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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당록

조선반당록

  • 이이담
  • |
  • 청어람
  • |
  • 2017-10-18 출간
  • |
  • 616페이지
  • |
  • 145 X 202 X 31 mm /684g
  • |
  • ISBN 979110491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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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너는 화영이라는 이름으로, 꽃의 그림자로 긴 세월을 살아왔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테지.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전부 잊거라. 네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도, 짊어져야 했던 본분도.”

어찌하여 그는 이토록 뿌리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것일까.

“은애한다. 온 마음을 다해.”

행화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금이 아닌 검을 잡은 여인.
그리고 공주의 반당이 된 그녀의 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한 남자.

“폭풍우처럼 몰아쳤던 지난 세월도 훗날에는 몇 줄의 문장만으로 기록되겠지요. 하지만 간결해 보이는 글자 뒤에도 이토록 수많은 삶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랍니다.”

혼란하던 역사의 뒤안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

[편집자 서평]
역사에 등장하지만 또한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반당’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서 이 이야기는 출발한다. 드라마를 통해 익숙해진 계유정난과 경혜공주의 이야기 뒤에 어쩌면 이런 일들도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역사적 상상을 더하게 되는 흥미진진한 팩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 편집자L

그들도 이름이 남겨진 이들처럼 같이 아파하고 힘들어한 평범한 우리네 사람들 같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계유정난의 뒷이야기들. 작품의 문구처럼 ‘간결해 보이는 글자 뒤에도 이토록 수많은 삶이 잠들어 있다’ 역사 속의 숨은 민초의 이야기. / 편집자C

숨겨진 이야기,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궁금해하는 그 마음이 따뜻함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안고, 일평생 누군가의 뒤에 서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온 책 속 두 남녀의 그림자를 따라 밟아봅니다. 그리고 한발씩 내디딜 때마다 주머니 속 무거운 짐을 떨구는 겁니다. 왼발로 그림자를 밟고 오른발을 힘껏 내디디면서 의무나 상처를 흘려보내는 식으로요. 그 뒤를 가만가만 따라와 주신다면 화영과 율, 그리고 그들 뒤에 서 있었을 누군가에게까지 더할 나위 없이 기쁜 그림자밟기 놀이가 될 거예요. / 편집자Y

[책 속으로 추가]
고관대작도, 내로라하는 재산가들도 함부로 가질 수 없는 것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라고 했다. 벼슬아치들이 모여들며 부촌으로 이름이 난 양덕방 향교동에도 기와지붕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부가 부럽지 않은 와가(瓦家)를 무려 세 채나 차지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행화촌(杏花村)에 자리한 주루 영월관이었다.
본디 향기였던 관주 영월은 선상기로 뽑혀 상경했다가 우연히 면천을 하게 되었는데, 작은 주가(酒家)로 시작한 장사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다시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상단을 운용하며 도성에 유통되는 사치품의 판로는 꽉 쥐고 있으니, 과연 돈줄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고났음이라.
덕분에 이름깨나 날린다는 사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영월관으로 모여들어 은밀히 향락을 즐기곤 하였는데, 이 비밀스러운 주연(酒宴)에서 이루어진 모종의 밀담을 모아보면 수십 권의 책이 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또 어딘가에서 기록되지 못할 역사가 쓰이고 있을지 모를 깊은 밤, 시끌벅적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조용히 달을 올려다보던 영월의 눈가에 문득 뜻 모를 미소가 서렸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씨, 화영이 데려왔습니다요.”
때마침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영월은 곧 여종 뒤에 서 있는 작은 체구의 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흑칠한 삿갓을 벗은 아이가 말없이 영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내의 행색을 하고 있으나, 그에 맞지 않게 유약하고 메마른 아이의 몸은 치색의 무복(武服) 밖으로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하지만 어둠처럼 깊은 눈동자는 가냘픈 얼굴선과 달리 매섭고 단단하기만 했다.
주루에서 태어나 기생들 치맛자락 속에서 자랐다 하여 화중이라 불리던 동비(童婢), 하지만 금(琴)이 아닌 칼을 잡게 되면서 여인이라는 사실마저 마음속 깊숙한 곳에 묻어야 했던 검랑(劍娘). 그런 아이에게 화영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준 것이 바로 영월이었다.
과거를 더듬자니 새삼 연민이 깃든다.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영월은 곧 그 기색을 거두고는 화영을 향해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녀를 따라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온 화영은 무릎을 꿇어앉은 채 굳게 다문 입술을 조금도 달싹이지 않았다. 아마도 영월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알아보았느냐?”
한참 만에야 은밀한 기색을 띠며 흘러나온 영월의 물음에 화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조참판 영감이십니다.”
“……쯧, 곤란하게 되었구나.”
혀끝을 찬 영월은 이내 연지가 빈틈없이 발린 붉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근자에 형조의 단속이 삼엄해졌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으나, 이렇게 빨리 자신의 상단을 파고들 줄은 예상치 못한 터였다.
“미행이 붙어 따돌리기는 하였으나, 계속 이쪽의 움직임을 주시할 것 같습니다.”
이어진 화영의 보고에, 영월의 고운 얼굴 위로 일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심증일 뿐, 아직 증좌가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월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을 안심시키며, 마주 앉은 화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조만간 재하가 돌아올 터이니, 그때까지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다. 화영이 너는 되도록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피곤하겠구나. 이만 물러가 쉬거라.”
화영은, 가볍게 손을 휘젓는 영월에게 고개를 조아린 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그녀의 방을 나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처소로 향하지 않고 툇마루에 걸터앉은 화영의 아득한 시선이 깊은 밤하늘로 향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작은 향갑이 달린 노리개가 들려 있었다.
이제는 희미한 잔향만 남아 있을 뿐인 그 노리개를 메마른 손으로 꽉 움켜진 화영은 젖어드는 숨을 애써 목구멍 아래로 삼키며 무거운 입술을 달싹였다.
“……어머니.”
한껏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이조차 빈껍데기인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도 모를뿐더러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어머니의 유품인 이 노리개를 볼 때면, 화영은 막연하게나마 그리움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영월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화영의 어미 서련은 화영을 낳은 뒤 바로 죽었다. 서련의 지기였던 어리니가 젖을 물려준 덕분에 간신히 목숨 줄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아비라던 악공 송학수는 화영을 거두어 기를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홀로 남겨진 화영은 걸음을 뗄 무렵부터 자연스럽게 영월관을 드나드는 왈패 무리를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이를 보다 못한 영월은 화영을 영월관의 기생으로 거두고자 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아비인 학수가 영월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고 나섰다.
“계집으로 살지 말거라. 네가 계집이라는 사실을 잊어. 그게 너를 위한 길이니라.”
화영의 작은 어깨를 짓누르듯 붙잡고 다짐을 받아내는 학수의 목소리는 쉬이 흘려버릴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짙었다.
아비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린 마음에도 그에게서 간절한 무언가를 읽은 것이었을까.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이 화영으로 하여금 사내아이의 행색을 하게 한 것은 분명하리라.
그러나 정작 학수는 화영이 열셋이 되던 해에 말도 없이 행화촌을 떠나 버렸고 바로 그날, 영월은 환도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며 상단을 지키는 검객이 되라 하였다. 화영이라 불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아직 안 가고 예서 뭘 하고 있었느냐?”
때마침 들려온 영월의 목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화영은 들고 있던 노리개를 황급히 품속에 구겨 넣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씨.”
“얼른 처소로 돌아가거라.”
“예…….”
푸르스름해 보이기까지 하는 화영의 두 뺨이 달빛처럼 처연하다. 영월은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아직 연회가 한창인 객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멀어지는 영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영은 한참 만에야 무거운 발을 처소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미적거리던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밤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기운, 날카롭고 생경한 냄새, 그리고 온몸을 감싸는 짙은 위화감.
깊이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화영은 황급히 품 안의 장도(粧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미처 칼자루를 잡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차가운 손이 화영의 입을 순식간에 틀어막는 것이 아닌가.
“또 만났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분명 익숙했다. 곧 등 뒤의 침입자가 나루터에서 마주쳤던 형조참판의 수하라는 것을 눈치챈 화영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토록 완벽하게 제압당한 이상 반격은 쉽지 않을 터였다.
“안심해라, 죽이진 않을 테니.”
마치 당한 것을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듯, 그날의 화영과 똑같은 말을 내뱉은 사내는 식은땀에 젖은 그녀의 목을 바짝 당겨 안으며 한층 더 고압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나만 묻지. 관주가 따로 관리하는 출납 장부가 있을 터인데.”
“…….”
“그 장부의 위치를 알고 있느냐?”
화영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작게 실소한 사내는 화영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자못 유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기보다 제법 강단이 있구나.”
긴장한 탓에 더욱 조여들었던 숨통이 자유로워지자, 화영은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마시며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하지만 여유를 부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두 다리가 물에 녹은 듯 휘청거렸지만, 사내의 결박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재빨리 몸을 돌린 화영은 순식간에 품에서 장도를 뽑아 휘둘렀다. 그러나 손쉽게 화영의 공격을 피한 그는 이내 가느다란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더는 밀어붙일 생각이 없었다만.”
때마침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달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난 자신의 얼굴을 말없이 매만지는 사내의 입술은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도한 화영은 그만 쥐고 있던 장도를 힘없이 떨어뜨리고 말았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화영의 목을 휘어잡아 담벼락으로 밀친 사내의 검이 어느새 그녀의 턱 끝을 겨눈 채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읏…….”
점점 더 강하게 짓눌리는 목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게 된 화영은 앙다문 잇새로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사내의 손이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 차분한 목소리가 화영의 귓전에 내려앉았다.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만, 너를 놓아주면 일이 번거로워질 것 같으니 잠시 이대로 있어줘야겠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해 바르작거리던 화영은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를 붙잡기 위해 눈앞의 사내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런데 가까이 마주한 사내의 얼굴이 놀라우리만치 젊고 수려하다.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만 화영은 보기 드문 그 미안(美顔)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날렵하고 가느다란 눈매에 어둠보다 새까만 눈동자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고, 검결에 반사된 달빛이 스며든 콧날은 유난히 곧고 매끈했다.
“……왜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궁금했는데.”
붓으로 그린 듯 단정한 선을 지닌 입술이 불쑥 침묵을 깨고 달싹이자, 화영은 제풀에 놀라 작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어진 사내의 말은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넌 살기가 없구나.”
화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눈앞의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체 모를 그림자 여럿이 영월의 처소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발견한 화영은 더욱 거세게 몸을 비틀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거참,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그러나 대수롭잖다는 듯 손안의 화영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던 사내는 때마침 곁으로 다가온 복면의 침입자들에게 간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부는?”
“송구합니다만,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 숨겨둔 모양입니다.”
“……역시 그렇군.”
잠시 고민하던 사내는 이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영감께 돌아가 이 사실을 고하도록 하게.”
“그자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역시 처리하는 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먼저 출발하게. 시간이 얼마 없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화영을 의식한 듯 잠시 주저하던 침입자들은 이어지는 사내의 재촉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 그러자 가볍게 한숨을 쉰 사내가 화영을 결박하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갑작스레 뚫린 호흡 탓일까.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리던 화영은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목덜미를 부여잡으며 날카로운 기침을 수차례 뱉어냈다. 하지만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킨 그녀의 손이 향한 곳은 놀랍게도 땅에 떨어진 자신의 장도였다.
화영이 순식간에 그것을 집어 들고 다시금 달려들자, 놀란 표정으로 몸을 비튼 사내는 재빨리 들고 있던 칼집으로 그녀의 손등을 내려쳤다.
“윽!”
팔꿈치까지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에 화영이 주춤하는 사이, 사내의 검 끝이 다시금 그녀의 목덜미를 겨눴다.
“거기까지.”
무심히 중얼거린 사내는 화영의 옷깃을 잡아끌어 그녀를 일으켰다.
“내 너를 엄히 다스릴 수 있으나, 지체할 겨를이 없음에 감사하거라.”
서늘한 말투로 엄포를 놓은 사내는 쥐고 있던 화영의 옷깃을 거칠게 놓아주었다. 하지만 파르르 떨던 화영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우리 아씨는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이 없다?”
묘하게 비틀린 말꼬리에 짧은 실소를 덧붙인 사내는 가느다란 눈을 더욱 깊게 조이며 되물었다.
“나라에서 금지한 밀수를 자행하고, 그것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관리들에게 향락을 제공한 것이 잘못이 아니면 무어란 말이더냐?”
“일개 장사치들이 무슨 힘이 있어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잘못이 있다면 무리한 뇌물을 바란 탐관오리들에게 있겠지요!”
어느새 고개를 쳐들고 사내를 쏘아보는 화영의 눈동자는 불꽃이 이는 듯 뜨거웠다.
“살기 위해 행한 일에 죄를 묻는다면, 이 나라 그 누구도 죄인이 아닐 수 없을 겁니다. 아니면…….”
“…….”
“힘없는 자들에게만 벌을 주시려는 겁니까?”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화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 가쁘게 오르내리는 작은 어깨가 유독 앳돼 보이는 아이. 하지만 주먹을 그러모으며 부르짖는 말들은 그 어떤 칼보다 아프게 가슴을 찌른다.
“착각하지 말거라.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저지른 짓들이 옳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
결국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린 율은 들고 있던 검을 갈무리하며 중얼거렸다.
“하여 장부를 찾는 게다. 그 누구도 자신의 죄를 외면하지 못하도록.”
“그렇지만……!”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사내는 순식간에 담장을 뛰어넘더니 그대로 화영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서둘러 그 뒤를 쫓아 벽을 기어 올라갔지만, 이미 그의 흔적은 짙은 어둠 속에 홀연히 묻혀 버린 뒤였다.
밀려드는 허탈함에 빈 웃음을 터뜨리고 만 화영은 땀이 흥건하게 고인 손바닥을 불끈 말아 쥐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무기력한 모양으로 당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씨께 뭐라 해야 하지.”
가뜩이나 근심이 깊은 영월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잠시 후, 힘없이 담장 아래로 내려온 화영은 영월이 있는 객관을 향해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달은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양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늘 가득 번진 노을이 느티나무를 끼고 길게 늘어진 담장 위에 내려앉았다. 넓은 창으로 총천연색 만연한 풍광을 지켜보던 정 참판의 얼굴에 문득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실로 오랜만의 여유로구나.’
형조참판 정충경. 뼈대 있는 문신 가문의 후손인 그는 선왕 대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근자에는 밀수를 단속하느라 쉴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조금 야윈 듯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율은 정 참판의 부드러운 시선이 제게 향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은밀해진 정 참판의 목소리가 율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내려앉았다.
“그래, 장부는 찾았느냐?”
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흠, 그렇군.”
“며칠 더 말미를 주십시오.”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예?”
“방향을 좀 틀어보려 한다.”
당황하는 율과 달리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 정 참판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조자겸의 주변을 살펴보거라.”
“조자겸이라면, 영중추 대감의 서손 말씀이십니까?”
“그래. 대감께서 돌아가신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건만, 그 측근들이 아직 활개를 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알겠습니다.”
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상 위에 내려놓은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 참판이 망설임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운다.
“율아.”
나지막한 그 부름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 율의 시선은 웬일인지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깊게 관여하지는 말거라.”
“…….”
“밀수의 배후가 정녕 조 대감의 식솔들이라면, 전하께서는 이 일을 더는 들추지 않으실 게다.”
곧 정 참판의 말이 뜻하는 바를 눈치챈 율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화산 조말생. 그 이름이 가진 힘을 이미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태종대부터 왕의 신임을 받아온 조말생은 과거 어마어마한 양의 뇌물을 받은 일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금상은 법을 어기면서까지 그를 구명해 주었고, 종국에는 영중추원사 자리까지 내어줌으로써 변치 않은 어심을 보여주었다.
만약 정 참판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금상은 스스로 시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덮고자 할지도 모른다. 정 참판은 바로 그 점을 염려한 것이리라.
“하오나…….”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율은 이내 망설였다.
“힘없는 자들에게만 벌을 주시려는 겁니까?”
간밤의 일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흔드는 통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거듭하던 율은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알고 묻어두는 것과 모르는 채 사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
“모르는 채 사느니, 알고 묻어두는 쪽을 택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훗날이라도 이를 바로잡을 순간이 오지 않겠습니까?”
한결 또렷해진 그의 목소리에서 굳은 결의를 느낀 정 참판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한 번 뜻을 품으면 굽힐 줄 모르는 율의 성품을 모르지는 않았기에, 기실 예상했던 바였다.
“네 뜻은 알겠다만, 부디 몸조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율은 이윽고 조용히 정 참판의 처소를 나섰다. 어느새 노을이 기운 하늘은 어둑어둑했다.
“율아.”
참으로 오랜만에 불려본 듯하다. 차분했던 정 참판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곱씹던 율은 새삼 먹먹해지는 가슴을 괜스레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도련님, 어디로 가실 겁니까?”
때마침 다가온 종복이 묻는 말에, 댓돌 위 갖신을 발에 꿴 율은 곧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들어가서 쉬시게. 오늘 밤은 처소에 들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요.”
으레 있는 일인지라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조아린 종복은 소매 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바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비로소 홀로 남게 된 율은 잠시 주위를 살피는가 싶더니 재빨리 몸을 날려 담장을 뛰어넘었다.
월담은 율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이 집에 들어온 후 십여 년이란 세월이 흐를 동안 그가 대문을 드나드는 일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그 연유는 아마도 가슴속에 품은 정 참판과의 오래된 비밀 때문이리라.
정 참판과의 비밀.
문득 고요하던 율의 입술이 비스듬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단 한 순간도 떨쳐 내지 못했던 진실이자 족쇄, 그것은 자신이 정 참판의 숨겨진 얼자(孼子)라는 사실이었다.
서자도 아닌 얼자, 천첩의 자식이라는 굴레는 제아무리 대단한 아비를 두었다 할지라도 노비 신분을 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여 정 참판은 형편이 곤궁한 지방 유지에게서 족보를 사들여 율을 죽은 벗의 자식이라 꾸미고 자신의 양자로 들인 것이다.
생모가 병으로 일찍 죽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얼자가 그러하듯 율 또한 제 아비를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길 수 없는 현실 또한 율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 내린 비가 만든 길가의 물웅덩이에 눈처럼 새하얀 달이 떠오른다. 달빛을 머금은 수면 위에 동그랗게 비친 제 얼굴을 무심코 바라보던 율은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뱉어냈다.
“제 어미를 참 많이 닮았어.”
난처럼 곧고 가느다란 눈매, 단정한 선을 그리는 입술. 어미를 닮았다는 이 얼굴을, 정 참판은 어떤 마음으로 마주 보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구긴 율은 부러 수면 위 제 얼굴을 발끝으로 힘주어 밟아버렸다.
모르는 채 사느니, 알면서도 묻어두는 것이 낫다. 그러나 때로는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은 일도 있는 법이다.
반짝이는 수면 위에는 여전히 얇은 파동이 남아 있었다. 율은 곧 무거운 시선을 어둠 속으로 돌렸다. 파루까지 남은 시각은 대략 두 시진. 순라군의 눈을 피해 도성 밖까지 나가려면 꽤 먼 길을 달려야 할 터였다.

목차

1. 영월상단
2. 찬달
3. 반아(伴兒)
4. 전조(前兆)
5. 불안의 씨앗
6. 어긋나는 마음
7. 탄야(歎夜)
8. 차마 하지 못한 말
9. 피할 수 없는 길
10. 불씨
11. 월하정인(月下情人)
12. 끝나지 않은 비극
13. 정해진 인연
14. 마지막 또한 너이기를
15. 최후의 결전
外. 못다 한 이야기
작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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