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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의 도를 담다

한식의 도를 담다

  • 김상보
  • |
  • 와이즈북
  • |
  • 2017-06-30 출간
  • |
  • 328페이지
  • |
  • 152 X 213 mm
  • |
  • ISBN 979118699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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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5천 년의 정신, 한식의 道를 말한다.
절용과 절제의 미덕을 담은 한식 밥상,
미식과 탐식을 경계하는 食의 철학,
몸과 자연의 이해에서 출발한 조화로운 양생법과 약식동원 사상 등
민족의 삶과 함께 숙성해온 뿌리 깊은 정신유산, 우리 한식 이야기.
오늘날 상다리 부리질 듯 화려한 한정식과
왜곡 계승된 한식문화를 바로잡으며
한식에 깃든 사상과 가치를 복원한다.

찬란한 한식 밥상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 한식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우리 선조인 맥족이 재배한 콩으로부터 한반도의 장문화가 탄생했다는 사실, 300년 전 고추 전래로 비로소 김치 형태가 완성되고, 이로써 형성된 매운맛 선호가 각종 탕과 무침을 비롯한 수많은 한식 찬품을 탄생시켰다는 음식 변천사는 흥미롭다. 우리의 밥상차림이 중국 흉노족과 고대 한나라의 밥상에 그 연원이 있다는 식문화사적 계보도 재미있다. 우리 민족이 무속신앙의 역사가 오랜 만큼 제의음식이 발달했고, 궁중음식이 곧 제의음식이라고 할 정도로 한식에 제의적 요소가 깊게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들린다.
평생 한식의 계보를 추적해온 한식학자 김상보의 음식 이야기다.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식문화사 흐름 속에서 한식의 정통성을 구명해온 학자의 올곧은 음식문화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식 연구를 위해 고대 동아시아 식문화사, 비교문화, 종교민속론, 재배학, 전파교류사까지 파고들며 한식의 기원과 변천사를 규명했다. 『주역』, 『의례』, 『제민요술』, 『고려사절요』, 『진연의궤』, 『진찬의궤』, 『조선만화』 등 한·중·일을 넘나드는 고문헌 연구가 그 토대가 되었다. 가장 빛나는 업적은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이두와 한문을 장장 3년간 해독하여 각종 연회에 올랐던 궁중 상차림의 진실을 밝혀낸 일이다.

한식에 담긴 정신과 사상을 만난다
우리 선조들이 영위해온 한식문화는 주식과 부식이 뚜렷이 구분되며, 국과 밥의 기본 차림이 기타 반찬의 가짓수와 종류, 상차림의 구성까지도 결정하는 독특하고 유기적인 밥상차림을 보여준다. 쌀로 밥을 지어 주식으로 삼고, 국의 양념을 위하여 일찍이 콩을 발효시켜 간장과 된장을 만들었으며, 어패류로 젓갈을 삭혀 식생활에 활용하는 등 발효식품, 저장식품이 발달한 고유한 식문화를 형성해왔다.
한식의 뛰어난 가치는 그 속에 깃든 사상과 정신이다. 나물 한 가지를 만들어도 양념과의 조화가 우선이었다. 식재료 선택과 조리법은 음양조화(陰陽造化, 동물성과 식물성을 조화롭게 먹을 것, 음과 양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먹을 것), 오미상생(五味相生, 5가지 맛을 균형 있게 먹을 것), 오색상생(五色相生, 5가지 색을 알맞게 먹을 것), 소의소기(所宜所忌, 적당히 골고루 섭취할 것), 이류보류(以類補類, 동물의 특정 부위는 사람의 특정 부위에 좋다)의 원리에 기초했다. 음식을 단순한 음식이 아닌, 자연과 인간의 섭리를 담은 정신적 가치로 환원하였다. 식(食)에 담은 이런 사상은 약식동원으로 요약되며 수많은 약선음식을 탄생시켰다. 제대로 만들어진 한식은 약선음식에 충실한 음식이었으며, 잘 먹으면 불로장수가 가능해진다.
한식은 오늘날처럼 기계적인 세계관으로 만들어내는 음식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만드는 이와 먹는 이의 정신이 서로 연결된, 음식 윤리에 입각한 음식이다. 작물을 가꾸고 수확하고 조리하고 만들고 먹는 모든 과정에는 식의 철학이 스며 있다. 만드는 이와 먹는 이의 관계성이 사라진 오늘날의 식문화 속에서 현대인들이 한식의 정신과 가치를 돌아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 한식 밥상에 숨어 있는 이야기의 원천은 도(道)다.
우리 선조들의 식(食)의 철학은 ‘음식지도(飮食之道)’였다. 음식에서 도리를 지킨다는 것인데, 먹고 마시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때에도 욕심과 집착을 경계하는 마음을 유지하고자 했다. 검박한 생활은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선비들까지 실천하는 식의 규범이었다. 미식이나 탐식, 과식은 늘 경계 대상이었다. 음식이란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도였고, 양생론적 사고는 내노경신(耐老輕身, 몸을 가벼이 하면 가히 늙음을 이길 수 있다)을 위하여 가능한 한 적고 가볍게 먹는 것이었다. 군자를 지향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했고, 욕망과 사치를 경계하는 생활문화는 조선사회를 관통하는 정신이었다. 조선 왕은 유교를 기초로 한 덕치(德治)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아 덕치의 필수 조건을 애민 사상으로 여겼기에 인군(人君)으로서 백성들에게 검박한 식생활로 모범이 되고자 했다. 한식에 담긴 사상과 정신은 한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다.

한식의 정신이 실종된 오늘의 한정식 문화 비판
저자가 조선왕조 연향의궤를 고증한 바에 따르면, 현재 알려진 궁중음식에는 오류가 많다. 지금 통설로 굳어진 반상차림법이 『원행을묘정리의궤』, 『진연의궤』 등 고문헌에서 제시하는 차림법과 다르다는 사실과 비빔밥·골동면·구절판·신선로·겨자채 등의 궁중음식이 심하게 변형되거나 왜곡된 채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지만, 한식의 원형 발굴과 전통 한식의 올바른 계승을 위해서는 규명해야 한다.
한식의 원형이 훼손된 근본 원인은 일제의 식민 지배이다. 구한말 왕실의 몰락과 노비에서 양반으로의 신분 이동이 가능할 만큼 국가 질서가 급속히 붕괴되는 시대에 군자를 지향했던 성리학적 실천 기반인 검박한 식문화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치스러운 상차림이 이식되었다. 이를 대변하는 상징적 사례가 바로 요릿집 명월관, 그리고 안순환이라는 이름 석 자이다.
궁에서 임금의 수라를 관장하는 일을 하다 퇴출된 안순환은 요릿집 명월관을 인수해 중국식, 일본식이 가미된 궁중음식의 아류, 궁중의 예와 악이 실종된 사치스러운 음식을 궁중음식이라 선전하며 돈을 벌었다. 술상에 올랐던 국적 없는 음식들은, 끼니를 때우기도 힘든 민중을 외면한 양반 사회와 권력 계층, 일본인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이런 음식들이 오늘날 상다리 부러질 듯한 한정식으로 계승된 것이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호화로운 한정식은 전통 한식을 한참 벗어난 상차림이다.
구한말 요릿집의 번성은 1945년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근 80년 동안 계속되어 요릿집 문화가 대중과 학계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요릿집 궁중음식의 유행으로 궁중음식의 정통성은 수면 아래로 사라지게 된다. 현재 궁중음식으로 알려진 많은 것들은 정통 궁중음식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바로잡는 노력은 한식학계와 한식계가 당면한 과제이다.
전통 한식은 궁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음식문화였다. 궁중음식과 향토음식의 경계는 없었다. 궁중음식은 민간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토속 식자재와 어우러져 거듭 변화 발전하면서 전통 한식으로 정착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중국처럼 진귀한 식재료나 고급 요리를 황제나 특권층이 즐기는 전통이 우리는 없다. 민간음식이 왕의 밥상에 진상되기도 하고, 궁중에서 민간으로 음식이 전해지기도 하면서 수렴·통합되는 음식문화였다.
왕의 음식이라고 해서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교 정신에 입각한 수라상은 반가음식보다 더 검박했다. 식을 탐하는 것은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왕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왕의 수라상이 12첩반상(고문헌이 제시한 반상차림법으로 헤아리면 22첩반상)이라고 오도되고 있지만 여러 의궤 문헌에 따르면 실제로는 검소한 7첩반상이었다.
왕의 밥상은 백성의 식을 돌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 수단이었다. 영조는 나라에 기근이 들면 수라상에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감선’과 고기반찬을 올리지 않는 ‘철선’을 명했다. 신하들이 당파싸움을 일으키면 감선을 했다. 그러면 신하들은 정쟁을 멈추고 왕의 눈치를 살폈다. 식재료는 전국 팔도에서 백성들이 진상한 것으로 채워졌다. 경기도의 햅쌀, 함경도의 미역, 충청도의 무, 강원도의 은어 등 각 지방의 제철 특산물들이었다. 정조는 전복을 상에 올리는 것을 금했다. 제주 해녀와 백성들이 한양까지 먼 거리를 이동하며 겪을 수고로움을 측은하게 여긴 탓이다.

왜곡된 궁중음식, 바로잡아야 할 한식문화
신분질서로 유지되었던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밥상차림법이 달랐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환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살펴보면, 신분이 높은 왕이나 귀족은 화려한 상차림을 받았다고 지레짐작하기 쉬운데, 이는 큰 오해이다. 화려한 궁중음식은 없다. 혜경궁홍씨는 밥, 국, 김치, 조치를 포함한 15첩반상을 받았다. 정조임금·청선군주·정연군주·내빈은 7첩반상을, 정3품 당상과 도총관에게는 밥과 국에 2종류의 찬이 제공되는 4첩반상을, 군대를 지원하는 기관의 장인 책응감관에게는 밥과 국만을 제공하는 2첩반상을, 목수와 와벽장 등 장인에게도 2첩반상을 제공했다. 밥상에도 신분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차림 구성, 상의 크기와 형태, 배선 방법과 위치, 찬품의 숫자와 구성 등 상차림 예규가 엄연히 존재했다. 이를 의궤에 꼼꼼히 기록했고, 의궤를 통해 우리는 당시 신분에 따른 밥상차림과 일상식까지도 살펴볼 수 있다.
궁중음식이 중요한 이유는 궁중음식이 우리 문화의 꽃이고, 당대 음식문화와 예법이 가장 체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한식문화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중음식의 정확한 규명과 연구는 한식문화와 전통의 복원을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다.
고문헌을 통해 살펴보면, 조선왕조 400년 동안 임금의 일상식은 가장 잘 차렸을 때가 밥, 국, 김치를 포함해 7기(7첩반상)를 넘지 않았다. 외국 사신 접대 또는 생일날에 받았던 가장 화려한 상차림도 7첩반상이었다.
이런 검소한 상차림은 신흥 양반 계층이 득세하면서 양반의 수가 인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맞아 흐트러진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대변하는 필사본이 바로 작자미상의 『시의전서』다. 『시의전서』에 따르면 밥, 국, 조치, 장류, 김치를 제외한 찬의 숫자에 따라 찬이 5종류이면 5첩반상, 찬이 7종류이면 7첩반상, 찬이 9종류이면 9첩반상이라 했다. 하지만 저자가 고문헌 『영접도감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 『진연의궤』를 해독한 바에 따르면, 장류만을 제외하고 밥, 국, 김치, 조치, 찬을 포함한 5기를 5첩반상, 7기를 7첩반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시의전서』 식 5첩반상, 7첩반상, 9첩반상을 올바로 바로잡으면 9첩반상, 12첩반상, 15첩반상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시의전서』 식 차림법을 계승하여 궁중음식의 권위자인 황혜성은 왕의 일상식이 12첩반상, 양반이 9첩반상을 차렸다고 국민들에게 보급하였지만, 고증 없이 기술된 잘못된 사실이다. 지금 통설이 된 9첩반상, 12첩반상을 고증을 통해 바로잡으면 18첩반상, 22첩반상에 해당한다. 왕의 일상식이 12첩반상(22첩반상)이라는 주장, 다시 말해 수라상이 장을 제외하고 무려 22첩이나 된다는 주장은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려고 했던 조선 왕의 통치철학을 부정하는 일과 같다.
왜곡된 밥상차림법은 학계와 외식산업, 그릇 제조 산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식이 찬의 가짓수가 많아야 미덕인 것처럼 오도됨으로써 호화로운 한정식으로 정착되는 근거를 제공했다. 음식 쓰레기 대량 배출국인 대한민국의 현실은 왜곡된 한식 상차림에서 연유한다. 화려한 한정식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해 검박한 생활을 영위했던 우리 선조들의 음식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시의전서』와 황혜성의 밥상차림을 규범으로 삼아 한식 밥상차림 규모를 기술한 모든 한식 관련서와 학생들의 교과서는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팔리고 있는 혼수용품인 7첩반상기, 9첩반상기도 바로잡아야 한다.
또한 저자가 원전 해독으로 고증한 바에 따르면, 황혜성이 여러 저서를 통해 보급한 궁중음식의 종류와 조리법에도 많은 오류가 존재한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황혜성이 궁중음식으로 소개한 골동면, 난면은 조선왕조 의궤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찬품이다. 『동국세시기』와 『시의전서』에 등장하는 민가음식이었던 골동면과 난면이 현대에 와서 궁중음식이 되어버렸다. 또한 냉면과 온면의 재료 구성에 약선음식과 거리가 먼 재료들인 오이, 실고추, 석이버섯, 식초, 겨자 등이 추가되어 화려하게 변형된 것은 바로잡아야 할 사실이다.
구절판과 겨자채를 궁중음식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민가에서 만들어 먹던 찬품명인 밀쌈별법을 이어받아 1940년 손정규가 『조선요리』에서 구절판이라는 찬품명으로 소개한 음식을 황혜성은 재료를 새로이 바꾸어 궁중음식 구절판으로 소개했다. 겨자채 또한 어떤 궁중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 음식이다. 왕실의 길경채가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겨자선’이라는 새로운 음식이 구한말 요릿집 메뉴에 등장하는데, 이는 서양 음식, 러시아 음식, 일본 음식, 중국 음식을 가미한, 당시 유행하던 음식으로서 잡채처럼 모든 재료를 볶아 겨자즙에 버무리는 것이다. 이후 다시 이 겨자선을 겨자채로 이름을 바꾸어 황혜성은 『이조궁정요리통고』에서 궁중음식으로 소개했다. 익히지 않은 생채소를 우유와 섞은 겨자에 버무린 1957년의 황혜성의 겨자채는, 다시 새롭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달걀지단이 추가되고 우유를 연유로 대체하는 변형을 거듭했다.
또한 조선왕조의 과자인 양면과가 변형된 『시의전서』의 매작과를 궁중음식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 각색볶음·화양적이라는 음식을 새로이 창조해 궁중음식으로 소개했다는 점, 약선을 중시하여 재료 선정에 신중을 기했던 궁중음식에서는 당근을 사용한 일이 없는데도 황혜성이 소개하는 궁중음식에는 당근 등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대표적인 오류이다.
이렇듯 통설이 된 궁중음식에 많은 오류가 등장하는 이유는 고문헌이나 원전을 신중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 구전이나 『시의전서』 같은 정통성 없는 조리서를 베끼고 참고한 탓이다. 황혜성이 소개한 궁중음식들은 많은 부분 재료나 조리법에 오류가 많은데도 많은 한식학계와 관련자들이 이를 의심 없이 수용하면서 오류가 계속 오류를 낳은 형국이 되었다. 이는 한식의 원형 발굴, 한식문화의 올바른 계승을 위해 바로잡아야 할 진실이다.
오늘날 한식 세계화, 한식의 계승과 발전을 도모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정작 한식에 숨어 있는 정신과 가치, 정확한 한식 조리법과 올바른 한식문화에 대한 연구는 충분하지 않다. 정통성 있는 한식을 만드는 사람도 없거니와 한식 연구도 걸음마 수준이다. 이제 한식이 진정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것부터 묻고 한식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구명하는 폭넓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랜 세월의 풍화를 견디며 5천 년 민족의 삶과 함께해온 한식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전통 한식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다면적인 이해를 통해 우리 한식문화를 정립해나가야 진정한 한식의 미래가 있다.

[책 속으로 추가]

사치스러운 일상식 7첩반상이 『시의전서』 식대로 하면 3첩반상에 불과하고 『시의전서』의 7첩반상은 『원행을묘정리의궤』 식대로 하면 12첩반상이 된다. 환갑을 맞은 혜경궁홍씨께 올린 15첩반상 수라상은 『시의전서』 식으로는 불과 6첩반상이 되니, 『시의전서』 차림법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지극히 사치스러운 『시의전서』 식 상차림법은 양반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70퍼센트를 차지했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만큼이나 흐트러지고 왜곡, 변질된 차림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의전서』 식 차림법이 정통성 있는 조선시대 밥상차림처럼 호도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황혜성은 『시의전서』 식 밥상차림법에 따라 3첩반상, 5첩반상, 7첩반상, 9첩반상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12첩반상이란 것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황혜성은 이를 임금님이 매일 잡수시는 일상식이라고 주장하였다. 황혜성의 12첩반상을 올바르게 적용하면 22첩반상으로서 실로 엄청난 차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조선왕조의 통치철학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최고의 약선음식을 들라면 단연 궁중음식이다. 우리의 음식문화에서 약선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은 궁중음식의 영향이다. 궁중음식은 곧 약선이라고 할 만큼 조선왕실은 약선을 중시했다. 따라서 약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궁중음식이 이해된다.
고려 충숙왕 17년(1330), 원나라에서는 홀사혜라는 어의가 『음선정요(飮膳正要)』라는 의서를 펴내면서 음식의 약선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고려왕실도 분명 이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고려왕실에서 먹던 약선 궁중음식은 그대로 전수되어 조선왕조 말까지 이어졌다. 그 증거는 많다. 1609년에서 1902년 사이에 간행된 조선왕조 연향의궤를 보면, 소의 내장과 고기를 넣고 끓여 만든 탕류 등이 고려시대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뿐만 아니라 『음선정요』에 기록된 식품의 약리적 효능과 성질이 허준의 『동의보감』(1613)에도 인용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증거이다. 음식을 단지 음식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질병에 대비하고 건강을 고려하여 약으로 먹는 연구는 조선왕조에서 더욱 발전했다.
한식의 정통성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한희순을 둘러싼 궁중음식의 전승 과정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옛 문헌에서 밝힌 궁중음식과 한희순이 전수했다고 하는 궁중음식은 많은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신선로, 잡채, 오이선, 겨자채 등 수많은 궁중음식이 의궤에서 제시된 것과 다르게 형태와 조리법이 왜곡되었다. 한희순은 자신이 “윤비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궁중음식을 보존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녀가 전수한 궁중음식이 정통 궁중음식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가 약하다. 자신이 한 말 외에 소주방 소속 상궁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 민족의 삶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린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궁중음식이 원형을 간직하기란 불가능했다. 궁중음식은 문화가 실종되는 시대상황 속에서 왜곡되고 변형되고 비틀어진다. 이렇게 왜곡된 궁중음식을 어떻게 바로 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증은커녕 문헌도 살피지 않고 흘러나오는 소리에 입각해 우리의 궁중음식 역사가 쓰였다.
학문적 사실의 왜곡. 이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진실은 영영 묻혀버리고 만다. 해방 이후 혼란한 상황은 지식과 권력을 독점하여 권세와 이익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역사는 늘 힘을 가진 사람들이 썼고, 학문적 성취도 권력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아직도 대한민국 학계는 이러한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차

여는 글
‘진지 잡수세요’에 담긴 한식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하여

1부
한식의 뿌리를 찾아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한식의 정신

우리 생활문화의 총화, 한식
한식에 깃든 문화적 가치와 역사성
우리 음식문화의 뿌리
식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에게 한식이란 무엇인가

김치와 장의 원류를 찾아서
동이인의 김치와 수수보리지
우리의 장문화, 동인장

음복문화에서 발달한 떡과 한과문화
신을 위한 음식, 떡
불교의 떡과 한과
조선왕실의 떡과 한과
민중의 떡과 한과

한식 밥상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한식의 기본, 탕반문화
한식 밥상의 뿌리는 『의례』의 「공식대부례」
우리의 밥상차림과 유사한 한대의 밥상차림
고구려인의 밥상차림
신분에 따라 다른 조선의 밥상차림
사치스러워진 『시의전서』의 밥상차림
『시의전서』 식 차림법을 계승한 황혜성의 밥상차림

한식의 정신, 음식지도와 약선
정성, 검소함, 공음공식과 함께하는 음식지도
약선으로 몸을 다스리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제사상차림의 정신
죽음은 곧 재생, 길례로서의 제사

한식문화의 정수, 조선왕실의 연향문화
사회 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연향의례
향례
연례
신께 올린 차와 과안, 찬안, 상화
신성한 공간을 위한 장식

2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한식, 한식문화
궁중음식에 대한 오해

궁중음식의 전승 과정을 밝혀야 하는 이유
궁중음식의 진정한 계승자는 누구인가
변질된 궁중음식, 왜곡된 밥상차림법

왜 『시의전서』의 7첩반상은 12첩반상인가
『시의전서』는 정사가 아니다
왜곡으로 가려진 전통 밥상차림법

비빔밥은 궁중음식이 아니다
새로이 창조된 황혜성 식 궁중비빔밥
비빔밥은 우리 민중의 다채로운 향토음식

변질된 궁중음식의 몇 가지 사례
궁중음식에는 골동면과 난면이 없다
구절판은 궁중음식이 아니다
겨자채라는 궁중음식은 없다
궁중의 매엽과가 매작과가 되다
신선로의 궁중용어는 신설로 또는 열구자탕
각색볶음이라는 궁중음식이 과연 있었을까
궁중음식 재료에는 당근이 없다

3부
한식에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가
한식 연구와 한식의 미래

식문화사를 새로 쓴 위대한 스승들
위대한 식품학자, 이성우 교수님
이시게 나오미치 교수님에게서 학문의 방법론을 배우다

뚜벅뚜벅 한식 연구의 길을 걷다
왕실 음식문화의 속살을 밝혀내다
민속적 관점에서 한식의 역사를 구명하다

연구자의 자세를 되돌아보다
내 필생의 연구, 조선왕조 연향의궤
표절과 왜곡, 잘못된 계승으로 취약해진 한식학

한식의 문화적 가치를 복원하기 위하여
한식의 세계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한식에 우리 전통문화의 가치를 담아야 한다

저자소개

저자 김상보는 한양대 가정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이회여대와 건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한양대 대학원에서 식품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8세 때 대전보건대학교 전통조리과 종신교수로 임용된 후 한국 식품학계의 거목 이성우 교수님의 부름을 받고 조선왕실의 궁중음식 연구에 매진하여 평생 궁중음식과 한식학의 지평을 여는 수많은 연구 업적을 일구었다. 2015년 퇴직 이후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 한식재단 한식정책 자문단, 서울시와 세종시의 문화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적인 식문화학자이자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 교수인 이시게 나오미치 박사의 초청으로 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 1년간 초빙교수를 지내면서 도지샤(同志社)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이시게 나오미치 교수를 필두로 한 세계 각국의 민속학자 아사쿠라 도시오. 구마쿠라 이사오, 스기타 시게하루, 코비 제인, 호스킹 리처드 등 일본, 중국, 미국학자들과 함께 ‘술과 음주문화’에 관한 공동연구를 수행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의례적 향연, 그 구조의 비교연구」라는 단독 논문을 학술논집 『술과음주문화()』(일본平凡社)에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왕실 연향 200년을 기록한 고문헌인 의궤 (1719~1902)를 장장 3년간 매달려 해독해냄으로써 각종 연회에 올랐던 찬품의 진실을 구명하였다. 이 연구 결과를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1995, 문화관광부 우수 학술도서 선정)와 『조선왕조궁중연회식의궤 음식의 실제』(1995)로 펴냈다,

저서로는 『음양오행사상으로 본 조선왕조의 제사음식문화』,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문화관광부 우수 학술도서 선정), 『조선후기 궁중연향 음식문화』(문화관광부 우수 학술도서 선정), 『조선왕조 궁중음식』, 『조선시대의 음식문화』(문화관광부 우수 학술도서 선정), 『상차림 문화』, 『우리 음식문화 이야기』(문화관광부 우수 학술도서 선정), 『사상으로 만나는 조선왕조음식문화』, 『화폭에 담긴 한식』, 『조선왕실의 풍정연향』 등 20여 권이 있고, 『어장과 식해의 연구』, 『원행을묘정리의궤』 「찬품」 등의 번역서와, 「동아시아 속의 한국의 음식생활문화」, 「한국의 반상에 대한 고찰」, 「조선통신사를 포함한 한일 관계에서의 음식문화 교류」, 「『제민요술』의 菹가 백제의 김치인가에 관한 가설의 접근적 연구」(과학기술우수논문상 수상), 「통일신라시대의 식생활문화」, 「절용의 미덕과 예를 갖춘 상차림 궁중연향음식」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도서소개

『한식의 도를 담다』는 평생 한식의 계보를 추적해온 한식학자 김상보의 음식 이야기다.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식문화사 흐름 속에서 한식의 정통성을 구명해온 학자의 올곧은 음식문화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식 연구를 위해 고대 동아시아 식문화사, 비교문화, 종교민속론, 재배학, 전파교류사까지 파고들며 한식의 기원과 변천사를 규명했다. 《주역》, 《의례》, 《제민요술》, 《고려사절요》, 《진연의궤》, 《진찬의궤》, 《조선만화》 등 한·중·일을 넘나드는 고문헌 연구가 그 토대가 되었다. 가장 빛나는 업적은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이두와 한문을 장장 3년간 해독하여 각종 연회에 올랐던 궁중 상차림의 진실을 밝혀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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