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필자는 예배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며 가장 성취감을 주는 행위라 믿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 경험 안에서 참된 인간이 되는데, 그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교는 영원히 인간 창조의 목적(엡 1:4-6)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높은 목표와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리고 그를 영원히 기뻐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송영적인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 p. 25.
참된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예배자는 자신이 감히 앞에 서게 되는 유일하신 그 분이 가지는 실재의 무한한 무게를 알고 있어야 한다. 존재론 논쟁에 나오는 안셀름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천이며 창조자이시다.
참으로 밀도 있고, 강렬하며, 심오한 실재로서 하나님이 갖는 무게감은 하나님의 자존성으로 불리며 오래전부터 기독교 신학에 있었던 표현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고 하나님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하며, 영원하고, 그 자신 이외에 누구도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한 신적 실재라는 개념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들린 오래된 신비한 말 가운데 나타나 있다. p. 82.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가 임재하신다는 “홀로그램” 혹은 “아바타”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하늘에서 그리고 이 땅의 예배하는 교회 안에서 그 백성들에게 동시에 함께 계신다. 그는 믿음이 없는 눈으로는 안 보이시지만, 우리는 그를 “믿음의 야간 투시 안경”을 통해 실재로 보게 된다.
이사야는 쉐키나 영광의 구름이, 광야에서 백성들이 멀리서만 볼 수 있었던 모든 시온산과 모든 남아있는 백성들을 덮게 될 때를 미리 보고 있다. 그 비전은 오순절 날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금 예배에서 참된 하늘의 시온으로 오는(“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영광 아래 거하는 특권을 지닌다.
사도행전 2장 그리고 영광의 성령의 강림은 교회의 역사에서 보통 일회적 사건으로 보인다. 사실 오순절은 쉐키나의 영광이신 성령께서 교회를 버리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계속되는 실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성령을 보내어 그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있도록 할 것을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했다(요 14:16).
심지어 현재 순간에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그리스도는, 여전히 살아계시고 그리고 정말로 존재하시는 우주의 주인으로서, 모든 하나님의 충만으로 끊임없이 교회를 채우시면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다(엡 1:22-23). 하나님의 말씀-언약은 본질적인 실재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것을 그렇게 되게 만들고 그리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이 쉐키나의 영광을 육체적인 눈으로는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신약 예배와 교회의 삶에서는 영적이고 존재론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은 예배 동안 그 곳에 참으로 계신 영광을 보기 원하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의 자녀들의 영적 눈을 열어 줄 수 있다. 하나님이 신적 임재를 나타내기 위해서 선택하는 시간과 방법에서, 하나님이 언제나 주권자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나타내심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것들을 결코 제어할 수 없다. p. 289-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