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NHK 방송사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화제의 프로그램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난다. 미국 콜로라도 대학,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지낸 저자 후지와라가 9명의 천재 수학자에 관한 흥미로운 뒷담화를 풀어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수학자의 선구자들이 나고 자란 곳, 학문적 발자취를 좇으며 그들의 삶과 업적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이 기행은 위대한 학자들에 대한 존경심과 더불어 인간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은밀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출간 당시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구며 일본 아마존 사이트 판매순위 1위를 기록한 천재수학자들의 숨은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천재수학자들의 영광과 좌절]은 이렇게 말한다
* 그들은 그때 그곳에서 반드시 태어나야 했다
후지와라는 천재 수학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때, 그곳에서 그들이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절감했다. 지역적인 특색, 역사적 상황, 주변 환경, 민족, 문화, 풍속 등 모든 것이 맞물린 그곳에서 천재 수학자들은 태어났고 자랐다. 모든 우연이 만나 빚어낸 필연이 경이로운 결과를 낳은 셈이다. 천재는 단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스승과의 만남, 선배 수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업적 등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천재성도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뉴턴이 배로 교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소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더라면? 타니야마 시무라의 추론이 없었다면 앤드루가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해낼 수 있었을까? 이러한 모든 상황들은 그들의 천재성 안에서 빛을 발했다. 그들의 천재성이 단순한 행운이 아닌 것처럼, 그들을 둘러싼 배경도 분명 우연은 아닐 것이다.
* 천재적 재능의 봉우리가 높을수록 좌절의 골짜기 또한 깊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업적'이라는 외투를 걸치고 있지만 그들의 인생에도 눈물과 좌절이 있었다. 천재적 재능의 봉우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골짜기 또한 깊었다. 파리의 혼돈 속에서 목숨을 잃은 불행한 천재 갈루아, 사랑을 갈구했지만 어떠한 사랑도 완성하지 못한 여인 코발레프스카야, 석판과 분필 하나로 세기의 수학적 정리를 증명해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 라마누잔, 2차 세계대전 당시 비밀 조직에서 나치의 암호를 해독해내고도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채 우울한 동성애자로 살다간 튜링 등, 학문적 성취의 대치점에 놓인 그들의 기구한 삶이 너무나도 첨예한 대조를 보인다. 영광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 밑바닥은 깊은 고독과 좌절로 가득했다. 천재는 이같은 양극단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체험한 사람들이다.
* 어떤 천재도 신과 같을 수는 없다
천재들의 인생 궤적을 좇던 후지와라는 '더 이상 천재를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천재란 혼자만의 힘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뼈를 깎는 창조의 괴로움과 고통을 참고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가끔 운이 따르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은 시련과 격랑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도 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천당과 지옥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후지와라는 천재수학자들에게 시기와 부러움, 경탄 대신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천재의 빛나는 업적만을 칭송하거나 보통사람과 다른, 특이하고 특별한 특징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학문을 넘어서 인간적인 면모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업적에 가려진,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에 주목한다. 후지와라의 이런 시선은 독자들로 하여금 천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천재수학자들의 영광과 좌절]을 읽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
- 숨은 재미 찾기
이 책은 아홉 명의 수학천재들을 재조명하면서 각 장마다 '쉬어가는 페이지'를 두어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일화들을 소개한다. 또한 현재 독자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에 대해 간접적인 해답도 제시한다. 무엇보다 천재들이 살았던 당시의 사회상, 풍속, 트렌드 등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 뉴턴이 결혼하지 않은 진짜 이유
뉴턴이 평생 독신으로 지낸 이유에 대해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짝사랑한 하숙집 딸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어머니에 대한 애착으로 성적 불구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가정을 꾸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거나 연구에 너무 바빴다거나 동성애자였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분명한 증거가 없는, 설득력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후지와라는 사실에 근거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당시 뉴턴이 몸담고 있었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펠로우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학 측은 요즘도 '기혼자는 대학 내에서 거주할 수 없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펠로우들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거나 아니면 늦게 결혼한다. 뉴턴이 결혼하지 않은 진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근거가 되지 않겠는가.
* 노벨상에 수학 부문이 없는 이유
후지와라가 9월의 어느 맑은 날 미타크 레플러 수학연구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연구소장 빈드만 박사의 안내로 여기저기 둘러보던 중에 거실에서 소냐 코발레프스카야의 흉상 석고상을 보게 되었다. 소냐의 흉상은 젊을 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무척 아름다웠다. 빈드만 박사는 자랑스러운 듯 이렇게 말한다. "노벨도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어했지요." 이 대목에서 후지와라는 노벨과 미타크 레플러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혹자는 노벨상에 수학 부문이 없는 이유를 노벨과 미타크 레플러의 불화에서 찾는다. 후지와라는 소냐의 흉상을 감상하며 생각한다. 혹시 소냐를 둘러싼 모종의 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 위장 결혼식을 올려야 했던 소냐의 속사정
소냐는 18세 때 백러시아 귀족 출신의 코발레프스키와 결혼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 그러나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결혼식에 불과했다. 당시 러시아의 젊은 인텔리 여성들 사이에서는 제정 말기의 폐쇄적인 러시아를 탈출해 외국 대학에 유학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들의 여정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위장결혼이었다. 불타는 학구열을 이해하는 남성과 위장결혼을 한 후에야 그녀들은 자유롭게 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나란히 출국하여 신부를 대학에 남겨두고 신랑 혼자 귀국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위장결혼은 사회적인 압제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여성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용인되었다. 실제로 수백 명의 상류층 처녀들이 위장결혼을 했다고 한다.
☞ 저자 소개
지은이 후지와라 마사히코
1943년에 태어나 수학자이자 수필가로 활약 중이다. 현재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이학부 교수이며 미국 콜로라도 대학,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젊은 수학자의 아메리카}, {머나먼 케임브리지}를 저술하였으며, 이밖에도 {마음은 고독한 수학자}(한국어판 발행 예정), {수학자의 휴식시간}, {아버지의 위엄, 수학자의 의지}, {고풍스럽고 당당한 수학자} 등의 저서가 있다. 수학자의 이론적 시점과 문화를 깊이 사랑하는 정서적 시선이 담긴 글로 정평을 얻고 있다.
옮긴이 이면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동 대학 대학원 과학교육과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춘천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조교수로 있다. 한국과학사학회, 한국지구과학회, 한국과학교육학회, 한국초등과학교육학회, 한국영재학회 등의 회원이며, 한국출판인회의 '이달의 책' 자연과학 분야 선정위원, 한국과학문화재단 우수과학도서 심사위원 등 과학도서 출판 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천재 과학자들의 바보 이야기}, {상대성의 세계}, {지구 이야기}가 있고, 역서로 {천재 과학자들의 숨겨진 이야기},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고대 하이테크 100}, {중국의 과학과 문명: 수학, 하늘과 땅의 과학, 물리학}, {청소년이 꼭 알아야 할 과학문명의 역사 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