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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노예제사회

고대 노예제사회

  • 차전환
  • |
  • 한울아카데미
  • |
  • 2015-12-30 출간
  • |
  • 362페이지
  • |
  • 160 X 230 mm /666g
  • |
  • ISBN 9788946058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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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자유와 문명의 이면에는 노예제사회가 있었다
‘노예제사회’라는 주제로 그려낸 고대 로마의 참모습


고대 노예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보통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한다. 기원전 2세기는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에 시작되었고, 기원후 2세기는 오현제 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다. 즉, 이탈리아와 시칠리아가 노예제사회였던 시기는 고대 로마의 전성기와 거의 일치한다.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것이 로마 군단과 장군들이라면, 하드리아누스 방벽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제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로마 세계의 중심인 이탈리아와 곡창인 시칠리아를 떠받친 것은 노예들이었다.
기독교의 확산은 노예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로마인들이 노예를 해방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노예제사회가 쇠퇴하고 농노가 등장했는가? 저자는 사회경제사라는 틀을 통해 고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노예제사회의 실상과 한계를 되짚어봄으로써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문명이 어떻게 융성하고 어떻게 몰락해갔는지를 새롭게 보여준다.

윌리엄 포드가 솔로몬 노섭을 풀어주지 않은 이유

《노예 12년》은 한 흑인 남자가 12년 동안 노예로 살면서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841년의 뉴욕에서 시작한 영화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솔로몬 노섭이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면서 무대를 루이지애나 주로 옮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노섭의 주인이 된 농장주 윌리엄 포드는 인정이 많은 인물이다. 경매장에서 자식들과 떨어지게 된 노예를 보다 못해 노예 가족 모두를 사려 하기도 하고, 노예들에게 성서를 읽어주기도 하며, 노섭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익을 보자 보답으로 바이올린을 선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관대한 포드도 결국에는 노섭을 다른 농장주에게 팔아넘긴다. 노섭이 자신은 본래 자유인이라며 항변했는데도 포드는 왜 노섭을 풀어주지 않았을까? 포드 자신의 말대로 빚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포드라는 한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 있다. 포드는 노예 소유주로서 지닌 한계, 나아가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미국 남부라는 노예제사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즉, 풀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풀어주지 못한 것이었다.

노예제사회란 무엇인가?

인류가 문명 단계에 들어선 이래, 노예는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단순히 노예와 노예제가 있다고 해서 그 사회를 노예제사회로 부르지는 않는다.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노예가 전체 주민 가운데 일정한 비율 이상이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만 노예제사회로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진정한 노예제사회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19세기 미국 남부는 그중 하나에 해당한다. 면화를 재배하는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업은 노예노동에 크게 의존했다. 무엇보다 남부 백인 사회에서 노예를 부린다는 것은 부와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또한 노예제사회였다.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 초기에 이르는 고대 로마의 전성기에 이탈리아는 로마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시칠리아는 로마의 곡창지대였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신장한 고대 로마에서 노예제가 가장 발달했다고 하면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볼 때 악이 아니었다. 사회를 이루는 정상적 요소이자 근본적 요소였다. 시칠리아의 밀밭에서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번성하는 동안 로마의 엘리트들은 노예라는 인간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위신을 과시했다.

왜 고대에는 노예제 폐지론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로마의 한 전설에 따르면 유피테르(제우스)가 사투르누스(크로노스)를 타도하고 강자들이 부를 통제하고서 불행한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거부했을 때, 노예제가 세상에 출현했다. 이 전설을 통해 로마인들이 노예제를 어떻게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예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은 아득한 신화시대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사회적 지위를 고도로 의식하는 로마 세계에서는 아무도 비자유인이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의 지식인 중에서 이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노예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노예를 부드럽게 대하라고 주문했지만, 노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 소유주의 도덕적 건강을 위해서였다.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지성인들의 사색 속에 노예제 폐지는 없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도 노예제를 부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예 12년》에서 노섭의 두 번째 주인이 된 농장주 에드윈 엡스가 성서 구절을 근거로 노예들을 학대한 것처럼, 고대 로마의 노예들은 성서에 있는 여러 은유적 표현을 통해 현세의 질서를 긍정하고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누가 노예가 되는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는 약속을 어기고 로마군을 공격한 갈리아 부족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노예로 팔린 사람은 5만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지,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의 생각을 빌려 약속을 중요시하는 로마인들에게 약속을 어기는 행위는 명백한 죄이며,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에게 어울리는 운명은 노예라고 독자에게 설명한다. 그러나 굳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까지 정당화할 필요는 없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에 패한 자가 노예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세기의 로마법이 노예를 ‘목숨이 살려진 자’로 규정한 것은 포로를 노예로 삼던 관행을 보여준다. 게다가 로마에는 노예가 필요했다. 로마는 무력으로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으며 로마 엘리트들은 방대한 제국 건설을 자신들의 운명으로 여겼다. 급속히 팽창하는 제국을 지탱하려면 많은 노예가 있어야 했고, 전쟁은 노예를 얻는 가장 쉬운 수단이었다.
역사가 디오도로스는 제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이 왜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면서 흥미로운 언급을 한다. 로마 사절이 흑해 연안의 동맹국 비티니아를 방문해 군사원조를 요청하자 비티니아의 왕은 많은 비티니아인이 빚 때문에 로마인 푸블리카니(조세 징수 청부업자)들에게 사로잡혀 노예로 전락했다고 이야기하며 난색을 보인다. 그러자 로마 원로원은 로마 속주에서 노예로 있는 동맹국 시민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칙령을 내린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는 노예 소유주들이 반발해 노예해방이 철회되고, 희망이 꺾인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로마에는 동맹국 출신의 노예도 많았던 듯하다.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노예 반란을 보면 30년이 넘는 시차에도 공통점이 보인다. 반란 노예들은 두 차례 모두 시칠리아에 왕국을 세우려 했다. 명확한 목적이 없이 움직였던 스파르타쿠스와는 다른 점이다. 제1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의 지도자 에우누스는 자신을 안티오코스로 칭했고, 제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의 지도자 살비우스는 트리폰이라는 칭호를 선택했다. 안티오코스와 트리폰은 둘 다 시리아에서 유래한 왕명이다. 게다가 에우누스는 자신이 이끄는 반란 노예 집단을 ‘시리아인’으로 불렀다. 당시 시칠리아에서 일하던 노예의 상당수가 시리아와 같은 문명화된 동방 지역 출신임을 짐작하게 한다.

로마인들은 왜 노예를 해방했는가?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 벤허는 갤리선의 노잡이 노예로 전락했다가 로마 함대사령관의 목숨을 구하면서 운명이 바뀌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고 나중에는 로마 귀족의 양자까지 된다. 영화만큼 극적이지는 않았겠지만, 실제로 고대 로마는 다른 노예제사회와 달리 노예를 빈번하게 해방했다. 로마인들이 노예를 해방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인도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사후의 명성을 의식한 경우도 있었고, 원로원 의원이 자신을 대신해 사업을 관리할 대리인으로 삼고자 노예를 해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방된 노예들은 로마 시민단에 수혈되는 신선한 피의 공급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외국인 노예가 해방되어 자신과 동등한 시민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따라서 무분별한 노예해방을 막으려는 법들이 시대별로 여러 차례 제정되면서,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해방을 미끼로 노예들을 통제하는 일이 좀 더 수월해지기도 했다. 한편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들이 가족을 이루도록 허용해 충성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 가족은 가족 중 한 명이 다른 곳으로 팔릴 수도 있었고, 노예 소유주가 사망할 경우 여러 명에게 분리되어 상속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항상 흩어질 위험을 감내해야만 했다.

노예제는 왜 몰락했는가?

기원전 2세기에 그라쿠스 형제가 목도한 현실처럼, 전성기에 들어선 고대 로마에서는 부유한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었고, 자영농은 몰락해갔다. 지주들은 노예노동을 이용해 라티푼디움으로 불리는 대토지를 경작했다. 대 카토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카르타고를 맹렬하게 몰아붙이던 것만큼이나 자신이 소유한 농장 노예들에게도 무자비했다. 카토와 바로, 콜루멜라가 쓴 농업서에는 어떻게 하면 노예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활용해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지 골몰하는 로마 지주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시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사라지자 지주들은 노예를 충원하는 대신 점차 독립성을 상실한 하류층의 노동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제정 후기의 황제들은 조세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소작인들이 소작지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자유를 잃고 토지에 결박된 소작인들은 중세 농노의 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대 말기에도 제국 전역에는 여전히 많은 노예가 있었지만, 더는 노예제사회가 아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문명은 노예제사회와 함께 저물어갔다.

목차

제1장 고대 노예제 연구의 쟁점
제2장 노예제사회와 지식인들의 노예관
제3장 노예제 농장 경영
제4장 노예제 이목
제5장 노예제의 쇠퇴와 소작제의 발달
제6장 노예제사회의 성립과 쇠퇴: 핀리의 이론
제7장 고대 경제의 근대성과 원시성
제8장 노예 가족
제9장 노예해방과 노예해방 제한법
제10장 비공식 노예해방과 비공식 피해방인
제11장 노예 검투사와 빵과 서커스의 정치
제12장 제1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
제13장 제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

저자소개

저자 차전환은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과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로마 제국과 크리스트교』(2006),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 제정 시대까지』(공저, 2006), 『서양고대사강의(개정판)』(공저, 2011)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로마제국의 노예와 주인: 사회적 통제에 대한 연구』(2001), 『타키투스의 역사』(공역, 2011)가 있다.

도서소개

『고대 노예제사회』는 기독교의 확산은 노예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로마인들이 노예를 해방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노예제사회가 쇠퇴하고 농노가 등장했는가? 저자는 사회경제사라는 틀을 통해 고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노예제사회의 실상과 한계를 되짚어봄으로써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문명이 어떻게 융성하고 어떻게 몰락해갔는지를 새롭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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