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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러 1-1

실러 1-1

  • 페터 안드레 알트
  • |
  • 아카넷
  • |
  • 2015-08-10 출간
  • |
  • 736페이지
  • |
  • 152 X 214 X 40 mm
  • |
  • ISBN 978895733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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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 책 소개

실러 사망 200주기에 간행된 기념비적 전기
시대의 광범위한 고찰 가운데 복원한 실러의 생애 그리고 작품


이 책은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생애와 작품을 그가 살았던 시대의 광범위한 사회사적·문화사적 연관 속에서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저자는 실러의 문학작품에 대한 해설을 중심에 두면서 실러의 정신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해명하는 데 중점을 둔다. 또한 실러가 살면서 맺은 우정 어린 친구들, 생애의 여인들, 문학의 적수들, 독일 제후들과의 관계를 눈앞에 펼쳐놓으면서 가장 낮은 처지에서부터 삶의 절정의 순간까지 한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실러의 삶을 복원하고 있다.

1권에서는 실러가 태어난 1759년부터 프랑스 혁명기까지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다. 젊은 작가 실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18세기의 문화적·정치적 풍경을 조명하면서 영주 카를 오이겐이 세운 군사 학교 카를스슐레의 규범 안에서 습득한 교양과 지식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인간의 영혼에 대해 연구한 의학도이자 인류학도, 권위주의적인 국가와 그 사회의 불평등을 없애려는 열정을 지닌 시인, 큰 성공과 좌절을 맛본 만하임 극장의 희곡작가, 문학 서적시장의 형성기에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뛰어든 출판인이자 소설가의 모습이 차례로 소개된다. 또 역사 서술가로서 실러와 장차 새로운 모습의 유럽을 만들어낸 프랑스 혁명에 대한 스케치로 끝을 맺는다.
2권에서는 1791년부터 실러가 사망한 해인 1805년까지의 기간을 다룬다. 이 기간에 실러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독일을 대표하는 고전주의 작가로 거듭난다. ‘숭고함’의 이론으로 완성되는 그의 미학 이론 연구와 그것이 프랑스 혁명의 언저리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을 정신적으로 소화하는 데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분석한다. 실러의 일생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괴테와의 동지적 관계, 《호렌》으로 대표되는 잡지 발간 프로젝트, 슐레겔 형제 등 젊은 세대 낭만주의 작가들과의 갈등은 독일 문학의 황금기를 일구어가는 역사의 현장으로서 세밀하게 다루어진다. 이념시에서 담시에 이르는 다양한 형식의 시 작품들도 자세하게 소개한다. 책의 말미에는 바이마르 궁정 극장에서 편 실러의 연극 활동과 1796년 이래로 「발렌슈타인」 3부작에서 「빌헬름 텔」에 이르기까지 빠른 속도로 완성된 대작 역사극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실러』의 출간은 ‘내셔널판(National Ausgabe)’ 실러 전집의 업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은이 페터 안드레 알트는 베를린자유대학 총장이자 실러 문학의 권위자로서 내셔날판 전집의 ‘독보적’ 성과에 힘입어 방대한 자료와 전거를 활용하여 실러의 삶을 그려내고 있으며, 학술적 의의를 갖는 전기 작업으로는 폰 비제(Benno von Wiese) 이후에 40년 만의 작품이자 지금 세대의 연구를 총괄하여 반영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 헬무트 코프만 교수가 “지금까지 나온 실러 연구 문헌들을 모두 파지(破紙)로 만든 대작”이라고 한 파격적인 평가를 단순히 수사로만 돌릴 수는 없는 까닭이다.

초창기 ‘전업’ 작가로서의 삶과 글쓰기
대중성 겸비한 전 방위 작품 활동


실러는 문호 괴테와 함께 독일 문학에서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견인한 작가이다. 「돈 카를로스」, 「메리 스튜어트」, 「빌헬름 텔」 등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희곡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의 노랫말로 쓰인 송가 「환희에 부쳐(An die Freude)」를 비롯하여 수백 편이 넘는 시를 발표한 시인으로도 우리에게는 친숙한 인물이다.(「이비쿠스의 두루미」라는 시는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필독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30년전쟁사』, 『스페인 정부에 대한 네덜란드 연합국의 배반 역사』 등의 역사서를 저술하고 강의한 역사가이자 칸트의 세계시민 이념의 영향 아래 미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가를 올린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한 편지」 등을 집필한 이론가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분석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 책에서는 다방면의 실러 작품이 장을 달리하며 집중적으로 소개된다.
실러는 후원자의 지원에 의존할 필요 없이 전적으로 문학작품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최초의 문필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전업’ 작가로서 실러의 삶이 가능했던 것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독일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전파된 독서 문화와 문맹 퇴치, 그리고 그와 맞물려 문학서적 시장이 확대된 데 따른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소설 장르가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였으며 여성 독자의 관심을 반영한 서정적 장르가 부상하였다. 실러는 확장되어가는 독서계와 출판계의 지형을 재빨리 파악하고 현실감각을 가지고 정력적으로 자신의 명성을 쌓아갔다. 문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와 접촉하면서 사회적 관계망을 구축하였고 《탈리아》, 《호렌》 등 잡지 발간을 통해 문학 담론을 형성하여 자신의 예술가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이용했다. 실러는 이들 잡지에 시와 희곡은 물론, 소설·서평·논문을 발표하여 자신의 미학적 규범을 알리는 동시에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하는 집필 전략을 발전시켜나갔다.
부상하는 출판업자들의 도움도 크게 받았다. 「돈 카를로스」와 《탈리아》를 발간한 라이프치히의 괴셴, 역사학 저술과 산문집을 발간한 크루시우스, 그리고 당시에 가장 저명한 “출판기업가” 코타. 이들은 실러의 글이 효과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데 유리한 조건들을 제시해주었으며, 실러 또한 이들의 사업에 보탬이 되었다.(1790년 독일의 역사와 통계 자료를 실은 최초의 달력을 고안하여 괴셴 출판사의 재정적 난관을 타계하는 데 도움을 준 이가 실러였다.)
그러나 작품에서 벌어들이는 고료와 인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일은 오늘날에서도 그렇지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희곡 「도적 떼」의 성공으로 이름을 알린 이후에도 실러는 후원자의 지원을 받거나 출판업자나 친우들로부터 빚을 얻어 생활을 이어갔지만, 코타 출판사와의 계약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제국 탈러화로 인세를 지급하는 계약을 주장한다든가 생애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인세 계약을 맺음으로써 가족의 생계를 끝까지 챙기는 등 자금 운영의 능력을 과시하여 전업 작가로서 현실적인 문제에도 해결 능력을 보여준다.

슈투트가르트, 만하임, 드레스덴, 바이마르. 방황의 길
궁한 처지에서 찾아오는 구원의 손길


실러는 작품 활동이 가능한 환경을 찾아서 방황과 정착을 거듭하는 삶을 살았다. 뷔르템베르크의 의무관으로서 복무하다가 작품 활동 금지 조치를 피해 만하임으로 탈영한 이후 방황의 길은 줄곧 지속되었다.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실러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면 뜻밖의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후원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실러가 슈투트가르트에서 만하임으로 이주한 배경에는 1782년 첫 희곡 작품 「도적 떼」 상연을 관람하기 위해 근무지 이탈을 감행한 것과 그 작품의 대사 일부가 불러일으킨 문제로 인해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을 금지당하는 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만하임에서도 정착은 그리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만하임 극장의 극작가로서 지위를 얻게 되지만, 단원들과의 갈등, 인색한 인세에서 오는 경제적 압박 등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 구원자로 나서는 이들이 드레스덴 종교국 위원 쾨르너와 슈토크 자매, 번역가이자 출판인이던 루트비히 페르디난트다. 이들은 작가 실러의 열광적인 숭배자들이었으며, 일생 동안 친구이자 후원자 역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의 도움으로 실러는 1785년부터 드레스덴으로 가서 「돈 카를로스」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는 데 필요한 정신적 자극과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실러가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기수로 발돋움 하는 기회는 독일 문학의 메카인 바이마르로 떠난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그곳의 영주 카를 아우구스트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속셈에서 여행길에 오른 것이었지만, 영주는 도읍지를 떠나 프로이센으로 떠난 뒤였고, 그의 추밀 고문관이던 괴테도 이탈리아에 있었으니 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바이마르 사회에서 정신적 지도자 구실을 하던 빌란트(Christoph Martin Wieland)와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의 도움을 얻어 그곳에 정착함으로써 나중에는 예나대학의 부교수에 부임하고 괴테와의 동지적 우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나대학에서 역사학 강의를 하던 시절에도 위기는 찾아왔다. 등록금 수입에 생활을 의존하던 그에게 수강생 수의 급감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곧장 이어졌다. 영주가 지급하던 봉급 개념의 200탈러로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의 마지막까지 시달린 병마가 닥쳐온 탓에 생활의 어려움은 배가 됐다. 이때 그의 후원자로 자처한 인물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지금의 덴마크)의 왕세자다. 그가 3년에 걸쳐 거액의 연구비를 제안한 것이다. (실러는 1793년 프랑스 혁명에 관한 일련의 서한을 자신의 재정적 후원자에게 보내는데, 이 편지들은 나중에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한 편지」의 기초가 된다.)
저자 알트는 실러가 관계를 맺는 이들 인물의 면면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실러의 사상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만들어지는 사회의 분위기는 어떠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실러가 정착한 바이마르 사회를 소개하는 내용에서도 확인되듯이, 실러와 함께 공동 잡지 발행 등을 계획하던 빌란트, 바이마르의 성직자이자 출판인이던 헤르더, 추밀 고문관이자 궁정극장의 책임자인 괴테 등이 당대의 칸트 철학과 미학 수용, 프랑스 혁명에 대한 평가 등 지식인 사회의 담론을 두고 각자가 어떠한 견해를 피력했으며 서로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구체화하여 고전주의를 꽃피우던 바이마르의 지적 분위기를 그려내는 데 이르는 것이다.
“전 생애에서 가장 고마운 사건”
괴테와의 만남이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찬란한 결실을 맺다.


그중에서도 괴테와 맺은 실러의 인연은 바이마르 고전주의 문학을 꽃피게 한 원동력이었다. 1789년 2월 괴테는 실러가 예나대학의 부교수로 초빙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1794년 7월 예나에서 열린 자연과학협회 총회에서 만나 긴 대화를 나눈 이후로 그 둘의 관계는 평생에 둘도 없는 우정으로 발전한다. 집필 과제에 대한 의견 교환, 공동 집필 계획의 수립, 공동 잡지 발행 모색, 그리고 특히 1796년부터 바이마르 궁정 극장의 공동 운영을 하는 데까지 이른다. (실러와 괴테가 1794년 여름부터 1799년 12월까지 1,000통에 가까운 편지들을 주고받았다!) 이들의 관계는 상대방의 예술가적 재능과 업적에 대한 상호간의 존경과 상이한 가치 평가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 한 우정의 전범으로 평가받는다.
『실러』에서는 이 둘이 공동으로 작업한 「크세니엔」(《문학연감》)과 바이마르 궁정 극장에서 상연한 「발렌슈타인」 3부작의 소개에서 둘 사이 우정의 모습이 집중적으로 그려진다. 「발렌슈타인」은 구상부터 완성까지 7~8년이 걸린 대작일 뿐만 아니라 실러에게 국민작가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성공작이기도 하다. 작품이 30년전쟁기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방대한 소재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실러에게는 큰 숙제였는데, 3부작으로 극을 나누라는 결정적 조언을 한 이가 바로 괴테였다. 「크세니엔」은 일종의 풍자시다. 마르티알리스(기원후 40~104년)가 지은 고대 그리스 이행시를 본떠 실러와 괴테가 공동으로 작성한 2행의 경구들을 모은 것이다. 첫 구상은 실러가 발간하는 문학잡지 《호렌》에 대한 비평가들의 못마땅한 평가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계기로 문학 현장의 개별 인물이나 작품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나중에는 철학적 문제나 사회적 관행들을 조금 무딘 방식으로 조명하는 내용으로 확장되었다(「부드러운 크세니엔(Tabullae votivae)」). 이러한 작품의 탄생 배경에서 미루어볼 때 괴테와 실러가 이루었던 관계가 문단에서 하나의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괴테와 실러는 사고방식에서나 작업방식에서나 서로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실제로 광학, 식물학 분야에서 실험 연구를 하던 괴테는 경험론자에 가까웠으며, 칸트 이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실러는 선험철학으로 훈련된 두뇌의 소유자였다. 작품에서도 실러는 이상적 타입의 인물이 벌이는 갈등을 선호하는 반면, 괴테는 인물의 다의적인 모호함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지적 자질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관계로 발전한 까닭에 이 둘의 관계를 규정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어왔다. 저자는 괴테의 빼어난 지적 능력을 모범으로 삼으려는 실러의 지적 동기로 이 둘의 관계를 규정하려는 세간의 평가를 두고 두 작가의 문학 활동을 촉진해준 “경쟁 상황”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경쟁적인 구도 속에서 작품 구상과 기획 등을 서로 교환함으로써 문학에서 찬란한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심리 분석에 능했던 근대적 작가 실러와 탁월한 범죄소설 「파렴치범」

『실러』는 당대의 사회 경제 문화 상황에 대한 방대한 사료들의 치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료를 굳건히 딛고 선 상상력을 동원하여 실러 삶의 숨은 조각들을 복원한다. 예를 들어 실러의 인격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저자는 임의로 조작될 가능성이 다분한 외적 데이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파악 가능한 실러의 사제 관계, 독서 경험과 여기서 비롯된 취향, 모범, 이상형 등을 면밀히 좇아간다. 실러가 읽거나 배운 문학가와 철학가들, 이를테면 겔러르트, 클롭슈토크, 뷔르거, 위대의 세기의 프랑스 작가들, 레싱, 흄, 루소, 헤르더, 아벨 등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유년기 실러의 지적 형성을 밝혀내는 식이다.
이렇게 복원된 실러의 삶과 문학에서 저자 알트가 강조하는 것은 심리적 분석에 능했던 근대적 작가로서의 실러이자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한 의식을 지닌 실러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할 때 우선 실러가 남긴 소설 작품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러는 소설가를 시인의 “이복동생”으로 불렀을 만큼 소설을 자신의 문학 활동에서 부산물로 여겼으며 예술적 완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러가 남긴 소설이 미래 세대의 작가들이 본을 받게 되는 선구적 업적이었다는 새로운 평가를 이 전기는 내리고 있다. 실러는 당시 뷔르템베르크에서 악명 높았던 범죄자 프리드리히 슈반의 생애를 다룬 소설 「파렴치범」(1786)을 써내었는데, 이것은 실러가 카를스슐레에서 배운 의학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범죄자가 벌이는 일탈 행동을 정신병리학적 요인들과 연결짓는다는 점에서 인물에 대한 심리 분석이 강조되는 범죄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소설 작품들(「운명의 장난」, 「강신술사(미완성)」)은 후일 낭만주의 작가(E.T.A. 호프만 등)에 큰 영향을 끼치는 한편, 새로운 이야기에 목말라하던 독자들에게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제공함으로써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실러가 대중의 관심과 출판 시장의 요구에 민감한 작가였으며 이러한 범죄소설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칸트의 세계시민 이념의 구현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한 편지」

프랑스 혁명의 발발과 진행이 유럽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은 당시 사회를 규정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독일 지식인 사회도 이웃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의 기운에 무감할 수 없었다. 실러 또한 혁명의 진행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며 정기 구독하는 프랑스의 시사 잡지를 통하거나 파리에서 직접 혁명 과정을 지켜본 훔볼트를 비롯한 지인들을 통해서 정보를 자세히 얻고 있었다. 혁명에 대한 실러의 입장은 초기에는 긍정적인 편에 서 있었지만, 1792년 12월 프랑스 국왕(루이 16세)에 대한 심판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회의적입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 입장은 단호하기까지 한 것이어서 실러는 직접 파리로 가 루이 16세를 옹호하는 연설문을 낭독하겠다는 계획을 세울 정도였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을 배경으로 하고 칸트의 세계시민 사상을 토대로 하여 쓰인 글이 바로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한 편지」다.
실러가 자신의 “정치적 신앙고백”이라고 밝힌 것처럼, 이 글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실러의 직접적 반응으로 작성되었으며 계몽주의의 프랑스가 보여준 공포정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칸트는 인간 사회를 자연의 숨은 계획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으로 보았고, 이성의 계발을 통해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이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의 상태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는 육체(물질충동)와 이성(형식충동)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벌어지는데, 실러는 이러한 갈등을 하나의 전쟁으로 빗대어 설명했으며 이를 조절해주는 놀이충동의 역할을 중요하게 보았다. 실제에서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이며, 이를 통해 인성을 계발함으로써 세계시민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역사적 소재에 깊이 천착한 것은 실러의 정치적 태도를 반영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실러의 관심이 예술을 통한 인성교육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듯이, 실러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늘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실러가 벌이는 작품 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는 역사에 대한 실러의 관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역사가 실러는 데뷔 논문[『스페인 정부에 대한 네덜란드 연합국의 배반 역사』(1788)]에서 16세기 스페인의 식민지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반란의 움직임을 다루었는데, 이러한 모국과 식민지 사이의 갈등 관계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던 요제프 2세의 운명을 반영한 것이었다. 요제프 2세는 신분대표 회의의 이해에 반해서 지방행정을 폐지하고 중앙행정으로 대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희곡 작품에서도 단연 역사적 소재를 다룬 것이 주종을 이룬다. 그중에서 15세기 말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유럽의 종교적 갈등 시기와 절대국가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세계 지배기(1550~1700)에 집중되었다. 역사가로서 쌓은 전문 지식이 풍부했던 실러로서는 이 시대를 소재로 작품에 활용하는 편이 용이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실러가 이러한 시대를 배경 삼아 집중적으로 희곡 작품을 집필한 데에는 현재 시대의 정치적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전제 조건이 되는 역사를 파악하는 일이 필수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극단적인 이상주의로 기울어 세상을 등진 작가라는 일부의 평가에서 벗어나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기 위해 무던히 애쓴 그의 정치적 태도를 이 책에서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대마다 새로이 읽히는 잊히지 않는 작가 실러

생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실러에 대한 평가는 추앙과 폄훼를 오간다. 실러는 나폴레옹 군대에 맞선 오스트리아·러시아·에스파냐 연합군의 부대원들에게 정신적 영웅이었다(1813년). 그들의 주머니에는 실러의 미완성 원고 「빌헬름 텔」이 들어 있었다. 1848년 3월 프로이센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의 투사들에게도 실러의 「돈 카를로스」는 문학적 권위를 넘어선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처럼 실러에게 경의를 표한 19세기에도 비평가들은 열정의 집착, 사실성의 결여, 언어의 상투성 등을 꼬집으며 실러의 문학을 경멸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문학적 규범을 비역사적으로 절대화하려는 경향의 반대편에서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이상주의자라는 상투적 비판이 자리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그의 삶과 문학이 세대를 거슬러 새로이 읽히고 새로이 이해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은 초창기의 ‘전업’ 작가로서 시대의 의식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성을 겸비한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잊히지 않는’ 작가 실러의 전모를 여실히 그려내고 있다.

목차

서론

제1장 발자취를 따라서:
젊은 시절의 교육과 정신적 모험(1759~1780)

1. 계몽된 절대군주 치하의 뷔르템베르크
2. 초기 교육
3. 힘들었던 사관학교 시절
4.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슈투트가르트(1774~1780)
5. 의학 학위논문

제2장 연습 공연들:
초기 서정시와 젊은 시절의 철학(1776~1785)

1. 틈새를 이용한 집필 작업의 출발
2. 문학적 꿈을 지닌 군의관: 슈투트가르트(1781~1782)
3. 초기 시(1776~1782)
4. 세계상의 초석

제3장 무대의 위력:
초기 희곡과 연극론(1781~1787)

1. 18세기 말의 희곡과 극장
2. 「도적 떼」(1781)
3. 정처 없는 망명객: 바우어바흐, 만하임(1782~1784)
4. 「제노바 사람 피에스코의 역모」(1783)
5. 「간계와 사랑」(1784)
6. 희곡론 구상
7.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 만하임, 라이프치히, 드레스덴(1784~1787)
8. 짧은 드라마와 습작들
9. 「돈 카를로스」(1787)

후주

저자소개

저자 페터 안드레 알트는 베를린자유대학의 독문학과 교수로서 현재 이 대학의 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총장 취임 전까지는 같은 대학 부설 ‘달렘연구소’의 책임자로서 이 대학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조성하여 미래지향적 학문 연구의 비전을 제시했다는 평가에 힘입어 전 독일 대학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그는 창의적으로 대학을 경영하는 유능한 대학 행정가일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 전공하는 학문 분야에서도 출중한 업적을 올림으로써 독일 학계에서도 각별히 주목을 받는 인물이다.
알트는 1960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이곳 자유대학에서 주로 독일문학, 정치학, 역사학, 철학을 전공한 후 24세에 박사학위를, 33세에는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했다. 1995년부터 보쿰대학,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독일 근대문학을 강의했고, 2005년에는 스승인 한스 위르겐 슁 교수의 뒤를 이어 모교의 독문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가 쓴 저서들 가운데에는 『실러』를 비롯해서 『프란츠 카프카』, 『계몽주의』, 『아이러니와 위기』, 『고전주의의 결승전』, 『악의 미학』 등이 그의 활발한 학술 활동의 알찬 결실로 꼽힌다. 알트 교수는 2005년 『실러』를 저술한 공로로 실러의 고향인 마르바흐 시가 수여하는 ‘실러 상’을 수상했고, 현재 독일 실러 학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도서소개

실러 사망 200주기에 발간된 대작!

프리드리히 실러는 문호 괴테와 함께 독일 문학에서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견인한 작가이다. 실러 200주기에 발간된 『실러 1-1』은 기념비적인 실러 전기로, 시대의 광범위한 고찰 가운데 실러의 생애와 작품을 복원해냈다. 실러의 문학작품에 대한 해설을 중심에 두면서 실러의 정신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해명한다.

1권은 실러가 태어난 1759년부터 프랑스 혁명기까지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다. 젊은 작가 실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18세기의 문화적·정치적 풍경을 조명하면서 의학도이자 인류학도, 시인, 희곡작가, 출판인이자 소설가로 변화를 거듭한 실러의 모습을 차례로 소개한다. 나아가 역사 서술가로서 실러와 장차 새로운 모습의 유럽을 만들어낸 프랑스 혁명에 대한 스케치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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