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항상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는 항상 나 안에서만 인식되고 실존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반성하는 지적인 종(種)으로서 자율적인 속성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그 어떠한 문화적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종속된, 일상의 정황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이란 그 존재의식, 즉 삶의 가치나 의미를 추구하는 데 있어 텍스트에 종속된 자아의식, 그리고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자율적 본능과 끊임없이 씨름해야 하는 해석학적인 존재인 것이다. (13쪽)
구약텍스트는 이미 잘 알려진 신학적 플롯과 표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구약윤리는 바로 그 신학적 의미를 삶의 정황에서 구현하는 담론이다. 문제는 과연 그 텍스트의 의미가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그 의미는 발견되는 것인가 아니면 창출되는 것인가? 텍스트 안에 내재된 것인가 아니면 독자로부터 투입된 것인가? (123쪽)
해 아래 타락한 이 땅에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있을 수도 있고 상황윤리적인 폭력이 있을 수도 있다. 구약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한 서술이 규범적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와 사랑을 손상시킬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이다(신 6:5; 레 19:18). 이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이기 때문이다. (265쪽)
구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긍휼과 자비와 은혜의 구현은 구체적인 예로써 룻의 아름다운 이야기에서 반영된다. 홀로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과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았던 이방 며느리 룻의 따뜻한 마음; 남편을 잃고 생존을 위해 추수 때 떨어진 이삭을 줍던 룻을 긍휼히 여겨 자비를 베풀었던 보아스의 의로운 행위; 이들의 헤세드 이야기는 공의와 은혜와 사랑으로 룻과 같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헤세드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반영한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의 삶이 진실로 은혜롭고 참되기 위해, 우리는 교회 내에서의 전례와 봉사활동으로 마무리되는 형식을 깨고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사회적 정의와 자비로 확장시켜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는 따뜻한 횡적 행위로 구현해야 할 것이다. (3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