 모두 몇 명인지 말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편차가 있지만 연구자들은 수백 명 선으로 짐작한다. 분명한 것은 상당히 이질적인 여러 층의 사람들이 가담해 있었다는 점이다. (...) 한편 프랑시스 장송이 편집자로 일하던 쇠유 출판사에서도 장송의 책 『도덕의 문제와 사르트르의 사유』를 유심히 읽은 여직원과 여성 영업부장이 조직에 가담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장송망에는 여성 가담자 비중이 높았다. 18세에 반나치 공산당 지하조직에 들어가 1956년에 모스크바까지 방문할 만큼 열성적이었다가 소련의 헝가리 진압으로 탈당한 여성, 유서 깊은 알제리 유대계 출신으로 블리다 주앵빌 병원에 일하다 파리로 추방된 여성 정신과 의사(『파농 평전』의 저자로 유명한 알리스 셰르키), 레지스탕스 출신의 흑단 가구 제조공 아버지의 딸인 여성 의사 등이 있었다. 장송망 재판에서 최고형인 10년 금고형에 7만 프랑의 벌금, 5년간 체류금지, 공민권 정지의 징벌을 선고받은 프랑스 최연소의 교수자격 수여자 여성, 사회당과 공산당이 분열을 일으킨 1920년의 투르 사회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공산당에 가입하고 다시 탈당해 레지스탕스로 활약한 아버지를 둔 철학과 출신의 여성 기자도 있었다. (221-222쪽)

FLN이 전쟁을 선언하기 전까지 변호사들이 매달린 사건은 메살리 하즈에 대한 재판이었다. 식민지에 관심 있는 식자층이라면 메살리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누구보다 정이 가는 식민지 억압의 상징이 바로 메살리라고 할 수 있었다. (...) 메살리 하즈는 192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경찰의 사찰을 받아왔던 거물 식민지인이었다. 서부 틀렘센 출신인 메살리는 파리에 건너와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하고 인도차이나의 호찌민과 더불어 식민지민족주의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런 메살리 하즈를 지지하는 층은 파리 교외, 북부 프랑스, 마르세유, 알제리 서부와 동부에 널리 퍼져 있었다. (273쪽)

OAS의 포피 변호사 살해는 유럽인이라 하더라도 자유주의자는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포피는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 <1면 톱뉴스>에 출연한 자리에서 프랑스-알제리는 사멸했고 쟁점이 될 수 없다고 했었다. 변호사 살해는 포피로 끝나지 않았다. 알제리인 변호사 일곱 명이 OAS의 손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피살되었다. 포피를 승계한 알제 법정 소속 피에르 가리그도 1962년 1월 알제 사무실에서 OAS의 손에 살해당했다. 델타특공대가 이들 살해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었지만 OAS 특공대는 변호사만 응징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에비앙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사흘 전인 1962년 3월 15일, 물루드 페라운과 동료 교사 일곱 명은 알제 시내의 학교에서 OAS 대원에 의해 사살되었다. (296쪽)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총 91호가 발행되었던 『엘무자히드』는 1957년 봄부터 진용이 달라진다. 튀니스 편집진은 파리 FLN 연맹 책임자 알리 하룬, 22세의 보르도 문과대생 호신 부자헤르, 보르도 의대를 중단하고 FLN에 가담한 마히에딘 무사우이 사데크였다. 프랑스어판보다 풍성한 아랍어판은 아랍어 프랑스어 이중어 구사에 능숙한 아흐메드 부압델리, 자히르 이하다덴의 손을 빌렸다.45 마히에딘이 과감하게 편집 조율, 지면 작성, 재정 운용을 도맡았을 무렵 그가 가진 경험이라곤 오랫동안 신문을 열심히 읽었다는 것뿐이었다. 『엘무자히드』 제작자 중 직업적 신문기자는 하나도 없었다. (379쪽)

1957년 1월에 추방된 파농을 『엘무자히드』로 초빙한 당사자가 바로 아반 람단이었다. 파농은 튀니지의 마누바 정신병원으로 일터를 옮겨 진료를 보고 알제리해방군 부상자들을 위해 국경을 오가면서 마지막에는 『엘무자히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1960년에 갑자기 백혈병이 발병하기 전까지 파농은 이 신문에 수많은 글을 썼고 사후에 그 기사들은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아프리카 혁명을 향하여』라는 책으로 편집, 출간되었다. 『엘무자히드』의 모든 논설들은 익명이었기에, 파농의 아내 조시 파농의 검증을 거쳐 확인이 가능한 글만 모은 것이다. (387쪽)

어떻든 튀니지와 모로코의 식민지 건설은 프랑스 단독으로 진행할 수 없었고 에스파냐, 독일, 이탈리아 같은 이해 당사국을 고려해야 했다. 반면 알제리는 그렇지 않았다. 20세기부터 알제리에는 자율적인 통화와 은행, 채권이 있었지만 프랑스의 해외영토라는 명분으로 프랑스의 독점적 처리를 따라야 했다. 세 나라를 통치하는 부서도 달랐다. 알제리는 정복 당시 해군에서 육군으로 군부의 관할이 되었고 튀니지와 모로코는 처음부터 외교부 관할이었다. (...) 그 무렵 국제관계에서 결정적인 함수가 된 것은 알제리 영토 안에 엄청난 매장량의 석유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1956년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드골의 부상은 이 지하자원의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1958년 드골이 전권을 획득하고 보름이 지난 6월 17일에서 20일 사이 모로코와 튀니지 간 협력 협정을 체결하는 튀니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FLN을 협정에서 제외했을 뿐만 아니라 공식 행사에서도 배제하였다. 그 최악은 프랑스의 다른 기지는 4개월 이내에 전부 폐지하지만 비제르트 기지만은 유보한다는 프랑스-튀니지 협정의 조인이었다. 튀니지와의 통합을 유지하려는 드골의 생각은 FLN에게는 말 그대로 전쟁을 의미했다. (444-445쪽)

프랑스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프랑스적 가치를 수용하고 존중할 의사가 충분했다는 것은 바로 그 사실 자체로 인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신생 독립국가가 되려는 나라의 학생들은 세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고 시간은 너무 뒤처졌기에 부정 자체에 모든 해답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민족 외에는 의심과 경계로 다른 사회, 다른 나라, 다른 문명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 그런 좁은 태도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여기든 저기든 손잡을 수 있다는 공염불 같은 공존을 의미하지 않았다. 특히 학생 운동가들에게 아랍-이슬람 문명을 아끼고 가꾸겠다는 것은 타문화의 불관용과 거부를 의미하지 않았다. 아랍-이슬람은 모든 인간이 기독교-라틴 문명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믿는 세계에 대응하는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학생들은 자신의 나라를 좀먹고 시달리게 했던 것과 공존하려는 의지를 가졌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존재 의지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육 민주화와 문맹퇴치만으로 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았다. 식민체계에 대항하고 민족문화를 되살리고 꽃피우려 더 깊은 것을 요구하였다. 벤야히야가 명문의 정관을 작성한 것은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565-566쪽)

저자소개

저자 노서경은 서울대학교 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일보 외신부 기자로 6년간 근무했다. 그후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를 주제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사와 정치사, 알제리 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지은 책으로는 『지식인이란 누구인가』가 있고, 옮긴 책으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비롯하여 『역사를 보는 이슬람의 눈―이븐 할둔과 역사의 탄생, 그리고 제3세계의 과거』 『지식인의 배반』 『장 조레스, 그의 삶』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공역) 등이 있다.

도서소개

제국주의를 넘어선 민족독립과 제3세계의 상징, 알제리전쟁!

흔히 ‘알제리해방전쟁’ 또는 ‘알제리독립전쟁’으로 지칭하나 이 책에서는 ‘알제리전쟁’으로 했다. 보다 폭넓은 범위에서 전쟁의 내적 함의를 탐색하겠다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선택이다. 알제리전쟁은 20세기 중반 세계를 뒤흔들었다. 비록 북아프리카에 한정되긴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도드라지는 시대적 징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반식민주의가 확장되었고 제3세계가 부상하면서 알제리전쟁은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 되었다. 또 국가에 대한 시민의 저항과 거부는 곧 닥쳐올 프랑스 청년 학생들의 68혁명을 예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1830년대부터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식민지화된 알제리는 세계 각지의 해외영토(프랑스 식민지) 가운데 가장 각별하게 여긴 식민지였다. 인위적으로 이주시킨 옛 프랑스인들 때부터 100년 넘게 살아가고 있던 수많은 피에누아르(알제리-프랑스인)에게 이 알제리 땅은 분리 불가한 자신의 영혼과 같았다. 따라서 자신의 일부로 인식되던 땅 알제리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알제리인이 프랑스인이라 했지만 알제리인은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다’라고 거부했다. 여기서 두 겹의 질문이 생긴다. 타자가 아니라는데, 왜 계속 ‘너는 나다’의 동일성을 강요하는가? 거꾸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국민국가를 이룬 적 없는 알제리가 어떻게 나를 주장할 수 있는가?

이 책은 1, 2부로 나누어 알제리전쟁을 조명한다. 서장에서 알제리의 장구한 역사, 알제리전쟁의 발생 배경, 경과, 복잡한 양상 전체를 요약해 보여준다. 제1부 프랑스 편은 알제리전쟁에서 제기됐던 이슈들이 프랑스 국내에서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 살핀다. 사르트르, 아롱, 장송, 틸리옹, 부르디외 같은 지식인들의 상이한 입장, 제2차 세계대전 후 은폐된 진실을 알린 출판사들의 저항, 전쟁에 징집된 일부 프랑스 청년들의 탈영과 징병 기피, 알제리 FLN을 직접 지원한 장송망 사건, 죽음을 무릅쓰고 알제리인을 도운 프랑스와 알제리의 변호사들이 소개된다.

제2부 알제리 편에서는 알제리인 스스로가 반란자가 아닌 정당한 민족세력임을 어떻게 주장했는지, 민중당의 지도자 메살리 하즈와 역사의 6인, 독립의 밑돌이 된 ‘숨맘 대회’가 어떻게 개최됐는지, 오레스-네멘차 산악지대의 마키자르와 주민들, 펠라가, 무명의 학생들이 프랑스군의 폭력과 고문, OAS의 테러에 어떻게 맞섰는지, 벤 미디히가 어떻게 총파업을 어떻게 이끌고 봉기했는지, 무장투쟁단체에 지나지 않던 FLN(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어떻게 정치체로 거듭나 독립된 국가를 수립하게 됐는지,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정치활동이 독립 승인을 얻는 데 어떤 지렛대 역할을 했는지, 끝으로 알제리의 희망이었던 대학의 학생조직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가 상세히 다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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