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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

죽음연습

  • 이경신
  • |
  • 동녘
  • |
  • 2016-05-01 출간
  • |
  • 460페이지
  • |
  • 148 X 210 X 30 mm /606g
  • |
  • ISBN 9788972977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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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철학자와 함께 고민하는 죽음 그리고 삶

‘죽음연습’은 다른 말로 ‘삶의 연습’이다.

지금 잘 살고 있나?

태어난 자에게 죽음은 숙명과도 같다. 우리는 우리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가지만, 불시에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체감할 때야 비로소 죽음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는 죽음을 묵인한다. 현대인은 죽음과 친하지 않다. 거부된 죽음은 은폐되고 유배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시대는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지 말고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잊으라’ 한다.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특정 사건이나 범죄로 인한 살해 사건 등을 제외하고는 일상적인 삶 안에서 죽음을 쉽게 논하지 않는다. 장례식은 시스템화된 병원 건물의 지하에서 은밀하게 치러진다. 병원 입구만 나오더라도 방금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했던가 싶을 정도로 거리는 삶의 활기로 가득 차다. 죽음과 무관하다는 듯이 사람들의 얼굴은 평온하다. 뉴스를 비롯한 매체에서는 평균수명이 늘어났다며 떠들어댄다. 의학의 발전으로 앞으로도 기대수명은 점차 올라갈 거라고 말한다. 대중들은 그들의 말을 진실처럼 믿는다. 마치 나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확신을 가지고는.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지금도 내 일상의 저편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죽음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낯선 죽음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체감한다. 재해처럼 겪게 되는 가까운 타인의 죽음은 내게 공포로 다가온다. 그것은 어떠한 언어로 표현 못할 만큼 지독히도 아프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해나가던 일상이 버겁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이다. 몽테뉴에 의하면, 우리가 죽음에 무관심해질 수 있는 길은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물론 평소 아무리 죽음을 생각한다 해도 죽음에 면역이 되진 않는다. 죽음은 확실히 산 자에게 부담스러운 무엇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죽음연습’을 함께 해보자고 말한다.

플라톤이 가장 먼저 사용한 단어인 ‘죽음연습’은 《파이돈》에서 언급된다. 즉, 플라톤에 의하면 철학한다는 것은 몸으로부터 영혼의 자유를 되찾는 것이며, 몸의 감옥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플라톤이 철학의 다른 말로 사용한 죽음연습은 이후 에피쿠로스는 물론이요, 세네카와 같은 스토아 철학자들에 의해서 계속 사용되었다. 이 철학자들은 죽음연습을 지금 주어진 삶에 충실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톤과 달리 이들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 전, 즉 삶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저자가 생각하는 죽음연습은 에피쿠로스나 세네카의 철학에 닮아 있다. <죽음연습> 칼럼의 기획의도도 바로 그랬다. ‘우리 자신은 언젠가 죽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을 직시하면서, 현재에 집중하며 좋은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하질 않나?’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연습이란 생각할 수 없는 죽음을 생각해보려고 애쓰면서 좋은 삶에 대한 사색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 끈질긴 공포를 들여다보고, 타인의 죽음에서 느끼는 고통, 슬픔을 극복하고, 사는 동안 잘 죽어가는 법을 고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다수의 사람들이 장수하는 오늘날, 늙어가면서 죽음에 이르는 문제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듦과 죽어감도 바로 삶일 따름이다.

이 책은 철학자 이경신이 여성주의 인터넷 저널 《일다》에 2012년 10월부터 2016년 1월까지 만 3년이 넘도록 <죽음연습> 이라는 제목 아래 연재한 칼럼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에는 《일다》에 기고한 칼럼 51편과 연재가 끝난 후 작성한 ‘여성이 느끼고 체험한 전쟁 속의 죽음’에 관한 두 편의 글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오래전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을 차례로 겪어가면서, ‘죽음’이라는 현상은 저자 개인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트라우마처럼 지독한 연결고리로 자리매김했다. 죽음을 본질적으로 꿰뚫고 싶어 철학을 시작했다는 저자에게 이 책은 자전적 고백이자, 사회의 다양한 죽음을 목도한 철학적 에세이다. 나아가 더 많은 이들과 죽음에 대해 사색해보자고 권유하는 목소리가 진정성 있게 담겨 있는 기록물이다.

이 책을 읽으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한 생에 대한 의지를 절실히 공감할 수 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남음을 기뻐할 수밖에 없는 비극. 여러 각도로 목격하게 되는 죽음의 광경을 따라, 우리는 인간의 유한함을 가슴 시리게 깨닫게 된다. 동시에 인간이 인간을 결코 참혹한 죽음으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바다 건너편에서 자행되는 전쟁의 폭격 한가운데에 있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현실인지, 그리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방관하는 나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나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현재 순간에 충실하라.
Memento mori, Carpe diem.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늙고 있다

늙음은 갑작스런 불청객이 아니다.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늙기 싫어도 늙고 죽기 싫어도 죽는다. 늙는 것을 아무리 거부해본다 한들, 결국엔 대다수가 체념하고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물론 지적,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능력에 따라 늙음의 개인차는 크다. 따라서 개개인이 노년으로 자각하는 시간이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언제부터 노년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늙음은 어느 날 불시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지는 않는다. 많은 노인들이 주장하듯 그 누구도 갑작스레 몰락하듯 늙지 않는다. 늙음은 추락이나 몰락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죽음조차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듯이 늙음도 늙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지혜로워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늙고 있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늙어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차분히 바라볼 여유일지 모른다. 늙음을 ‘문턱을 넘어 맞는 노년’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진행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늙음을 특별히 긍정하거나 부정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늙음은 인생의 여정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짧을 수도 누군가에게는 길 수도 있는 그런 것. 누군가는 정신이 더 빨리 늙고 누군가는 신체가 더 빨리 퇴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빈곤으로 내몰린 노인들
늙어가는 것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열두 명의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즉, 노인 자살이 전체 자살의 28.1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자살률이 높고 OECD 국가에서 노인자살률 최고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가난과 노인 자살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염두에 둘 때, 우리나라 노인들의 경제 형편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노인 상당수가 빈곤하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은 OECD 국가 가운데 1위이자 2014년 기준 OECD 평균노인빈곤율의 세 배가 넘는다. 여기서 여성 노인의 경제 상황이 남성 노인의 경제 상황보다 더 열악하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게다가 물가는 오르고 중위 소득은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드니 노인들이 처한 경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때문에 생계를 꾸리기 위해 밥벌이에 나선 노인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폐지 수집과 같은 비임금 자영업이나 청소 용역, 택배 배달과 같은 저임금 임시직 일자리로 내몰린다. 이것이 바로 65세 이상의 노인고용율이 39.6퍼센트로 OECD 국가들 가운데 최고이면서도 노인복지는 최하위에 속하는 나라의 실상이다.

노인복지 수준이 낮아서 노인들이 생계형 노동을 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가 없다면, 가난한 노인들이 건강을 잃으면 살 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다. 노인 의료비는 날로 증가하고 있고, 전체 진료비의 36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늘어가는 가난한 노인들, 병마에 시달리는 노인들 가운데 자살 유혹을 받는 사람이 어찌 없을 수 있을까? 심리학자 토머스 조이너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짐이 된다는 자기부정뿐만 아니라 소속감 상실로 인한 고립감이 자살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우리사회가 노인으로 간주하는 65세 이상의 사람이 600만을 넘어섰고, 2025년에는 노인 인구 천만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측한다. 노인 인구의 증가만큼이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독거노인의 증가다. 독거노인은 전체 노인 인구의 약 20퍼센트라고 추정한다. 노인복지는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데도 기대수명은 높아지니, 오래 살면 살수록 빈곤에 시달릴 것이 뻔하다. 노인빈곤율을 고령자일수록 올라간다. 이러한 노인의 절대적 빈곤과 극단적 고립이 몰고 간 자살과 고독사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에 앞서 우리사회가 부끄러워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망(엄마)은 이제 없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삶은 계속 된다.
롤랑 바르트

아이들도 충분히 죽음을 슬퍼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 슬픔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의 삶을 지속시킬 힘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가 죽든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삶은 계속된다. 애통해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더라도 삶은 계속된다. 삶에 머물러 있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의 죽음이 도래하는 그날까지 여러 죽음을 겪으면서도 그 죽음들을 껴안고 살 수밖에 없고, 또 잘 살아가야 한다.

잘 살아가려면 상실의 슬픔을 충분히 뱉어내야 한다. 슬픔을 충분히 풀어놓지 않고 감정을 억누를 때 마음과 육신은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난 뒤 남은 사람이 심인성질환뿐 아니라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을 앓거나 자살로 죽은 이를 뒤따르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사람과 제대로 이별해야 한다. 장례식이야말로 진솔한 애도의 출발점일 수 있다. 장례를 준비하고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한 사람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대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제대로 슬픔을 소화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비단 성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도 충분히 죽음을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죽음에 대해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한다. 만약 어른들이 죽음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황당한 공상에 빠지거나 근거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열 살에 이르면 아이들은 죽음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죽음을 잘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른들은 흔히 아이들이 어려서 죽음을 제대로 슬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이들도 충분히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한다. 만약 어른들이 죽음에 대해 침묵한다면 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어른들을 보며 점점 더 죽음을 침묵하게 된다.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죽음을 소화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살아가면서 무수한 상실의 경험을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른들이 그랬듯이 죽음에 대한 고통과 공포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도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을 주며, 죽음에 익숙해지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담담하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오늘날, 잘 죽어가는 것에 관한 고민
과거 1970~80년대만 해도 집에서 마지막을 맞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장의사가 한 곳 정도는 있었다. 어느덧 그런 시절이 휑하니 지나가고 지금은 추억 속에서나 끄집어내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부고를 받으면 어김없이 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간다. 다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병원 부속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병원이 임종의 장소가 된 것이다. 이제 도시인들은 생의 마지막을 환자로서 병원 중환자실에서 맞이하는 것에 별 거부감을 못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환자실이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장소로 과연 적당할까? 19년간 중환자실에서 근무한 한 간호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듯, 중환자실은 위중한 환자가 편안히 쉬면서 치료를 받을 만한 곳이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중환자실은 “죽음으로 가는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중환자실에 침상이 부족하지 않는 한, 소생 불가능한 환자도 퇴원하기 어려워졌다.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관행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이 벌어진다. 과다출혈로 식물인간이 된 김 할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게 되자 자녀들이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했지만 병원 측이 이를 거부한다. 결국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지’라는 법원 판결이 내려졌을 때야 비로소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중환자실에서 비참하게 생의 마지막을 맞는다.

2013년 ‘연명치료’가 ‘연명의료’로 이름이 바뀌고 ‘무의미한 연명의료 결정 제도화 관련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연명의료는 중환자실에서 여전히 계속된다. ‘사전의료지시서’가 ‘사전의료의향서’로 이름이 바뀐 것만 보더라도 환자의 자기결정권보다 소위 전문가라는 의사의 결정이 더 우위에 있는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환자는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자유가 없이 의사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이 중환자실에서 의사의 의지대로 생명을 꾸역꾸역 연장하다가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알폰소 데켄 신부가 말하듯 내가 주인공이 되는 ‘인간다운 죽음’을 실현하려면, 《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의 저자 나카무라 진이치의 “구급차를 부르지 말라”는 극단적 조언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구급차를 타는 순간, 연명의료를 포함한 현대 의료에 나를, 내 죽음을 맡기게 된다는 그의 말을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어떻게 죽고 싶은가?
불치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학적 사형 선고를 받는다면 어떨까? 이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죽음을 막연한 미래일 뿐이다. 자기 몸의 미세한 변화들을 감지하며 죽음을 예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개는 현대 의학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할 때 죽음의 현실적인 무게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프랑스인인 마리 드루베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말기암 환자에게 시행하는 화학 요법의 4분의 3 이상이 무의미한 치료이며, 오히려 화학 요법을 받지 않은 사람이 더 오래 생존했고, 약물 요법, 감마선, 방사선 치료와 같은 획기적인 암 치료법도 알고 보면 별 효과가 없는 의료계의 돈벌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루베가 알아본 의학적 치료의 진실이었다. 따라서 드루베는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말기 폐암 환자의 목숨을 연장한다는 것은 삶의 양적 길이만 늘릴 뿐 삶의 질은 보장하지 않아 고통스럽게 죽어가게 된다고 결론지었다.

프랑스에서는 2005년 4월 22일 레오네티(Leonetti) 법안(치료를 중단하고 죽도록 내버려두는 ‘소극적 안락사’의 합법화)이 시행된 이래 소극적 안락사만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적극적 안락사가 허용되는 벨기에를 탈출구로 삼는다. 물론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한다고 해서 안락사를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으며, 그 절차 역시 복잡하다. 더는 회복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만이 안락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녀가 안락사를 그토록 간절히 소망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중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죽음에 직면해 어떤 죽음 방법을 선택하건, 누구나 고통이 덜한 죽음, 삶의 질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인생의 마지막을 원할 것이 분명하다. 존엄사, 안락사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논쟁을 바라보면 누구를 위한 논쟁인지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간섭할 권리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실제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죽어가는 각자의 선택에 맡겨두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위험사회
위험은 도처에 존재한다. 인류의 탄생 이래 지금까지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살아가면서 위험하다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죽음의 그림자를 떨치기 위해 벌이는 일들이 세상을 점차 더 위험으로 내몰고, 오히려 인류를 죽음 속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과거에는 자연이 인간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자연 정복을 위해 총동원한 과학과 기술은 우리 생명을 구하는 유익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새로운 위험 속으로 몰아넣은 유해한 것이기도 하다. 과학과 기술이 날로 복잡해지면서 위험도 훨씬 커지고 따라서 그러한 위험에 대한 예방도, 예측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이름 지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가 바로 그 위험사회다. 아니, 그 어떤 위험사회보다 더 위험한 사회라고 한다. 과거 군사적 성장주의와 파괴적 개발주의는 이후 과도한 경쟁과 이윤 추구, 생명 경시와 자연 파괴를 일삼는 천민자본주의와 성장제일주의로 면면히 이어졌다. 과거 대형 사고들은 물론이거니와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바로 그 결과다. 세월호 사고를 지켜보면서 우리사회가 얼마나 극도로 위험한 사회인지, 사회학자이자 시민운동가인 홍성태의 말을 빌리자면 얼마나 “위험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사회”인지 알 수 있다. 어떤 개인이 무책임해서 벌어진 사고로, 재수가 없고 운이 없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무엇보다도 대형 사고의 희생양이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사회에서 위험의 배분은 불평등하다. 왜 우리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더 위험한 사회인지 물어봐야 한다. 왜 사회적 약자가 더 병들고, 더 위험한 노동에 종사해야 하고, 더 위험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왜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죽음에 더 노출되어야 하는지, 왜 이토록 위험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목차

시작하는 글 ‘죽음연습’이란?

1부 나이 듦의 지혜를 찾아

1장 늙기를 두려워해야 하나?
죽음연습 1 동네 산책길에서 만난 할머니
죽음연습 2 외톨이로 늙는 두려움
죽음연습 3 잠 못 이루는 노인들
죽음연습 4 추억을 가꾸며 살아내는 노년
죽음연습 5 나이를 바라보는 시선
죽음연습 6 지금, 우리는 늙고 있다

2장 잘 늙어가려면
죽음연습 7 두 번째 사춘기라는 즐거운 소식
죽음연습 8 늙음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죽음연습 9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노년의 행복
죽음연습 10 죽음이 가까우면 삶이 즐겁다
죽음연습 11 외로운 노년, 진정한 자아와 만나는 시간

2부 죽음은 삶의 끝인가, 또 다른 삶의 시작인가?

3장 죽음의 불안, 사체에 대한 공포
죽음연습 12 산책길에서 만난 두더지의 주검
죽음연습 13 죽어가는 새를 지켜본 날
죽음연습 14 과연 죽음을 예감할 수 있을까?
죽음연습 15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죽음연습 16 오래된 도시에서의 배회

4장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죽음연습 17 도시의 공동묘지에서 보낸 오후
죽음연습 18 핼러윈 밤, 등불을 든 잭
죽음연습 19 죽음을 미리 준비하라
죽음연습 20 인골을 전시한 까닭
죽음연습 21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죽음연습 22 아이들도 죽음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다

5장 죽음의 상상, 사후 세계의 믿음
죽음연습 23 꼭두에 드러나는 죽음의 상상
죽음연습 24 죽음 이후 우리를 기다리는 것
죽음연습 25 유럽의 죽음 예술을 들여다보며
죽음연습 26 자연에 다가가면서 죽음의 부담 줄이기

3부 너도 죽고, 나도 죽으리

6장 가까운 사람의 상실
죽음연습 27 어머니의 한복으로 만든 찻잔 받침
죽음연습 28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시간들
죽음연습 29 장례식에서 애도를 시작하라
죽음연습 30 시신조차 없는 갑작스런 죽음의 고통
죽음연습 31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얻는 고마운 선물

7장 오늘날, 잘 죽어가는 것에 관한 고민
죽음연습 32 내가 내 죽음의 주인공이길
죽음연습 33 마지막 순간까지 웃을 수 있길
죽음연습 34 죽음을 앞두고 어떤 말을 남길까?
죽음연습 35 할머니는 왜 화장을 원하셨을까?
죽음연습 36 죽어가는 사람의 외로움
죽음연습 37 삶과 죽음 사이에 머무는 고통
죽음연습 38 어떻게 죽고 싶은가?

4부 그(녀)들의 죽음

8장 제도와 관습의 살인
죽음연습 39 억울한 죽음, 부당한 죽음을 낳는 사형 제도
죽음연습 40 불태워진 여성들, 이들은 왜 살해당해야 했나?

9장 위험한 사회, 냉혹한 세상 속의 희생양
죽음연습 41 노란리본을 마음에 달고
죽음연습 42 교통사고 공화국에서 보행자의 위험한 일상
죽음연습 43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위험사회
죽음연습 44 가난이 부르는 죽음
죽음연습 45 자살하고 싶은 마음, 자살할 수 있는 능력

10장 전염병, 학살과 전쟁 그리고 핵이 낳는 집단 죽음
죽음연습 46 메르스가 이끄는 사색
죽음연습 47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른 집단 학살
죽음연습 48 대량 학살을 동원한 미국의 패권 정치
죽음연습 49 제주 4·3 사건, 한국전쟁에서 자행된 민간인 대량 학살의 기억
죽음연습 50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죽음연습 51 죽음은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아요
죽음연습 52 평화와 핵이 양립할 수 없다는 진실
죽음연습 53 죽음의 재앙, 체르노빌·후쿠시마의 원전 사고에 대한 기억

마치는 글 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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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이경신은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몽펠리에 3대학(일명 폴 발레리 대학)에서 근현대 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 D.E.A.학위를 받았다. 청소년을 위한 철학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지도하다가 중단하고, 현재는 의 시민교육 에서 ‘좋은 삶을 위한 사색’이란 큰 제목 아래 ‘죽음’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의 성인철학교육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에는 좋은 삶을 위한 지혜를 모색하는 ‘철학카페’도 꾸리기 시작했다. 옮긴 책으로는 질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이 있고, 저서로는 《철학하는 일상》, 《도서대출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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