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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사르트르와 카뮈

  • 로널드 애런슨
  • |
  • 연암서가
  • |
  • 2011-07-25 출간
  • |
  • 546페이지
  • |
  • 153 X 224 X 35 mm /786g
  • |
  • ISBN 978899405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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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20세기 지성계의 두 거인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사

사르트르와 카뮈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만났다. 그 이후 그들 사이에는 돈독한 우정과 협력 관계가 정립되었고, 그 관계는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출간되던 해인 1951년까지 계속되었다. 카뮈는 이 책에서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개념을 거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반면 사르트르는 『현대』 지를 통해 카뮈를 “현실적 갈등과 동떨어져 있는 지식인”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해 카뮈는 사르트르를 포함해 “역사의 방향으로 의자를 놓지 못한 자들”을 재차 비난했다. 그 이후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는 단절로 치달았으며,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서로 얼굴을 보지 않게 된다.
로널드 애런슨은 이 책에서 20세기를 살았던 두 거인의 복잡했던 관계, 즉 ‘자유’의 문제와 ‘악’ 앞에서의 ‘책임’ 문제에 대해 일치했던 두 사람의 견해가 냉전과 더불어 확연히 갈라지는 전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고 있다. 로널드 애런슨은 특히 지배계급에 대한 사르트르의 투쟁과 기독교적 휴머니즘 쪽으로 경사된 카뮈 사이의 극복 불가능한 거리를 보여 주고 있다.

[추천사]
“카뮈와 사르트르라는 두 프랑스 지성의 격렬한 이념 논쟁과 그들이 서로에게 퍼부은 번뜩이는 말의 공방전보다 더 멋있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흥미진진한 이 책은 20세기 문화와 역사의 흔적이자 전환점이다.” -스콧 맥레미, 『뉴스데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르트르 전문가인 R. 애런슨은 신중하고도 공정하게 카뮈와 사르트르 사이에서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이 책은 생생하고 읽기 쉬운 문체로 된 최고 수준의 논쟁사이다.” -데이비드 드레이크, 『타임』

“R. 애런슨은 특유의 예리함으로 사르트르와 카뮈 사이의 경쟁을 그들의 정치, 사회적 배경과 전기적 일화, 그리고 전후 프랑스 인텔리겐치아의 삶을 통해 추적하고 있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R. 애런슨은 『사르트르와 카뮈』에서 그들의 우정, 그들 상호간의 영향과 증오, 그리고 20세기를 특징짓는 수많은 주제들의 흔적을 그리고 있다.” -에드워드 로스스타인, 『뉴욕 타임스』

<책속으로 추가>
그렇다면 카뮈와 사르트르의 결렬은 처음부터 내재되었던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할까? 두 사람이 후일 자신들의 우정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간에, 그들이 자신들의 결렬을 처음부터 각자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 버린 것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사르트르는 오랜 동안 이 같은 운명주의를 ‘자기기만’으로 규정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의 저서들과 삶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관계의 역사를 모든 면에서 개방된 것으로, 즉 그들 각자가 살아가면서 만들어 나갔던 것으로 여기면서 새로운 시각에서 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관계를 진정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관계에 예견불가능성, 선택, 자유, 그리고 비합리성이라는 방향 속에서 접근해야만 할 것이다. -23쪽

카뮈와 사르트르 사이에서 우정이 그처럼 아주 쉽게 맺어졌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들이 카페 등지에서 맺을 수 있는 관계보다 훨씬 더 친근한 관계를 이미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욕심 많은 독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생각과 스타일에 구체적 형태를 부여하기 위한 일에 푹 빠져 있던 그들 두 명의 젊은 작가들은, 서로 만나기 전에 이미 각자가 쓴 작품들을 읽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 작품들에 대해 여전히 가장 흥미롭고, 가장 열정적인 주해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들 각자가 젊었던 시절에 펴낸 텍스트들에 대한 그들 서로의 비판적 독서 속에서이다. 비록 보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초창기 서평들에는 그들 관계의 토대가 되는 문학적, 철학적 유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서평들을 통해 독자들은 또한 향후 20년간 지속될 그들의 우정에서 가장 중요한 매듭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의 핵심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종종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종종 모호한 방식으로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첫 만남 이후부터 그들이 교환하게 될 마지막 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밀도 있는 그들의 의견 교환을 발견하게 될 것도 바로 그들의 글 속에서이다. -31쪽

초창기에 서로에게 보여 주었던 찬사는 두 작가의 관점과 기획의 유사성으로부터 기인했다. 그들은 교육과 프랑스 문화의 서로 다른 분야에서 서로를 인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 각자는 즉각적으로 상대방의 철학적, 문학적 재능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자신들이 가까운지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들의 소설은 실존의 부조리함을 공통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관습적이지 않은 줄거리와 겉보기에는 동기가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등장인물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들 서로는 솔직한 태도로, 통찰력 있는 태도로 이러한 부조리에 맞섰으며, 대부분의 존재들(철학자들을 포함해)이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소명이 갖는 특수성을 잘 의식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 둘 모두는 실존의 진정성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45쪽

1963년에 출간된 보부아르의 회상록은 1980년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난 후에 간행된 사르트르-보부아르 사이의 대담과 마찬가지로, 아주 정성을 다해 구축된 것이다. 보부아르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삶을 살아가는 한 지방 출신자와의 아주 유쾌하지만, 또한 아주 피상적인 우정을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이미지는, 그녀가 기억을 통해 카뮈에 대해서 하고 있는 수많은 지적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오랜 친구의 의견들과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면에서 변화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아주 가벼운 태도로 취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 속에서도 카뮈는 소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완벽했던 것이다. -49쪽

카뮈와 사르트르가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 보부아르는 말년에 자기가 이전에 했던 선언들을 문제시하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녀는 1943년 이후부터 유명해진 두 젊은 작가를 비교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보다 한참이 지나서는 그녀 자신도 카뮈에게서 사르트르의 문학적 라이벌의 모습을 보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카뮈라는 존재의 명성은, 그녀가 사랑했던 그 작고 흉한 천재를 압도할까 두려워했던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두 남자가 만난 이후, 그녀는 사르트르를 위해 마치 카뮈와 경쟁하듯 글을 쓰게 된다. 노년에 접어들어 그녀는 카뮈와의 첫 만남 이후 사르트르가 그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던 그 강렬함으로 인해 불안감을 느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부를 때 사용할 법한 말들로 카뮈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던 것이다. 보부아르가 알고 있었던 대로 사르트르가 “가장 이성애적인 남자”였던 만큼, 그녀는 더욱 더 카뮈에 대한 그의 “심취”가 당황스럽고 불안했던 것이다. -52쪽

카뮈보다 훨씬 더 비중 있는 사회적 지위와 사교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사르트르는 그들의 만남 이전부터 전도가 양양한 지식인이었다. 그가 카뮈의 초기 저작들에 대해 했던 해설은 카뮈의 여정에서 중요한 단계를 보여 준다. 글쓰기와 사유의 왕국에서 사르트르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으며,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문학과 예술의 도시인 파리에서 자유자재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개인적 영역에서 끝이 없는 신뢰를 보여 주고 있었다. 비록 그가 카뮈에 대해 썼던 글들이 어느 정도까지 그가 문학 분야에서 대문호들의 이름과 같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가를 보여 주었다고 해도, 그가 보기에 카뮈는 프랑스의 대사상가들이 묻혀 있는 팡테옹 광장보다 더 큰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이 만났던 시기는 전쟁, 독일 점령, 레지스탕스의 시기였다. 사르트르는 그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세계에 닻을 내리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1930년대에 그는 보부아르와 함께 비정치적 태도로 일관했었고, 인민전선Front populaire에 앞선 1935년 7월 대규모 시위를 길가의 벤치에서 지켜볼 따름이었다. -56쪽

카뮈가 정치 분야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를 쳤다면, 반대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정치 분야는 완전히 생소한 세계였다. 전쟁 동안에 사르트르가 보여 주었던 활동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또한 그렇게 해서 점령 시기에 카뮈에 대한 그의 시선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1939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시기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주요 문제들에 대해 거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받았던 철학 교육에 내재된 이상주의를 벗어던진 후에, 그리고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던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 후에 사르트르는, 비로소 그 자신의 지성적 위치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 무렵 사물 자체에 대한 이해에 빠져 있던 미래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그 젊은이를 매혹시키는 하나의 현대적인 사유 학파가 있었다. 현상학이 그것이었다. 현상학의 기본 원칙은 개인의 의식에서 출발하기는 하나 “사물 그 자체”에 이르는 것이다. 독일에서 수입된 이 철학은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엄격했고, 또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데카르트 철학의 주위를 맴돌았던 이 젊은 철학자는 현상학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르트르는 1933년 봄에 현상학을 발견하게 된다. -68쪽

카뮈가 점차 폭력에 의해 야기되는 인적 피해와 거기에 따른 정신 면에서의 부정적 결과를 우려했던 반면, 사르트르는 우선 모든 다른 해결책이 봉쇄된 상태에서 특히 억압의 희생자들이 선택한 폭력을 통해 나타나는 정치적, 심리적인 면에서의 긍정적 효과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폭력은 두 작가의 정치적 사유에서 중심이 되는 문제가 되기에 충분했으며, 사르트르의 폭력에 대한 잠재적인 동의는 카뮈의 혐오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놓이게 되었다.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에서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이었던 카뮈가 ‘깨끗한 손’으로 전쟁을 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굳게 결심했던 반면, 부르주아지의 아들이었던 사르트르는 정반대로 ‘더러운 손’을 갖는 것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81쪽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의 잠재적 부상이 예견되는 분위기에서 카뮈와 사르트르는 전쟁 직후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지식인들이 되었다. 사람들은 위험에 맞서 참여의 의무를 강하게 주장하는 자들의 작품뿐 아니라 말에서도 영웅주의의 아우라를 볼 수 있었다. 3년 동안 카뮈는 간헐적으로 공산 진영에 속하지 않는 좌파 진영의 주요 일간지의 편집장과 논설 주간의 임무를 맡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의식적으로 레지스탕스 운동의 도덕적 정신과 급격한 변화에 대한 요구를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드디어 ‘참여’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는 한 잡지를 창간하면서, 그리고 참여라는 주제와 관련된 일련의 기사들, 저서들, 극작품들 등을 쓰면서, 그 주제를 전후의 주요 쟁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된다. 프랑스의 해방과 1945년 말 사이에, 카뮈와 사르트르 두 사람은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져 모든 독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들은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자, 문학비평가, 소설가, 단편작가, 극작가와 마찬가지로 에세이스트의 자격으로서도 자신들의 사상을 표현하게 된다. -101쪽

카뮈와 사르트르 두 사람은 타고난 평등주의자였다. 그 자신 노동자의 아들이었던 카뮈는, 타인들, 특히 알제에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자들을 밟고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자신의 성공을 결코 이용하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계급들 사이의 차이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사르트르는 그에게 부르주아들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을 안겨준 특권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소박했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공동 운명을 지닌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들뿐 아니라 자신들의 직능에서 그러한 차별을 보증해 주는 제도들에 대해 마음속 깊은 증오를 보여 주고 있다.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카뮈 역시 자신이 용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 체제는 모든 사람들이 상호적 존중에 의해 연결되는 그런 사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바로 사회주의를 위해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이 내세웠던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가치들은 민주주의적, 개인주의적, 반독재적 비타협주의에 속하는 것이었다. 서로 상당히 다른 세계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복지를 사회 변화의 초석으로 여겼다. 그들 두 사람은 공산주의자들과 기존의 좌파 정당들 사이에 위치하는 독립적이기는 하지만 영향력 있는 하나의 정치적 극極이 되기를 바랐다. -103쪽

보부아르에 따르면, 카뮈가 유명해진 시기에 사르트르의 의견들은 더욱 단정적으로 변했으며, 말은 더욱 단호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카뮈가 사르트르-보부아르의 커플에게 까다로운 모습을 보인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뮈는 그들 커플이 주위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같은 스타일에 따를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사르트르가 그의 정신상의 독립성에 대해 존경심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카뮈 역시 자신이 사르트르의 위성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이 프랑스와 파리의 문학 무대를 휩쓸 당시에 그들의 한데 어울림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카뮈는 사르트르와 반대되는 입장을 보여 주어야만 하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구별의 필요성은 사르트르가 카뮈를 모델로 여기면서 그의 존재 양태를 자신의 고유한 철학에 통합시켜 버렸던 만큼 더욱 더 긴요한 것이 되었다. -116쪽

사르트르가 정치화되어 가는 것과 비례해, 카뮈 역시 그 자신의 정치적 변화를 사르트르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가속화시키게 된다. 하지만 종종 그들 각자는 점차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같은 변화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사람이 그 당시의 지배적인 현실, 우리가 지금까지 등한시했던 현실, 즉 공산주의, 그러니까 소련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PCF와 맺었던 관계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그들 각자가 공산주의에 대해 취했던 태도는 벌써 그들 각자의 정치적 변화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즉 전쟁 직후 사르트르와 카뮈의 정치적이며 지적인 모든 노력은 비非공산주의적 좌파의 강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거부는 부분적으로는 PCF의 정책에 대한 거부와 일치한다. 그들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PCF의 영향은 점차 더 크게 느껴지게 된다. 공산주의는 카뮈의 적이 되지만,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정치적 지평으로 소용된다. -143쪽

카뮈가 공산주의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확히 논쟁에 대한 그의 거부에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카뮈는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모든 사람들을 혐오감을 갖고서 대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제대로 읽지 않았던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살인과 동일시하게 된다. 자기만의 고유한 이분법적 냉전 속에서 카뮈는 자기 편에 서지 않은 자들을 규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단순히 그들의 실수뿐 아니라 그들의 정직하지 않음도 비난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들’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친구인 타르와 같은 살인자들일 뿐이었던 것이다. -198쪽

카뮈는 1951년 11월에 공산주의에 대해 폭탄을 투하했다. 1952년 7월, 사르트르는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평생의 증오를 천명하고 공산주의에 더 한층 가까워진다. 카뮈의 저서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목표는 이미 표명된 그 자신의 확신, 즉 공산주의는 폭력의 사용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변함없는 확신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반면, 이 같은 폭력의 사용이 정당하기도 하며, 필요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의도였다. 냉전 시대를 훨씬 지난 오늘날, 이 두 철학자의 저서를 읽어보면, 그들 각자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우리를 이끄는 것 같은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옳았던가? 물론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누가 어느 진영에 속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친공산 좌파 지식인들은 대부분 『반항적 인간』에 반대했다. 반면, 활동은 더 적게 하면서 제한된 효과만을 내고 있던 일군의 좌파 지식인들은 이 저서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 우파 쪽에서는 이 저서를 환호해 마지않았다. 카뮈의 사고방식을 일거에 일축해 버린 아롱과 같은 몇몇 우파 지식인들은 예외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 당시 미국과 영국의 언론에서 『반항적 인간』을 출간하면서 카뮈가 보여 주었던 용기와 그의 세계관을 옹호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못 된다. -249쪽

상황과 참여에 대해 사르트르가 표명한 사유들로 인해, 카뮈는 그 자신의 대안을 정의하는 작업을 진행시키게 되었고, 또한 이 대안을 아주 강한 태도로 표명하게 되었다. 카뮈가 비폭력 반공산주의에 대한 생각을 강한 태도로 표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그 영향으로 폭력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새로이 정치에 참여하고, 그것도 극단적인 입장을 옹호하게 된 사르트르가 “유토피아주의”와 “완강한 개혁주의”라는 카뮈의 사회사상을 맹렬히 반박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사르트르 자신이 복잡한 정치적 현실에 참여하면서 폭력과 혁명의 선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정치노선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271쪽

요컨대 사르트르가 마르크스주의와 합류한 방식을, 카뮈는 자유를 위한 참여가 아니라 복종을 위한 열망으로 해석한 것이다. 카뮈가 보기에 실존주의, 특히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그 출발점은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과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을 모든 족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은, 그들을 역사적 필연성 속에 가두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태의 진상은, 결국 당신의 협력자가 공산당과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한 모든 것에 맞서 반항을 하기를 원했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결론을 내리면서 카뮈는 장송의 비판이 이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309쪽

사르트르는 머릿속에서 카뮈의 존재를 완전히 삭제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와의 불화가 있었던 몇 개월 동안, 심지어는 몇 년 동안, 그는 옛 친구에 대해 일언반구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일기나 편지 속에서도, 또한 보부아르나 그의 친구들이 전하는 대화 속에서도 카뮈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가 없다. 1960년 1월에 카뮈가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 그는 잃어버린 친구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뮈에게 쓴 편지나 후일의 행동을 통해서 보면, 그가 그를 완전히 추방한 것처럼─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는 그런 적처럼─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감동적인 찬사의 글을 통해 카뮈에 대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진실을 바로잡고 있다. 카뮈는 항상 사르트르가 그에게 인정했던 지적이고 도덕적인 힘을 결코 잃지 않았던 것이다. -345쪽

공산주의자에 대한 카뮈의 증오는 분명 정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같은 증오가 폭력에 대한 그의 반대에서 자양분을 흡수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많은 반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카뮈는, 고국 알제리에 대해 직접 말하는 것을 회피하면서 그 자신이 가졌던 도덕과 정치의 일관성을 배반했던 것이다. 소련의 야심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던졌을 때, 그는 모든 상황에 대한 분석을 다 마친 것처럼 보였다. 다만 식민지주의를 끝장내는 데 필요한 근본적 변화만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의 동국인들이 단순히 그와 동일한 시민, 그렇다, 식민지 시대 이후 알제리에서 소수집단이 되면서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말할 수 없었던 카뮈는 어쩔 수 없이 침묵 속에 갇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62쪽

카뮈와 사르트르 각자는 상호적 토론 속에서 자신들을 형성해 나갔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에게서 인정하게 될 완벽한 정치적 지식인들로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 세대의 선택을 규정하는 ‘맞수’였던 것이다. 그들 각자의 재능은 너무 컸으며, 시대 속으로의 잠수는 너무 깊었으며, 정치적 참여는 너무나 강했고, 그들 각자의 관점을 명확하게 하길 원하는 욕구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맺은 우정의 종말은 이 같은 과정의 불가피한 부산물이었으며, 따라서 그 종말은 그들을 분열시켰던 문제들 속에 이미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카뮈와 사르트르의 결렬은, 오늘날까지도 꽤 많은 사람들의 주장, 즉 삶에 대한 그들의 완전히 반대되는 접근 방식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주장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혁명과 개혁,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폭력과 비폭력, 철학자의 태도와 예술가의 태도, 혁명가와 반역자 사이의 대립 등이다. 그들 두 사람이 가졌던 인간적, 역사적, 전략적 차이점들을 존재론적 원칙들로 바꾸는 것은, 그들의 갈등의 이유들과 이 갈등에서 연유한 명령어들을 혼동하는 일일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선택의 차이는, 냉전, 역사와 프랑스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 그것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들 각자가 선택했던 출발점과 노선들, 곧 그들의 대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487쪽

카뮈와 사르트르 사이의 갈등을 일으켰고 부추겼던 가장 심층적인 문제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인류의 상당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을 계속하고 있거나, 불평등한 권력과 부의 분배로 인해 짓눌려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남북문제의 불균형 문제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테러는 경제의 세계화와 보조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폭력과 전쟁은 중요한 시사문제임에 틀림없다. 핵 테러의 위험도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복잡하게 꼬여 있으며, 인류가 서로 멱살을 잡고 드잡이를 하는 동안에도, 카뮈와 사르트르는 계속 지금도 유용한 요소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488쪽

우리는 항상 진리를 말하는 지식인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지식인은 어느 곳에서나 억압에 맞설 수 있을 것이며, 통일된 도덕적 규범들 속에서 그들 두 사람의 능력과 세계관을 통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식인은 그 자신의 빛을 통해 오늘날의 체계적 폭력의 문제를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식인은 그런 폭력에 맞서는 효과적인 투쟁을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낸 자들의 도전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지식인은 새로운 악을 만들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489쪽

목차

옮긴이의 말
프롤로그

제1장 첫 만남
제2장 점령, 레지스탕스, 해방
제3장 전후의 참여
제4장 카뮈의 급선회
제5장 사르트르의 급선회
제6장 폭력과 공산주의
제7장 폭발
제8장 사태를 잘 정리하기, 참다운 행동을 하기
제9장 각자의 목소리를 되찾다
제10장 비공개 재판
에필로그
후기


찾아보기

저자소개

저자 로널드 애런슨Ronald Aronson
미국 웨인 주립대학교 교수이자 미주 대륙의 사르트르 전문가로, 사르트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사르트르의 저서인 『진리와 실존』의 출간을 감수하기도 했다. 사르트르의 후기 사상을 집대성하고 있는 『변증법적 이성비판』 2권에 대한 유일한 해설의 저자이기도 하며, 사르트르와 베니 레비의 대담집인 『지금이 희망이다』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역자 변광배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같은 대학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몽펠리에 3대학(폴 발레리 대학)에서 사르트르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존재와 무-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장 폴 사르트르-시선과 타자』 『제2의 성-여성학 백과사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사르트르 평전』 『레비나스 평전』 『마르셀 뒤샹』 『변증법적 이성비판』 등 다수의 역서가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대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같은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프랑스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를 이끌고 있다.

역자 김용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같은 대학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번역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가르치며, 프랑스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강대국, 중국』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철학의 타자』 『잘난 척하는 철학자를 구워삶는 29가지 방법』 『값싼 석유의 종말, 그리고 우리의 미래』 『그리스도 철학자』 『수사학 3-아리스토텔레스』 『알파벳의 신비』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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