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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성지 간도를 가다

독립운동의 성지 간도를 가다

  • 주성화
  • |
  • 산과글
  • |
  • 2014-08-04 출간
  • |
  • 304페이지
  • |
  • 152 X 225 X 15 mm /570g
  • |
  • ISBN 978899672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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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독립운동의 성지 간도를 가다

북간도는 종교와 파벌을 넘어선 대단결을 이루어낸 터전이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간도토벌과 자유시참변을 겪고 독립군들이 와해되고 흩어지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북간도의 한인 사회는 중국과 국제사회의 변화에 조응하면서 여전히 민족의 독립과 정체성, 자유를 향한 고민과 노력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히고 사라져가는 역사의 흔적을 바라보며 안타까움 속에 그 기억들을 되살리고자 하는 북간도 한인 사회의 후손들이 발품을 팔아가며 한 땀 한 땀 적어낸 ‘항일유적답사기’이다. 답사기 속에 담긴 북간도 한인 사회의 역사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고 대륙을 달리며 자유와 독립,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피울음을 삼켰을 선조들을 기리고자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 기획 의도 및 출간 의의
한반도를 비롯하여 세계 각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가운데 국외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곳은 서간도와 북간도를 포함한 만주 지역과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이었다. 이곳에서는 1860년대 이래 이주한 한인들이 한인 사회를 형성했고 이것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북간도로 이주해 간 한인들은 시기별로 그 성향이 구분된다. 초기 이주자들이 생활과 생존을 위해 간도에 정착했다면, 을사조약 이후에는 구국을 위한 장기적인 터전 조성과 독립투쟁을 위해 간도로 이주했고, 후기에는 일제의 유인책과 강제동원에 이끌려 간도로 이주해 갔다.
이 책에서는 주로 초창기 이주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에 모인 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초기 이주민들이 간도에 정착하는 과정과 그곳에서 자치조직을 운영하며 다양한 종교적 기반과 이념적 차이 그리고 시대적 변화를 겪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도의 한인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를 세우고 재건하면서 후대를 양성하고 지역적 국제적 연대와 협조를 이끌어 내는 모습은 독립운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저자들은 말한다. “봉오동 전투에 이어 청산리 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어느 한 걸출한 개인의 공적이나, 단순히 한 차례 승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승전을 이루어낸 독립군 초유의 대동단결과 수년을 키우고 다져온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군사교육훈련의 성과이며, 대종교 서일 총재의 노력과 이회영 가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수십 년 동안 만주에 이주하여 터전을 닦아온 만주 특히 북간도 지역의 조선인 민초들의 희생적인 후원이 밑거름이 되었다.” 북간도는 종교와 파벌을 넘어선 대단결을 이루어낸 터전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간도토벌과 자유시참변을 겪고 독립군들이 와해되고 흩어지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북간도의 한인 사회는 중국과 국제사회의 변화에 조응하면서 여전히 민족의 독립과 정체성, 자유를 향한 고민과 노력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히고 사라져가는 역사의 흔적을 바라보며 안타까움 속에 한 걸음씩 그 기억들을 되살리고자 하는 북간도 한인 사회의 후손들이 발품을 팔아가며 한 땀 한 땀 적어낸 ‘항일유적답사기’이다. 답사기 속에 담긴 북간도 한인 사회의 역사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고 대륙을 달리며 자유와 독립,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피울음을 삼켰을 선조들을 기리고자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1992년 한중수교 직후 연변을 방문한 사람들이 감격에 차서 중국조선족동포와의 만남을 회고하는 글들이나 연변이 자본주의화하는 모습에 대해 조심스레 우려를 표시하는 글들을 보았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 사회는 60만 명에 육박하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의 귀환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조선족동포는 ‘그들’인가 아니면 ‘우리’인가?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경계를 오가며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동포들의 귀환에 직면하여 만주와 간도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 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한반도와 북간도의 소통과 흐름 속에서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다시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 내용 구성
제1장 용정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삶

1800년대 후반 두만강 인근 지역을 필두로 해서 북간도로 이주하던 조선인들이 육도하와 해란강이 만나는 곳을 중심으로 집거하던 곳이 용정촌(용정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내정세를 염려하는 여론 속에서 만주에 구국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간도 개척의 적임자로 낙점된 이상설 선생은 1906년 여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북간도의 항일 유적지 답사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서전서숙은 중국 한인 근대교육의 시원으로 여겨진다. 1907년 일제통감부는 간도조선인 보호를 명목 삼아 사전조사를 거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세우고 통제와 유인과 탄압을 자행했다.

용정은 1910-1940년대 조선이주민의 최대 집거구로서 문화, 교육, 사업과 무역의 번창시대를 구가했으며 많은 역사명물이 남아 있다. 화룡현 직소와 청산리를 거쳐 발원하는 해란강 줄기가 비암산 기슭을 감돌아 용정의 서쪽으로 흘러 멀리 두만강에 합류하며 동해로 향한다. 해란강을 가로지르는 용문교를 건너서 도달하는 시내 외곽에는 비암산의 용주사, 일송정이 있고 이곳은 대포산, 선바위와 아울러 당시 용정 학생들이 즐겨 찾았던 소풍 코스이다. 1940년대 청림교 사건이 발생한 대포산 정상에 서면 화룡, 용정, 연길이 한눈에 안겨왔고 비암산, 마제산, 해란강이 발아래 있으며 이주조선인의 문화와 역사는 해란강과 더불어 엮어지고 있다.

육도하를 따라 지신향으로 가는 길목의 동량어구와 승지촌이 있다. 1919년 간도지역 유지들이 군자금을 모아 러시아제 무기를 구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20년 1월 다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벌인 사건이 15만 원 탈취사건이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베리아에서 적군과 백군이 내전 중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군대들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로 시베리아로 출병해 있었고 북간도와는 근거리에 있는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하는 시도들이 보인다. 1910-1920년대 간도 반일투쟁의 주역이었던 독립투사들이 흑하(자유시)사변 이후 흩어지고 1921년 7월 상해에서 설립된 중국공산당이 만주에서 영향력을 높이며 주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독립과 광복의 같은 꿈을 지녔으나 이념적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항쟁 방법과 길을 택하고 싸우던 역사 현장 ‘간도’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수많은 조선인 투사, 혁명가들을 배출했다. 1930년 5?30폭동 주역들과 주덕해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제2장 명동촌의 한인들

명동은 간도 조선인의 자부심이었다. 명동촌은 1899년부터 1905년 사이 거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명동의 사계절은 무릉도원 같았다고 하며 이러한 명동촌을 일구어낸 핵심인물이 김약연이다. 1909년 정재면(1884, 전 한신대총장 정대위 부친)을 통해 명동에서 기독교를 접수, 전파하였고 간민교육회를 조직했으며 1913년 간민회로 확대 발전시켜 북간도 한인동포의 공식적인 자치기관으로 중국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1907년 서전서숙이 문을 닫자 김약연 등 유지들이 1908년 4월 신학교육을 하는 명동서숙을 개숙했다가 명동학교로 개칭했다. 1911년에는 여학부까지 설립되었고 근대교육을 실시했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나운규, 김창걸 등의 모교이다. 간도는 물론 한국 및 시베리아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왔다. 일본군이 간도에 들어와 가장 먼저 토벌한 곳이 명동학교였다.

명동의 4대 가문이란 문병규, 남위원, 김약연, 김하규 등의 가문을 칭하며 이들이 집단 이주해 정착촌을 만들면서 원래의 동가지방이라는 이름을 명동이라 개칭했다. 1899년 조선 함북에서 명동촌으로 첫 이주하고 명동학교 재정을 관리했던 문씨 가문의 지도자는 문병규이고 후손은 문치정, 문재린, 문익환으로 이어진다. 문재린은 명동촌 제1세대 지도자들이 제2세대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는 계획의 한 부분으로 문성린, 윤영석, 김정훈과 함께 북경으로 유학을 간다. 평양신학교를 거쳐 1928년 캐나다 선교부를 통해 유학을 하고 1932년 고향으로 돌아와 1946년까지 용정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명동은 1909년까지 순수한 유학 전통마을이었으나 명동교회가 들어서면서 기독교가 흥성했다. 교회의 힘이 커짐에 따라 정재면은 명동 조선족사회의 극히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였고 1914년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으나 명동에서는 그에 관한 유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파평 윤씨 가문은 증조부 윤재옥을 중심으로 1886년 두만강을 건너 용정 개산툰진 자동에 정착하였고 윤영석은 1895년 명동에서 출생하여 명동중학교를 거쳐 북경으로 유학하였다. 1900년 윤씨 가문은 명동으로 이사와 이들과 합류했다. 윤동주(1917)는 김약연의 조카가 된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 <참회록>을 써놓고 일본 동경으로 떠났으나 1943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명분으로 송몽규와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사망하였으나 사인은 아직도 의혹에 쌓여 있다.

용정 동산에는 윤동주 가묘 옆으로 송몽규의 묘소가 있으나 몽규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몽규가 어린 나이에 친 공산당 성향을 자주 나타냈기 때문에 한국인 위주로 진행된 윤동주 연구와는 다르게 송몽규는 소외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고 한다.

제3장 무장 항일투쟁의 터전

캐나다 선교부는 1900년 초반에 간도와 연해주를 답사한 후 용정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를 파견하여 의료와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1913년 설립된 제창병원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독립투사들이 활동하는 아지트이기도 했다. 1920년 용정 영국 조계지에 캐나다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현대적 시설과 근대교육을 실시한 은진중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기독교정신, 투철한 반일정신에 바탕을 둔 근대교육과 인재양성의 산실이 되었다. 이는 당시 국제형세와 간도 조선족 사회발전의 필연적 결과물이었고 훗날 한국의 교육, 종교, 문화, 언론에서 활약한 중요한 지도자들이 수많이 배출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캐나다 선교부를 통해 소수민족들의 독립에 관한 정보가 전달되면서 만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들은 국내외를 통합한 거족적인 운동을 준비하였고 1919년 북간도는 연해주와 연계하여 공동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13일 독일인 관할구역인 서전대야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모여 독립선언서포고문을 낭독하고 시위대오가 일본 총영사관을 향해 가던 중 총격으로 수십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 3.13반일시위를 계기로 간도 반일운동이 반일무장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청산리 대첩이 대표적이다.

청산리 대첩에는 중국의 피카소로 평가를 받는 용정 출신 한낙연이 일조를 하였다.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인 첫 당원이며 봉촌 중국공산당 지부의 창설자인 그는 그전에 이미 반일독립투사이다. 독립군의 군자금 조달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여 당시 레닌혁명군에 패하고 만주로 퇴각하던 체코군인들로부터 무기를 구입할 수 있게 하였고 그 무기가 청산리 대첩에 사용되었다 한다. 청산리 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어느 한 걸출한 개인의 공적, 단순히 한 차레 승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승전을 이루어낸 독립군 초유의 대동단결과 수년을 키우고 다져온 신흥무관학교 세력, 대종교 서일 총재의 노력과 이회영 가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수십 년 동안 만주에 이주하여 터전을 닦아온 만주 특히 북간도 지역의 조선인 민초들의 희생적인 후원이 밑거름이 되었다. 서일 총재는 연해주에서 체코 장교들과 접촉하여 북로군정서 1,600여 명의 무기 구입을 성사시켰고 이는 훗날 청산리 대첩의 결정적인 물질적 기초가 되었다. 청산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간도토벌에 돌입했고 장암동 참사와 같은 만행은 이를 목격한 외국인에 의해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다.

제4장 용정 한인들의 교육과 종교 그리고 이념

러시아혁명 후 용정에 망명하여 들어온 러시아인들, 영국덕 위의 캐나다선교사 집, 영국 세관장 집과 제창병원, 은진학교, 독일덕의 서전 대야 등이 있는 용정은 조그만 국제마을이기도 했다.

캐나다선교부의 지원에 의해 ‘은진중학교’가 설립된 후 기독계통의 여학교인 ‘명신학교’가 세워졌다. 1926년 ‘광명여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일본인 낭인 히다카 헤이지로는 만주국 군정에 많은 조선인을 길러냈다고 한다. 1934년 광명여자고등학교로 개명하고 학교는 일본 외무성 및 문무성의 해외지정학교로 되었으며 1938년 위만주국 관할로 되었다. ‘광명중학교’는 처음부터 친일계 학교는 아니었다. 각성한 조선 민족 선각자들이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하여 종교를 떠나 자체의 힘으로 이끌어가던 근대교육 학교였다. 1909년 회령 사람에 의해 ‘광동서숙’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시작했고 배일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1912년 용정중앙교회에 넘기면서 ‘영신학교’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간도 일대의 흉년을 겪으면서 경영난에 처하게 되고 1925년 히다카에게 운영권을 넘겨주고 영신중학교는 ‘광명학원중학부’가 되었다. ‘대성중학교’는 대성유교의 공교회에서 꾸린 학교이다. 1921년 용정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신문화운동을 제창했다. 공산주의 영향을 받게 되고 친사회주의로 전환되었고 반일투쟁을 성원했다. 1931년 9?18만주사변과 위 만주국의 건립은 간도 조선인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쳐 상대적으로 독립 운영되었던 조선인 학교들은 점차 위만주국의 강제적인 관할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1920년 초까지 간도는 독립군과 민족주의자들의 활동무대였다면 이후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을 거쳐 중국공산당의 활동무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 방침에 따라 조선 초기공산주의자들은 개인적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은 학교 교사 혹은 신문사 기자 등을 공개신분으로 하면서 중국공산당 비밀사업을 진행했는데 간도의 진보적 신문 <민성보>가 그 예이다. <민성보>는 한문판과 조선어문판으로 간도 언론을 대변했다.

제5장 연길과 도문에서 삶의 역사를 찾다
연길시에서 가까운 와룡동은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에서 사람들이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마을이다. 마을이 이루어지자 글방을 차렸고 서당교육을 이어가던 중 신식교육을 위해 1908년 창동소학교를 창립했다. 후에 ‘창동학원’으로 확장하고 독립과 자유에 기반을 둔 후대양성에 취지를 두었다. 중학부에 군사과목이 있는 학교였고 15만 원 탈취사건의 주역들을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33인의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용정 일대의 천도교 세력은 점차 확장되어 각지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설립했는데 동흥소학교와 중학교이다. ‘동흥중학교’는 대성중학교와 더불어 공산주의 성향이 짙었다. 학생들은 천도교도 자녀들이 위주였고 간도를 위시하여 소련 연해주와 조선, 남북만등지에서 모여왔는데 수업과목에는 천도교에 대한 강의도 포함되었다. 한국 강릉 출신의 시인 심연수는 동흥중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을 한 뒤 다시 용정으로 귀환하여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의문사를 당했다. 동생 심호수가 그의 작품을 보관했다가 발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고 간도문학에 새로운 경향을 제시했다고 한다.
봉오동 전투는 두만강을 건넌 일본군이 양민 학살을 자행하고 귀환하는 것을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이 궤멸시킨 전투로 인해 발단되었다. 지형을 이용한 홍범도의 유격전술과 최진동의 물자지원, 안무 국민군의 헌신적인 협조가 뭉쳐 이루어낸 항일독립전쟁사상 빛나는 승첩이다. 봉오동 대첩에 이어 홍범도 부대는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무대와 연합하여 청산리 대첩을 이끌어냈고 1920년 겨울 북만주 밀산에 도착하여 대오 정비 후 우수리강을 건너 1921년 러시아 이만으로 들어갔다. 홍범도의 만주에서의 무력투쟁은 마무리단계에 이르렀다.
1908년 개산툰진 자동촌에 세워진 정동서숙은 간도지역에서 가장 일찍 세워진 학교 중의 하나이며 두만강 기슭에 세워진 첫 학교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온성군 삼봉리와 마주한다. 지리적 관계로 조선이주민이 가정 먼저 정착한 지역이고 20세기 초부터 30년대까지 반일투쟁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일제의 경신토벌 때 소각되고 무고한 마을사람들이 참살되었으나 재건을 거듭하며 후대 양성을 해냈다.

목차

제1장 용정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삶
서전서숙과 이상설 선생, 중국 한인 근대교육의 시원
용주사와 일송정, 강경애 문학비, 해란강이 휘돌아 감도는 비암산 기슭에 서다
대포산, 용정 학생들의 소풍길, 대포산 정상에서 해란강을 내려다 보다
15만 원 탈취사건과 러시아 무기, 일제에 맞서 무장 투쟁을 준비한 사람들
5?30 폭동기념비, 주덕해와 조선혁명군정학교, 이념을 넘어선 민족의 항일투쟁사

제2장 명동촌의 한인들
명동학교의 성쇠, 근대 민족학교, 서전서숙의 맥을 잇다
명동촌 4대 가문과 문재린 목사, 명동촌 지도자 문병규의 손자이자 문익환의 아버지
김약연과 정재면의 명동촌, 간도 조선인의 자부심 명동을 일구다.
명동촌과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찾아서
선바위, 북간도 문화 발생지의 상징, 김창걸 문학비, 김약연 묘소, 장재촌의 규암재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용정 동산을 떠도는 고독한 영혼
일제에 항거한 청년 문사 송몽규, 행동하는 지식청년을 추모하다.

제3장 무장 항일투쟁의 터전
명동 은진중학교, 1920년 이후 근대교육과 인재양성의 산실
제창병원과 동산교회, 용정의 역사를 담다
용정 3?13 반일시위, 반일 무장투쟁의 계기가 되다
중국의 피카소 한낙연, 청산리 전투 무기 조달에 기여한 천재 화가
청산리 전투를 둘러싼 민초들의 희생정신, 종교와 파벌을 넘어선 대단결
청파호 마을의 대종교 삼종사 묘소, 항일무장투쟁의 정신적 지주 나철, 김교헌, 서일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종사, 체코군 무기구입으로 청산리 대첩의 승리를 돕다
장암동 노루바윗골의 참사, 청산리 패전후 일본군의 주민 대학살 현장
한국 언론인 장덕준, 장암동 참사 현장에서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

제4장 용정 한인들의 교육과 종교 그리고 이념
용정 명신학교, 간도 유일의 기독교 여학교
히다카 헤이지로와 광명학원, 용정에 나타난 일본 낭인
용정의 거리 풍경과 용정중앙교회, 옛터의 흔적을 따라서 1910년대로 돌아가다
광명중학교, 영신학교의 시대적 변질, 근대 민족교육기관이 일본인에게 넘어가다
대성중학교, 초기 공맹교육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경향으로 전환하다
<민성보>, 간도 유일의 진보적 신문, 한문판과 조선어문판으로 간도 언론을 대변하다
일본총영사관과 개척의학원, 일본의 간도 점령의 상징

제5장 연길과 도문에서 삶의 역사를 찾다
연길감옥, 수변루와 오록정, 간도의 행정관리체계와 한인들
와룡동 창동학원, 15만원 탈취사건의 주역들을 배출하다.
용정 동흥중학교, 다양한 정치세력의 각축장
시인 심연수와 서전서숙 옛터, 간도 이주역사를 간직하고 암흑기 문학을 대변하다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 장군, 항일 독립전쟁사의 빛나는 승리
노루바윗골 참사 옛터와 최근갑 옹, 마을은 사라지고 무덤만 남은 곳에서
정동서숙, 두만강 기슭에 세워진 첫 학교,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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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주성화는 한림대학교 언론정보학 박사, 중국 해란강닷컴 총편집, 시인

도서소개

『독립운동의 성지 간도를 가다』는 간의 흐름 속에서 잊히고 사라져가는 역사의 흔적을 바라보며 안타까움 속에 그 기억들을 되살리고자 하는 북간도 한인 사회의 후손들이 발품을 팔아가며 한 땀 한 땀 적어낸 ‘항일유적답사기’이다. 답사기 속에 담긴 북간도 한인 사회의 역사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고 대륙을 달리며 자유와 독립,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피울음을 삼켰을 선조들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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