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슴들이 찾아가고자 하는 존재의 심연
《채식주의자》로 2016년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발표한 직후부터 집필을 시작해 3년 만에 완성한 이 작품은 서사적 견고함과 염결한 작가정신이 어우러진 탁월한 작품이다. 한낮 도심의 횡단보도에서 느닷없이 훌훌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달음박질을 한 후 기억상실증까지 걸려 사라져버린 한 여자(임의선)과 강원도 오지를 헤매며 그녀를 찾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강원도 오지인 연골에서 광부의 딸로 태어난 의선에게는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은행계좌도 없다. 여기에 기억상실증까지 걸려 있다.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여자. 백지, 백치 같은 여자, 식물 같은 여자다. 제약회사 사환으로 일하던 의선이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자, 의선을 알고 있던 두 인물이 의선의 행적을 찾기 위해 강원도 탄광도시로 떠난다.
잡지사 기자인 김인영은 같은 건물에 있는 제약회사 사환이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갑자기 옷을 벗어던지고 대학로를 달리는 광경을 목격하고,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찾아온 그녀와 함께 산다. 김인영의 대학 후배인 명윤은 글을 쓰다가 중단하고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가, 의선과 만난다. 이후 의선은 명윤과 동거한다. 이때 의선으로부터 ‘황곡’이라는 탄광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희미한 기억을 듣게 되는데….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 사슴’ 설화와 ‘연골’이라는 마을 이야기이다. 검은 사슴 설화는 중국 고대 설화를 작가가 변형한 것으로, 검은 사슴은 땅 속 깊은 곳, 어두운 바위틈에서 사는 환상의 동물이다. 뿔로 불을 밝히고 강력한 이빨로 바위를 먹고 사는데, 검은 사슴의 꿈은 지상으로 올라가 햇빛을 보는 것. 그러나 뿔과 이빨을 담보로 하여 햇빛을 보는 순간 검은 사슴은 녹아버리고 만다. 연골은 겨울에 날린 연들이 가서 떨어지는 깊은 산 속 마을. 그 마을의 봄은, 지난겨울에 날아온 낡고 해진 연들을 모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검은 사슴과 연골은 이 소설의 주제와 은밀하게 연결되는 신화이자 상징이고 또 은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