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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중음악사 산책

한국대중음악사 산책

  • 김형찬
  • |
  • 알마
  • |
  • 2015-09-28 출간
  • |
  • 568페이지
  • |
  • 215 X 257 X 50 mm /2013g
  • |
  • ISBN 9791185430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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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이 땅의 청춘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노래와 사건, 문화 공간, 그리고 특별한 음악인들

★★★★★ 대중음악 연구 20년의 결정판
★★★★★ 시원한 판형과 고급 아트지로 구현된 풀컬러 이미지
★★★★★ 해방 이후부터 1975년 대마초 파동까지 대중음악사 관련 자료 총망라
★★★★★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공연음반분과 심의위원 출신의 촌철살인 비평
★★★★★〈부산일보〉《샘터》《말》 등의 인기 칼럼니스트의 첫 단행본 작업
★★★★★ 소장가치를 한 단계 높여주는 본문 디자인 아트 워크art work
★★★★★ 국내 유명 음악평론가들의 상찬과 강력 추천

기획 의도

본격 한국대중음악 역사서의 탄생

그간 한국에 본격적인 ‘대중음악사’라 할 만한 작업이 있었던가? ‘외국’(주로 미국) 대중음악사의 번역이나, 특정한 주제 아래 한국대중음악사의 단면을 잘라 보여주는 작업은 비록 간헐적이긴 하지만 꾸준히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한국대중음악 통사 서술은 그 시도도 많지 않았고, 스타나 유행가 중심의 흥미성 서술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마저도 텍스트 위주인 경우가 많아 정작 당시의 실상을 놓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대중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음악이 삶의 심원한 매개가 되지 못하고 점점 한순간의 향락으로서 소비되는 경향은, 그간 한국사회가 대중음악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소홀히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대중음악사 산책》은 수십 년에 걸친 저자의 열정적 자료수집의 결과물로서, 한국대중음악의 한 괄목할 만한 시기를 고스란히 되살려놓은 역사서다. 해방 이후 근대 대중음악의 태동부터, 미군정기와 1950년대 전후 참상 속에서 이루어진 대중음악의 약진, 그리고 1960년대 청년문화세대의 폭발과 1970년대의 다채로운 양상들까지, 밀도 있고 입체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의 여정은 한국대중음악사의 거대한 전환점인 1975년 대마초 파동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지엽적인 역사적 팩트의 나열에 골몰하기보다는 각기의 결정적 장면들을 속도감 있게 스케치하여, 이 시기 대중음악의 큰 흐름을 한눈에 들어올 수 있게 했다. 또한 대중음악사 책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스타와 유행가 위주의 서술을 지양하고, 당대의 문화 인프라와 작곡가, 제작사 등에 관해 두루 짚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관련사진과 글자자료, 광고, 음반자켓 등을 방대하게 제시한다. 이는 한국의 그 어떤 연구자나 비평가도 본격적으로 시도하지 못했던 것으로, 저자는 당시의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화보집 등의 1차 자료들을 여러 해 동안 그야말로 “저인망식”으로 헤집으며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이로써 지금껏 거대한 공백으로 남아 있던 대중음악 관련 이미지 자료들이 대중음악 역사서에 당당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1960~1970년대 대중음악의 지도를 그리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30년이면 기억이 변한다. 이 책은 1960~1970년대 대중음악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를 그려, 세대 간의 가교가 되는 공통의 기억을 형성하려 한다.
전쟁 이후 한국사회는 미국식 시스템을 전격 도입하고, 근대화된 도시 설계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한국대중음악은 미국대중음악의 강한 영향권 아래에서 전개되고, 이른바 도시적인 음악과 향토적인 음악이 끊임없이 길항작용을 하며 한국대중음악의 틀을 잡아나간다. 이 책의 1부 ‘미국식 대중음악으로 전환하다’에서는 그 초창기의 다양한 풍경이 소개된다. 저자는 미8군 무대가 한국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한편, 근대화/도시화와 밀접하게 맞물리며 전개된 대중음악을 세심하게 톺아본다. 경쾌하고 밝은 느낌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작곡 손석우, 노래 한명숙)는 전후의 우울한 분위기에서 탈피한 도시화.근대화의 정서를 표현했고, 이미자는 해방 이후 최대의 대박인 《동백 아가씨》를 내놓으며 트로트의 근대화를 달성했다. 이런 토양 위에서 남진과 나훈아는 희대의 라이벌전을 연출했는데, 이들은 각기 도시 정서와 농촌 정서에 강하게 호소했다. 저자는 이 같은 1부의 큰 줄거리 아래, 샹송, 칸초네, 스탠더드팝 스타들의 내한공연과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신인가수 선발대회 등의 진풍경을 스케치한다.
2부에서는 새로운 청년문화세대의 등장과 그들이 즐긴 노래, 그리고 음악문화를 다룬다. 통기타음악과 신중현사단이 커다란 축으로 설정된다. 사실 오늘날 ‘통기타음악’이라고 통칭되는 것은 그 당시 결이 매우 다양했다. 조영남과 한대수는 전혀 다른 가수이며, 한대수와 김민기 역시 구분해 살펴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조영남은 TV 출연을 선점함으로써 통기타음악의 시대를 열어젖히긴 했지만 창법 면에서 완연한 통기타음악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트윈폴리오와 한대수에서 통기타음악은 비로소 그 전형을 갖추게 된다. 저자는 “비브라토 없이 깨끗하게 쭉 뻗는 목소리와 감정이 절제된 음색”의 트윈폴리오가 통기타음악의 시작이라고 보며, 한대수가 창작과 자세 면에서 더욱 진일보한 통기타음악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그후 김민기에 이르러 ‘창작’ 통기타음악의 꽃이 활짝 피어나게 된다.
한편, 이 당시 청년세대의 음악은 ‘록음악과 소울 사이키의 대부’ 신중현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미8군 무대의 기타 천재 신중현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미인》으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넘어서는 최대의 히트를 기록했다. 또한 부단히 사운드 실험을 하여 ‘소울 사이키’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했다. 펄시스터즈와 김추자를 연달아 대히트시키며 ‘히트 제조기’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것이다. 그 밖에 2부에서는 세시봉?심야 라디오 등 당시 청년세대가 열광한 문화의 여러 대목들이 풍부한 사진 기록과 함께 면밀히 다뤄진다.

희귀본 사진으로 생생하게 되살린 청년세대 음악문화
통기타음악인들과 신중현사단이 주류로 급부상한 이후, 청년세대의 문화는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의 철퇴를 맞게 된다. 3부 ‘주류 음악으로 부상한 청년세대’에서는 이 극적인 오르내림의 과정이 서술된다. 통기타음악과 록음악은 음악 페스티벌 개최로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바로 ‘강변가요제’의 전신인 ‘청평페스티벌’이 그것이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2007년부터 시작한 ‘무도 가요제’의 첫 공식 명칭인 ‘강변북로 가요제’는 잘 알려져 있듯이 ‘강변가요제’를 패러디한 것이다. 책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강변’이 행사의 콘셉트로 강조된 것이 청평페스티벌 특유의 ‘수중무대’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우드스탁페스티벌에 자극을 받아 음악전문가들이 한국의 첫 야외음악축제인 청평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이를 이어받은 MBC가 수중무대 형식에 착안해 ‘강변가요제’라 이름을 바꾸고, 다시 이 대표적인 방송사 공개방송을 패러디해 ‘차트 올 킬’의 무한도전가요제가 탄생한 것이다. 비록 페스티벌을 채우는 형식과 내용은 시기에 따라 상이한 모습이지만, 음악문화의 유구한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야외음악축제에서도 드러나듯, 청년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춤과 음악을 좀더 적극적으로 즐겼다. 이는 고고클럽과 나이트클럽, 그리고 음악살롱의 선풍적인 인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저자는 당시 번성한 이들 클럽의 풍경을 희소성 있는 사진자료들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마냥 조신한 신사숙녀들의 시대로 기억되는 1970년대는, 기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려한 춤판과 환각적인 음악문화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춤’ 역시 음악문화의 주요 요소로 중요하게 다룬다. 그 내용들을 패치워크해보면 오늘날 걸그룹의 섹시한 엉덩이춤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실험과 혁신의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스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의 이금희가 무대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노래를 부르는 ‘충격’에서 시작된 이 여정은, 김추자의 몸 전체를 유기적으로 사용하는 리드미컬한 춤사위, 그리고 여성 3인조 댄싱팀 와일드캐츠의 다양한 창작 고고춤에까지 이른다. 그것이 나이트클럽과 고고클럽에서 대중화의 계기를 맞고, 그후 1980~1990년대를 거쳐 오늘날의 한류 댄스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서 ‘반동’은 필연적이라고 했던가. 청년세대 음악문화의 호시절도 오래 가지 않았다. 1971년김대중을 간발의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이후 눈에 거슬리는 것에 대해 ‘단속’ 릴레이를 펼친다. 7월 26일 유흥업소 단속을 시작으로, 장발 단속(1971. 10. 1.), 퇴폐 다방 단속(1972. 2. 12.), 타락업소 일제 소탕령(1972. 2. 18.), 고고음악과 고고춤 금지령(1972. 10. 12.) 등이 내려졌다. 저자는 특히 국민의 신체에 대한 대표적인 규제인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에 한 챕터를 할애해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근대화와 도시화라는 과제 아래 수십 년을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대중음악은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크게 위축된다. 저자는 그것을 ‘분서갱유’에까지 비유하며 “박정희 군사정권과 청년문화세대의 만남은 최악의 궁합이었고, 단언컨대 한국사회 최대의 불행이었다”고 결론 짓는다. 이로써 《한국대중음악사 산책》은 그다음 시대의 역사 전개에 대한 짙은 여운을 남기며 흥망성쇠의 대서사를 마감한다.

책속으로 추가

블루벨스가 데뷔할 당시 주위에서는 “멀쩡한 사내 넷이 유행가를 합창하다니 말도 안 돼. 사내들이 군가나 명곡을 불러야지, 어떻게 합창으로 유행가를 부르냐” 하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블루벨스는 밝고 힘 있는 가창과 수려한 외모로 여성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여성 팬들의 환호는 대단하여 이들을 따라다니는 팬들이 존재했고, 넷 중에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것이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으로 유행했다. 1990년대의 H.O.T.처럼 멤버 각각의 이미지 차별화 전략이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_126쪽

1969년에 민방인 MBC-TV가 개국하면서 기존의 KBS와 신인가수 선발대회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KBS-TV는 1971년 6월부터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대회를 개최했다. (…) 이 대회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MBC-TV에서 1972년 4월에 ‘데뷔 스테이지’를 신설했다. (…) MBC가 맞불을 놓자마자, KBS는 승용차, 미국 왕복 항공권 등 파격적인 상품을 내걸고 가수만을 선발하는 프로그램인 ‘신인 무대’를 1972년 4월부터 신설했다._139쪽

당시 신인가수들은 음반을 취입할 때 지금처럼 자신의 곡만으로 독집을 만들지 않았다. 겨우 두 곡 정도를 받아 유명가수의 음반에 끼워넣거나, 여러 가수들의 노래를 모은 묶음 음반에 수록하는 형태였다. 이때 자신의 음반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음반의 전면이나 후면에 자신의 사진이 실리는 것이었다. 앞면에 타이틀곡으로 실릴 경우에는 15~20만 원(1971년 당시의 가격, 1970년 쌀 한 가마니에 1만 원), 뒷면 타이틀일 때는 10~15만 원 정도를 내야 가능했다. 비용 지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 음반이 방송을 타기 위해서는 직접 방송사를 돌며 홍보해야 했는데, 이때 홍보란 피디들에게 봉투를 돌리는 일이었다._144쪽

이난영과 남인수로 대표되는 이전까지의 트로트에는 감정이 절제되어 있었고, 창법에 민요조의 형태가 남아 있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억압적 분위기와 전통사회의 정서를 여전히 간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미국화?도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중들의 감수성은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 도시의 여성들에게 감정 절제는 더이상 미덕이 아니었고, 민요조의 발성은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감수성의 변화를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정확히 반영하여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즉, 이미자는 1960년대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던 트로트의 근대화를 달성했던 것이다._166쪽

윤복희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미니스커트의 충격은 정말 대단했다. 명동에서 최첨단 패션을 자랑하던 멋쟁이 아가씨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의를 안 입은 줄 알았다” “치마를 위로 걷어 올린 줄 알았다”라는 반응들에서 한국사회가 받은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3월 26일, 디자이너 박윤정이 윤복희를 내세워 미니스커트를 주제로 패션쇼를 벌이면서 한국사회는 미니스커트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_175~175쪽

갑자기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고 횡설수설하던 광적인 남성 팬이 깨진 소주병을 휘둘러 나훈아는 왼쪽 뺨을 70바늘이나 꿰매는 참변을 당했다. 1년 형을 살고 나온 그는 남진의 사주를 받아 범행을 저질렀다며 가요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폭탄 발언을 했고, 남진에게 고발당해 다시 1년 6개월 형을 살고 1975년 9월에 출소했다. 그는 계속 남진을 쫓아다니며 돈을 요구했고, 거절당하자 그해 11월 13일 부산 국도극장의 ‘스타의 밤’ 공연에 다시 나타나 꽃다발 속에 감추어둔 깨진 병으로 남진을 피습했으나 실패했다. 급기야 그는 1980년 목포에 있는 남진의 집에 불을 지르며 희대의 스토커로서 한국대중음악사에 이름을 올렸다._214쪽

남진을 좋아하는 팬들은 주로 도시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며, 나훈아를 좋아하는 팬들은 주로 농어촌에서 도시로 와서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진은 트로트를 넘어 엘비스를 모창하며 팝가수로서 이미지를 바꾸려 했지만, 나훈아는 꺾는 목을 강조하는 트로트 창법으로 일관한다. 따라서 방송에서도 이에 걸맞은 이미지로 연출했다. 남진이 나올 때는 화려한 의상과 세트로 세련된 도시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나훈아는 자연 속에서 작업복이나 평상복을 입고 소탈한 분위기로 노래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_220쪽

DISK 2 구린 것은 가라, 청년세대의 등장

세시봉에 젊은이들이 몰려든 근본 원인은 그들이 좋아하는 팝송을 방송에서 듣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수입 자유화가 안 되었던 시절이라 방송사도 외국의 음반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그마저도 성인들을 위주로 한 방송이 많아서 젊은 층이 선호하는 음반 구입에는 더욱 소극적이었다. 이때 한국에 출현하기 시작한 전문 음악인 출신 디제이들이 음악감상실을 꿰차고 앉아서 외국 음반 콘텐츠를 구비해 젊은이들을 모으고 있었다. 오히려 방송국에서 음반을 빌려갈 지경이었다. 이런 지경이니 음악 좀 듣는다는 젊은이들이 세시봉에 몰려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_229쪽

성악을 전공해 우렁찬 목소리로 컨트리와 팝송을 부른 조영남, 통기타로 오페라를 선보인 송창식, 한국대중음악 최초로 보이 소프라노의 음색을 들려준 윤형주, 멋진 영시 낭송으로 여성들을 까무러치게 한 이장희 등은 세시봉 출연 당시에는 아마추어였지만 이후에 한국 통기타음악의 중요한 1세대가 된다. 여기에서 만난 송창식과 윤형주가 1968년 한국 최초의 통기타 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하면서, 세시봉은 한국사회에서 통기타음악의 문을 연 장소가 되었다._230쪽
심야 디제이 프로그램 청취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문화로 떠올랐다. TV가 완전히 끝난 심야 시간대에 책상에 홀로 앉아서 전파의 세계 속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신청해서 듣거나, 출연한 젊은 스타들과 자신들의 발랄한 화법으로 화제를 공유한다는 것은 현재의 인터넷과 다름없는 젊은이들만의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이 과정에서 최동욱에 맞먹는 전문 디제이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사람이 MBC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했던 이종환이다. 그는 최동욱이 한국 실정에는 맞지 않은 미국의 차트에만 의존한다고 비판하며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다. 엘비스를 집중적으로 소개한다든지, 여성 청취자가 좋아할 만한 달콤한 스탠더드팝 종류를 선곡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청취자들을 확보해나갔다._242~243쪽

1969년은 한국의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 해다. 이해부터 시작된 플레이보이컵 쟁탈 보컬그룹 경연대회를 통해 변방의 음악이었던 록음악과 통기타음악이 청년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 시작했다. 또 ‘소울 사이키’라는 새로운 음악적 유행이 주류 음악계를 강타했다. 이러한 사실은 대중음악계의 지형도가 기성세대 음악 중심에서 ‘기성세대 음악과 청년세대 음악’이라는 대결 구도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악단 중심의 음악이 퇴조하고 소규모의 캄보밴드가 새로운 음악 형태로 부상했으며, 시내의 음악감상실을 중심으로 통기타음악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_284~285쪽

진행자인 곽규석이 ‘제25대 타잔’으로 소개했을 때, 조영남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웃통을 벗은 채 손에 칼을 쥐고 “복수에 불타는 마음만 가득 찼네”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대중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쇼쇼쇼>의 담당피디 조용호는 조영남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라성 같은 기성 가수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조영남을 매주 출연시켰다. 서울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1967년경부터 미8군 무대에 출연하며 학비를 벌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_291쪽

조영남의 창법은 힘차고 신선한 면은 있었지만 감정 과잉의 스탠더드팝과 같은 맥락에 있었다. 최영희의 창법도 주의 깊게 들어보면 기성 여가수들의 창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관점이고 당시의 대중들은 조영남과 최영희를 필두로 통기타가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인식할 만했다. 조영남과 최영희를 현재의 관점에서 본격 통기타가수라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의 등장으로 통기타가수들이 주류 음악계에 서게 되는 변화가 일었음은 자명하다고 하겠다._297쪽

트윈폴리오는 그동안 밴드마스터와 작곡가의 손에 묶여 있던 대중음악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했다. 통기타 반주와 번안을 통해 주도권을 획득한 것이다. 또한 기성 가수들이 팝송을 감정 과잉 상태로 불렀던 것에 비해, 이들은 당시의 도시적인 젊은이들이 원하던 세련되고 절제된 창법으로 노래하여 ‘감수성의 근대화’를 이룩했다. 트윈폴리오는 세시봉과 TV에서 정기적인 무대를 가졌고, 그들을 지지하는 열렬한 팬들이 존재했으며, 한대수보다도 1년 앞서서 1968년에 단독 공연을 가졌고, 1969년 6월 독집음반까지 제작했다. 요컨대 그들은 대중, 매체, 음반 모든 면에서 한국 통기타음악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다._313쪽

한대수의 음악은 그때까지 한국사회의 대중음악과는 완전히 개념을 달리하는 음악이었다. 깜깜하게 불이 꺼진 가운데 향 연기가 퍼지고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공연이 시작된다. 이어 울부짖는 톱 연주와 기괴한 보컬로 청중들을 환각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그는 시청각을 동원한 음악적 퍼포먼스를 통해 음악은 단순히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기존의 관행을 무너뜨렸다. 또 자신의 자유주의적 메시지를 자작곡에 담아냄으로써 기껏 팝송을 번안해 부르며 폼 잡고 있던 한국의 통기타음악가들에게 ‘한 방 먹였다’._331~334쪽

고민 끝에 신중현은 모든 것을 접고 베트남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활동하다 보면 해외시장으로 나갈 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으로, 미8군 군납업체 ‘화양’과 계약한 후 출국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 12월경이었다. 신중현은 미8군 무대에서 만난 드러머를 아내로 맞고 연세대 입구에서 살림을 차렸다. 돌이 갓 지난 신대철을 사이에 두고 잠을 자고 있던 어느 날 새벽,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킹레코드사 사장 박성배가 흥분하여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신중현이 마지막으로 제작한 펄시스터즈의 음반이 대박을 터뜨렸다고 전하며, 자기가 화양의 계약금까지 변상해줄 테니 펄시스터즈 2집을 만들자고 했다. 실로 한국대중음악사의 중요한 순간이었다._358~359쪽

등장한 지 1년 만에 가요계의 판도를 바꿔버린 펄시스터즈는 ‘소울 사이키’라는 새로운 미국 지향적 음악 경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련되고 정교한 댄스는 1980년대 김완선으로 시작되는 댄스음악 계보의 맨 앞자리에 펄시스터즈를 자리 잡게 했다. 무엇보다 봄날을 만난 사람은 신중현이었다. 그는 록밴드의 거듭된 실패를 접고, 이후 소울 사이키의 대부로서 신중현사단이라는 막강한 히트 제조기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동안의 실패를 거울 삼아 대중적 코드를 파악한 신중현은 이때부터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_365쪽

무엇보다 압권은 김추자의 독특한 춤이었다. 당시 미8군 무대에서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쇼무대를 모방한 정도의 춤이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일반 무대에서는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움직이거나 손동작을 조금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김추자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몸 전체가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춤이었다. 예를 들어 엉덩이를 움직이면 몸 전체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데, 여기서 어깨를 한 번 튕겨주어 몸 전체가 더욱 출렁이게 하는 식이었다. 이런 춤은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다양한 손동작을 보여주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간첩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어처구니없는 오해까지 받게 된다._374~375쪽

쇼를 나흘 앞둔 12월 5일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김추자의 매니저 소윤석은 국가대표 아마추어 레슬러 출신으로 신중현사단에 가수로 들어왔다가 김추자의 데뷔 음반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는데, 김추자와 애인관계로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김추자의 집안에서는 소윤석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징계까지 받게 되자 김추자에게서 소윤석을 떼어놓으려 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소윤석은 김추자를 만나러 와서 소주병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어 수백 바늘을 꿰매게 하는 상처를 입혔다._379~380쪽

클리프 리처드의 공연 날짜가 다가오자 초조해진 쪽은 서울의 여고들이었다. 많은 여고들은 비상을 걸어 클리프가 도착하는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중간고사를 보게 했고, 몇몇 학교는 학생지도부 교사를 공항까지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전교생이 클리프의 팬이다시피 한 정신여고에서는 교내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저녁 늦게까지 학생들을 교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 뜨거운 피가 끓는 청춘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_409쪽


DISK 3 주류 음악으로 부상한 청년세대

김민기가 창작곡을 부르게 된 경위를 당시 TBC-TV 피디였던 이백천은 이렇게 증언한다. “한번은 내가 청개구리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김민기가 불쑥 ‘영어 좀 쓰지 않으면 안 되나’라고 타박을 주어 무안해서 내 얼굴이 벌게진 적이 있었다. 다음 주에 김민기가 와서 밥 딜런의 <돈 싱크 투와이스 이츠 올 라이트>를 부르길래 ‘영어 노래 말고는 없을까’라고 응수했는데 그 이후에 김민기가 창작곡을 부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CBS라디오에서 <영 840>이라는 젊은이 취향의 음악신청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최경식도 1970년 청개구리에서 김민기의 창작곡을 듣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노래에 놀라서 다음 날 김민기를 방송국으로 초대해 <아침 이슬>을 녹음했다. 이를 방송한 결과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이 일었다고 최경식은 회상한다._426쪽

서울YWCA의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세시봉의 폐관으로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젊은이들과 통기타가수들을 불러 모았다. 방의경, 김민기, 김광휘, 임문일(CBS 디제이),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서유석, 투코리언스, 쉐그린, 라나에로스포 등이 때때로 들러서 청중들과 같이 호흡했다. 특히 외국 팝송을 그대로 부르던 단계에서 벗어나, 가사를 한국어로 번안해 부르거나 스스로 노래를 창작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_443쪽

1971년 8월 17~22일 엿새 동안 서울 근교 청평의 안전유원지에서 제1회 청평페스티벌이 열렸다. (…) 청량리에서 버스나 경춘선 열차를 타고 두 시간쯤 가면 경기도 가평군의 청평역에 도착하는데, 청평리마을을 돌아 흐르는 조정천을 따라 안전?송포?산장?호반 등 네 개의 유원지가 펼쳐진다. 특히 안전유원지는 최대 규모의 자연 풀장으로 3만 평에 1만 5000명을 능히 수용할 수 있어서, 여름철이면 1만 명 정도가 몰려들 만큼 휴양지로 인기가 높았다. (…) 바로 이곳에 2만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촌동네를 발
칵 뒤집어놓으며 지역경찰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_456~457쪽

고고의 인기가 무르익은 1971년, 젊은 고고족들은 어떻게 하루저녁을 보냈을까? (…) 중요한 것은 춤과 부킹이다. 남자들끼리 춤을 추다가 이곳저곳 적당한 여성들에게 추근대본다. 번번이 거절당하고 여의치 않으면 나이트클럽 바깥으로 파트너 물색에 나선다. 이때 웨이터가 손바닥에 확인 도장을 찍어준다. 그러나 밤 12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시간에 쫓겨 다시 나이트클럽으로 돌아온다. 밤 12시가 가까워오면 영업이 끝난 바걸과 역시 짝을 못 구한 여자 선수 고고족들이 남으면서 물이 점점 더 좋아진다. 그들과 적당히 눈을 맞추고 자정 이후 선수들끼리 본 게임, 화려한 춤판을 벌인다._478쪽

오비스캐빈의 원조는 ‘심지’라는 다방이었다. 이 다방은 명동 유흥업계의 큰손 이지재가 경영하던 곳이었는데, 처음에는 다방의 반을 나누어 오비스캐빈을 개업했으나 대박의 기운을 감지한 주인이 다방을 없애고 내친김에 4층까지 업소를 확대해 코스모스살롱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록과 통기타음악의 열기를 업소의 성공으로 연결시키는 수완을 발휘한다. 코스모스살롱은 층별로 각각 다른 라이브를 들을 수 있는 종합 라이브 업소였다. 지하의 ‘파라솔’은 커피와 스낵을 팔았고, 1층의 ‘오비스캐빈’은 조용한 피아노 반주에 솔로가수들의 스탠더드팝을 감상하며 식사를 하는 경양식 그릴이었다. 2층 ‘코스모스살롱’은 생맥주에 통기타가수들의 노래를 듣는 곳이었고, 3층 ‘코스모스룸’은 맥주를 마시며 그룹사운드의 라이브를 감상하는 곳이었다._496쪽

경찰관들이 자를 들고 시내를 다니며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을 불러 허벅지에 자를 대고 단속 기준인 15센티미터 초과 여부를 측정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퇴폐문화를 척결하겠다는 국가의 남성 경찰들이 지나가는 여성의 하체로 몸을 구부리고 허벅지에 자를 들이대는 장면이야말로 공공장소에서 음란행위를 공공연히 행하는 역설이 아닌가! 그러나 종신집권에 마음을 뺏긴 군사정권은 남의 눈 안의 티끌은 보여도 자기 눈 안의 대들보는 볼 줄 모르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_518쪽

신중현이 검찰에 잡힌 것은 3일 하오였다. 단속반원들은 신중현의 부인으로부터 남편이 대마초를 피우는 것을 봤다는 자술서를 받아내고, 수챗구멍에서 대마초 1그램을 찾아낸 후 그를 연행했다. 김추자의 집에 단속반원이 나타난 것은 4일 아침이었다. 김추자는 처음에는 대마초를 본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어머니 방 다락에서 대마초가 나오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한 번만 눈감아달라고 단속반원들을 붙잡고 늘어졌다._528쪽

졸지에 생계 터전을 잃어버린 연예인들은 물 밖의 고기 꼴이 되어 살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김추자는 한동안 고향인 춘천으로 내려갔고, 신중현은 악기를 팔고 낚시로 소일했으며, 김정호는 자택에서 작곡 공부에 몰두했다. 이현은 국술원에서 무예를 다졌으며, 이태원은 팝스 동인 야구팀에서 운동으로 소일했고, 김세환은 아버지의 자가용 운전사 노릇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그 와중에 다른 길을 모색한 사람도 있었다. 이장희는 광화문에 반도패션 지점을 개설했으며, 장현은 부산의 대아관광호텔나이트클럽의 영업 상무로 전직했다. 윤형주와 김도향은 ‘서울오디오’란 CM송 제작회사를 차려서 이후 한국 CM송의 거물로 등장한다. 이수미는 생리대 제조회사에 입사해 백화점 판촉 사원이 되어 이목을 끌기도 했다._535쪽

만약 4?19혁명의 성과를 계승하는 민주적인 정부가 제대로 들어섰다면, 그래서 청년문화가 탄압받지 않고 활짝 꽃피었다면, 한국의 1970년대도 미국의 1960년대 못지않은 대중문화의 황금기 아니었을까? (…) 신중현이 지미 헨드릭스가 되고, 김추자가 마돈나가 되고, 김민기가 밥 딜런이 되고, 김정호?백순진?송창식이 세계적인 작곡가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한국사회의 미숙함으로 날려버린 셈이다. 단순히 금액으로 셈하더라도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기회를 일찍이 포기한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잘할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_537쪽

목차

프롤로그_한국대중음악사라는 미개척지를 만나다

Disk 1 미국식 대중음악으로 전환하다
Track 1. 기름 짜는 기계로 음반을 제작하다
Track 2. 한국 대중음악의 요람, 미8군 무대
Track 3. 원조 음악의 황홀한 경험, 내한공연
Track 4. 한국형 팝을 제시한 작곡가 손석우
Track 5. 뜨겁고 날것이 난무하는 곳, 극장쇼 무대
Track 6. 솔로에서 떼창으로, 보컬그룹의 탄생
Track 7. 스타에서 패가망신까지, 멀고도 험난한 신인가수의 길
Track 8. 트로트의 근대화로 자신의 시대를 맞이한 이미자
Track 9. 국제적 스타로 돌아온 윤복희가 던진 문화적 충격
Track 10. 환호에서 숭배로 격상된 차중락과 배호
Track 11. ‘도시 대 농촌’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전

Disk 2 구린 것은 가라, 청년세대의 등장
Track 1. 한국 통기타음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Track 2. 청년들의 밤의 해방구 ‘심야 음악 프로’ 그리고 교주 디제이
Track 3. 클럽문화의 원조, 음악감상실 세시봉
Track 4. 악단에서 밴드로, 경음악 경연대회와 젊음의 대제전
Track 5. 새로운 청춘스타의 등장, 조영남과 최영희
Track 6. 청년문화세대가 원했던 바로 그것, 트윈폴리오
Track 7. 너무 일찍 나타난 자유인 한대수
Track 8. 신중현의 밴드 결성 삽질기
Track 9. TV형 가수 펄시스터즈의 등장
Track 10. 김추자의 섹시코드로 총각들 넋이 나가다
Track 11. 한국 록밴드의 군웅할거 ‘보컬그룹 경연대회’
Track 12. 클리프 리처드 내한공연으로 어른들 뚜껑 열리다

Disk 3 주류 음악으로 부상한 청년세대
Track 1. 김민기, 한국 통기타음악의 자아를 만들다
Track 2. 통기타음악 창작의 산실 ‘청개구리’
Track 3. 한국의 우드스탁 ‘청평페스티벌’
Track 4. 고고 선풍과 나이트클럽의 하룻밤
Track 5. 새로운 것은 모두 여기에, 음악살롱의 등장
Track 6. 머리와 치마 길이를 국가가 관리하다
Track 7. 유신정권의 분서갱유, 대마초 파동

에필로그_폐허 위에 피어난 새싹들

저자소개

저자 김형찬은 대중음악평론계의 실력자로서, 그간 치밀한 자료에 바탕을 둔 견고하고 실증적인 평론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텍스트와 이미지를 아우르는 그의 자료 수집 열정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부산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하던 중에 ‘뭉게구름’이라는 6인조 통기타그룹을 결성해 활동하게 된다. 결국 공대를 그만두고 음악학 쪽으로 진로를 바꾸어, 1997년 부산대학교 음악학과(작곡 전공)를 졸업하고 200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 논문 《한국 초기 통기타음악의 사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졸업논문을 쓰면서 자료의 중요성에 눈을 떠 졸업 이후에도 도서관을 다니면서 집중적으로 자료를 수집했다. 그후 명지대·상지대 등에서 한국대중음악사를 강의했으며, 《부산일보》를 비롯해 《샘터》 《말》 등의 여러 매체에서 흥미진진한 대중음악 이야기를 연재했다. 또한 MBC와 KBS, EBS 등의 다큐 프로그램에도 여러 차례 출연해 대중음악평론가로서 도움말을 주기도 했다. 특히 영상물등급위원회 공연음반분과에서 심의위원을 지내면서(2003~2005년) 한국대중음악에 대한 검열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또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는데(2005~2007년), 이때 공정하고 권위 있는 시상식으로 만들어간 일은 보람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10년에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음악 저술을 하고 있으며, 대중음악 저술가로 평생을 살면서 한국대중음악 출판을 혁신하고 권위 있는 저서를 많이 남기는 것이 목표다. 정기적으로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에서 통기타와 우크렐레 시민강좌를 열며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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