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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왕을 꾸짖다

선비 왕을 꾸짖다

  • 신두환
  • |
  • 달과소
  • |
  • 2011-03-15 출간
  • |
  • 476페이지
  • |
  • 153 X 224 X 30 mm /826g
  • |
  • ISBN 9788991223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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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상소는 정의의 문학이자 정치문학의 꽃으로 왕조시대의 사장된 글이 아니라 서슬 퍼런 정의감과 직언이 담겨 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데 절실하게 필요한 정론이다. 상소문은 당시의 중요한 쟁점들을 다룬 경우가 많은 바, 상소문을 통해 한 시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선비, 왕을 꾸짖다> 이 책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왕조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상소들을 선별하여 다루었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시대적 배경이나 각각의 상소가 갖는 의미들을 해설로 덧붙였다. 설총의 화왕계, 원나라의 황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고려의 공녀제도를 폐지시킨 이곡의 상소, 최만리의 한글창제 반대 상소, 그 누구도 거론하기를 꺼려했던 단종의 복위와 사육신의 복권을 주장하며 100년 묵은 문제를 제기했던 김성일의 상소, 어린 임금에게 치국의 방책을 올린 퇴계 이황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나 율곡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대를 대표하는 17명의 인물들이 남긴 22편의 상소를 만나볼 수 있으며, 부록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일본에 보냈던 사대하는 표(表)와 소(疏), 그리고 국서를 소개했다.

- 관각문학의 꽃, 상소
상소문은 문장의 정수로서 관각문학의 꽃이라는 위상을 가지고 동양사 속에서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소문은 왕에게 올리는 정치적인 글이기에 문학의 범주에서 다룰 만한 것이 못 된다는 편견이 있어 거의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상소문 중에는 이사의 〈축객서〉, 제갈량의 〈출사표〉, 이밀의 〈진정표〉등과 같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들도 상당량 존재하며,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명문으로 남아 동양 고전문학사에서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상소문은 분명하고 진실하며 독실하고 정성을 근본으로 한 논리적인 글로서, 사실을 분석하고 통찰하여 강직한 충성심으로 뜻을 세워야 책임을 완성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현재의 정치상황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잘못을 비평하고 넓은 식견으로 비교하고 선택하여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옛 신하들의 관례와 격식을 전범으로 삼아서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이해하며 번잡한 사건도 조리 있게 진술하여 문제의 핵심을 잡아서 풀어내는 장치가 바로 상소문의 성격인 것이다. 이들 상소문에는 문장에 대한 구성논리와 설득을 위한 비유, 당대 사회에 대한 현실인식 등 문예적인 내용들이 들어있으며, 오랜 역사를 두고 계승 발전되어온 상소문 문체에는 장중하고, 사실적이며 전아한 문체를 구사해야 한다는 문예 미학적인 성격이 들어 있다.

- 시대를 통하는 가치, 선비정신
상소는 세월의 먼지가 묻어나는 사장된 글이 아니라 현재에도 통용될 수 있는 유의미한 정치담론이자 통치철학이다. 옛 선비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던 왕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간했으며, 도끼를 들고 들어가 알렸고, 벼슬을 버리면서 직간을 하고, 정의를 위해 외치고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온몸으로 울었다. 그들이 자결을 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 이것이 바로 선비가 가야하는 우국애민의 길이었다.
위민의식(爲民意識) 없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얼룩져 가고, 정의를 향한 외침은 허공에 맴돌다 사라지는 병든 사회. 세상이 곪아들어 갈수록 올곧은 가치에 대한 갈증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이러한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신하들의 충정 가득한 상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선비정신은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자산이자 비뚤어진 사회상을 바로잡는 따끔한 죽비소리가 되어줄 것이다.

<책 속으로 추가>
〈언문(諺文) 창제의 부당함을 아뢰옵니다〉-최만리(崔萬理)
언문(諺文)을 창제하는 것은 지극히 신기하고 묘하여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과 같은 천고에 훌륭한 일이오나, 신 등의 좁은 생각으로는 오히려 우려되는 일이 있사와 간곡한 정성으로 감히 뒤에 나열하오니 전하께서는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서 시행하여 왔는데, 이제 막 글이 통하고 법도가 중국과 같이 되어가는 마당에 언문을 새로 창제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만일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예부터 중국은 그 땅이 넓어 전국의 기후와 풍토는 비록 달랐으나 그 지역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적이 없사옵니다. 오직 몽고(蒙古), 서하(西夏), 여진(女眞), 일본(日本)과 서번(西蕃) 같은 나라들이 각기 그 나라의 글자가 있사오나 이는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므로 따로 더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말에 ‘중화의 영향으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는 말은 있어도, 중국이 오랑캐로 인해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도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은나라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고 하며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였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신기롭고 향기로운 영약인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쇠똥으로 만든 말똥구리의 당랑환(螳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결함이 아니오리까. (중략)
신라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는 비록 촌스러운 말이기는 하나 모두 한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사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자는 원래대로 두고 서로 분리시킨 것이 아니므로, 하급 관리나 관청에 딸린 하인들도 이두를 익히려면 먼저 한자를 익힌 연후라야 이두를 쓸 수 있어 이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관청의 장부나 문서로 하는 계약서 등에 아무런 방해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버리고 따로 촌스럽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려 하시옵니까? 만약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가 되려는 자들은 오로지 언문만을 배우려 하고 유학을 학문하는 한자는 돌보지 않기 때문에 관리들은 둘로 나누어질 것이옵니다. 언문만을 배워 출세하려 한다면 후배들이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만으로도 족히 입신(立身)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니 그들이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여 성리(性理)학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세종의 비답(批答)〉
그대들이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배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 역시 음이 다른 것이 아니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 또한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그대들이 모시는 임금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해설)
조선은 명나라를 존중하며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건국을 하였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이민족 국가에 대하여 중국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는 동문 정책을 펴오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본받고 중국을 따라하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마치 일제가 강제로 우리에게 일본문자를 쓰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듯이, 문서로서 명령하고 다스리기에 매우 편하다는 논리였다. 조선은 이소사대로써 중국을 섬겨오던 터라 이것을 어기고 언문을 창제하는 것은 독립을 주장하고 자주적인 국가를 주장하는 것으로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마찰을 초래할 수 있는 큰일이었다. 이에 최만리 등 신하들은 그것을 우려하여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한글은 위대한 조선의 문자라고 칭하지 않았고, 관공서나 외교문서에서도 조선이 망할 때까지 끝내 사용되지 않았다. 세종의 언문 문자정책은 그래서 순수한 일반 백성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공포하는 서문에 그 뜻을 분명히 밝혔다. 위대한 우리의 한글이 창제에 비하여 그 서문이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바로 당시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최만리가 상소에서 제기한 문제는 조선의 어문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으며, 세종의 입장에서도 언문 창제는 시급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하여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신하의 정성스러운 뜻이 담겨 있고,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는 충직한 뜻도 담겨 있었다. 최만리가 이소사대를 취하고 한자를 고수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었으니 오늘날의 입장에서 흑백논리로만 평가하여 최만리 등을 맹목적 사대주의자로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본문 41~56쪽

〈관기 초월의 상소〉 - 평안북도 용천(龍川) 기생 초월(楚月)
가선대부승지 겸 예조참판, 사간원대사간 심희순(沈熙淳)의 첩이요, 평안도 청북 용천기생 초월이 엎드려 올리나이다. 신의 일생 기구하고 팔자가 궁박하여 신의 어머니 뱃속에 밴지 칠 삭 만에 아버지가 죽고, 낳은 지 한 해 만에 또 어머니마저 잃어 기저귀 찬 적자(赤子)로 젖맛도 모르고 형제도 없이 고고히 단신 무의무탁한 처지가 되어 곧 외사촌 댁에 수양녀가 된지 어언 십여 년이 되었나이다. 그 무정세월 속에서도 차츰 몸이 닦여져 온 터에 천만 꿈밖의 일로 집 어른인 심희순이 병오년 봄에 서장관(書狀官)을 봉명(奉命)받사와 중원 땅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을 첩으로 삼았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전하께옵서 일개 창녀의 몸에 성애를 과람이 내리사 숙부인(淑夫人)이란 직첩이 새긴 홍패(紅牌)마저 내려주셨으니, 이를 받들던 날 모골이 송연하고 먹고 자는 일이 안정이 안 되어 마치 살얼음을 밟는 듯한 느낌이었사옵니다. (중략)
전하께옵서는 귀를 스치는 바람처럼 신의 말을 스쳐듣지 마시기를 바라옵니다.
먼저 신의 부군(夫君)이 지은 죄부터 아뢰겠나이다. 재상의 손자요 사족의 아들로 사람됨이 덜하고 가난한 선비를 업신여길 뿐 아니라 옛글을 배우지 않아 콩과 보리, 어(魚)와 로(魯) 자를 분별하지 못하옵니다. 지각이 없고 소견이 어두워 의사가 통하지 않으니 밥그릇이 높으면 생일인줄 알고 동녘에 해가 뜨면 날이 바뀐 줄 알 뿐입니다. 이 같은 위인이 마음 둔 데는 높아 스무 살도 못 되어 과거에 급제하고 채 백날이 못 차서 대간 옥당(玉堂)에 올라 성은이 망극함에도 다만 국록만 탐내고 부모의 길러준 은혜는 돌보지 않으면서도 축첩만 일삼아 집안에 음률(音律)이 그치지 않고 건달 가객(歌客)과 벗 삼아 성찬으로 밤낮을 가릴 줄 모르옵니다. 재상 심상규의 손자로 벼슬이 하늘처럼 높으니 아무도 감히 당해낼 수야 없지만 나라가 위태로운데 세간의 질고도 도무지 모르고, 크고 작고 무겁고 가벼운 일과 옳고 그르고 길고 짧고 먼저 해야 할 일 뒤에 해야 할 일에 전연 몰지각하옵니다. 국록을 축내는 큰 도적이 비단 이 한 사람뿐이오리까? 지아비의 죄는 천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으며, 천만 번 칼로 찌르고, 만 번을 귀양 보내도 오히려 못 다할 듯 하온데 이 어찌하오리까? (중략)
어사출도에 대해서 말씀드리옵니다. 어사란 해진 옷을 입고 찌그러진 갓을 쓰고 종적을 감추고 곳곳을 몰래 다녀 탐관오리가 백성의 피와 기름을 빠는 것과 간사한 향임(鄕任)과 간악한 아전이 국고를 도둑질하는 것과 젊은이가 노인을 업신여기는 것과 불효하고 우애 없는 것과 그른 일로 송사를 일으키는 것과 터무니없는 이득을 노린 장사치와 노름꾼, 불량배를 낱낱이 살펴서 출도 후엔 죄줄 것은 죄주고 벌줄 것은 벌줘서 큰 죄인은 먼저 베고 뒤에 보고를 올리는 선참후계(先斬後啓)가 당연한 법이었사옵니다. 그러나 요즈음 어사는 역마를 타고 포졸을 거느리고 마패를 노출시키고 본색을 드러내 뭇사람이 알게 하옵니다. 강산누각과 기암절승지, 이름난 절간을 찾아 활개를 펴고 놀이를 일삼으니 가는 길마다 그 고을에서 알아차리고 극진히 대접하니 이러한 어사는 보내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백성들에게는 도움은커녕 해만 끼치옵나이다.
고을의 일만 번거롭게 만들고 볼기나 때려 본관으로 데려간다고 으름장을 놓아 재물을 빼앗으며, 정작 억울한 일이 있어도 송곳 꽂을 땅도 없이 가난한 사람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큰 허물이 있어도 일백금만 가지면 죽을 사람도 곧 살려낼 길이 어사로 통한다는 것이 상식이옵나이다. 부자는 면제되고 가난한 자만 재앙을 입게 되니 이런 원통한 일이 있사오리까?

(해설)
초월의 상소문은 2만 1천여자의 방대한 것으로 천한 몸에 내린 숙부인의 직첩이 과분하다 하여 반려하는 상소문에 곁들여 당시의 시폐를 뼈저리게 서술한 것이다. 신변에서 직접 겪은 일들이기에 사실감이 있고, 나이어린 여자의 서술이라 솔직하며, 천한 여자이기에 반사회적이며, 반상에 때 묻지 않았기에 애국적이며, 나이나 신분에 비해 신랄함이 비길 데 없이 매섭다.
이 상소문은 조선 상소문의 이채로서 그 내용의 구성이나 당대의 시폐를 묘사한 서사와 진솔하고 과감한 표현은 한 시대를 울린 조선 말기 최고의 문제작이다. 자기의 남편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출발하여 임금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모든 관료들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당대 최고의 사회고발 상소이다.
- 본문 281~309쪽

목차

서문

〈상진평왕서(上眞平王書)〉 -김후직(金后稷)
〈화왕계〉-설총(薛聰)
〈지부상소(持斧上疏)〉 -우탁(禹倬)
〈황제시여 제발 고려에서 어린 소녀들을 빼앗아오지 마십시오〉-이곡(李穀)
〈언문(諺文) 창제의 부당함을 아뢰옵니다〉-최만리(崔萬理)
〈북방 경비에 대한 열 가지 방책(備邊十策)〉-양성지(梁誠之)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이황(李滉)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조식(曺植)
〈정묘년에 사직하면서 승정원에 올린 상소문(丁卯辭職呈承政院狀)〉-조식(曺植)
〈무진봉사(戊辰封事)〉-조식(曺植)
〈단종(端宗)을 복위시키고 사육신을 복작시키며 종친을 서용하기를 청합니다〉-김성일(金誠一)
〈만언봉사萬言封事〉-이이(李珥)
〈지부상소(持斧上疏)〉-조헌(趙憲)
〈진오폐소(陳五弊疏)〉-신봉석(申鳳錫)
〈관기 초월의 상소〉-초월(楚月)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소〉-최익현(崔益鉉)
〈병인의소(丙寅擬疏)〉-최익현(崔益鉉)
〈을사보호조약에 분개하는 상소〉-곽종석(郭鍾錫)
〈한일협상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곽종석(郭鍾錫)
〈사직상소(辭職上疏)〉-유길준(兪吉濬)
〈한일합방성명서〉-이용구(李容九)
〈한일합방을 건의하는 상소〉-이용구(李容九)

부록
1. 사대(事大)하는 표(表)와 소(疏)
2. 인국(隣國)에 준 국서

저자소개

저자 신두환은 1958년 경북 의성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에서 한국한문학을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 서울시립대, 서경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면서 시인이자 칼럼니스트이다. 현재 국립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조선전기 민족예악과 관각문학』, 『남인 사림의 거장 식산 이만부』, 『국역 우담집』(공역)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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