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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

임을 위한 행진

  • 황광우
  • |
  • 오월의봄
  • |
  • 2017-06-05 출간
  • |
  • 380페이지
  • |
  • 141 X 210 X 23 mm /789g
  • |
  • ISBN 9791187373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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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 땅의 민중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살았던 운동가 윤한봉
우리는 왜 그를 기억해야 하는가?

5ㆍ18광주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유명한 윤한봉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그리워한다. 윤한봉은 1980년 5ㆍ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 진보운동권의 지도자였다.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국제연대 외교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는 두 대륙에 족적을 남긴 이였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의 윤한봉’을 잘 모르고 미국의 동포들은 ‘한국의 윤한봉’을 잘 모른다. 이 책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땅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운동가 윤한봉의 삶을 이야기한다.
저자 황광우는 기존에 출간된 윤한봉의 회고록과 타계 직전 남긴 구술록뿐만 아니라 미국에 직접 건너가 윤한봉과 함께 활동했던 이들의 목소리까지 담아와 책으로 펴냈다. 또한 젊은 시절 윤한봉과 함께 민주주의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은 이들의 이야기도 생생한 날목소리로 기록했다. 영문판이 함께 수록된 것은 윤한봉이 그토록 사랑했던 타민족 형제들과 미국에 두고 온 벗, 그 벗들의 2ㆍ3세에게 윤한봉의 삶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고 단 한 명이라도 ‘나도 윤한봉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이가 나오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1980년 5ㆍ18광주민중항쟁이 있기 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던 윤한봉, 미국 망명 후 국제연대 활동가로 살았던 윤한봉, 12년 만의 귀국 후 5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윤한봉의 모습을 시대별로 살펴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윤한봉은 어떤 결심을 하고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는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동양 식품점의 점원으로 시작해 어떻게 세계 각국에 한인 단체를 만들었는가? 12년 만에 돌아온 고향 땅에서 죽기 전까지 윤한봉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의 삶에 녹아 있는 그의 정신은 무엇인가?

순진한 ‘광주 촌놈’이 5월 광주민중항쟁의 ‘수괴’가 되기까지

윤한봉의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소년 윤한봉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했던 효자 아들이었다. 공부를 곧잘 하는 모범생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대학에 들어가서 돌연 운동가의 길에 뛰어든다. 그날은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라디오로 통해 전해 들은 날이었다. “오늘부터 공부는 끝이다. 국민을 버러지 취급하는 저 독재자, 나는 싸운다.” 결심을 굳힌 윤한봉은 그날로 공부하던 전공 서적을 찢어버렸다. 그 후 윤한봉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당하고 인혁당 사건으로 무고한 젊은이들이 사형에 처해지는 과정을 목도하며 냉정하고 엄격한 투사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그는 기존의 투사들과 달랐다. 선배들에게 교육받고, 책을 읽으며 얻은 지식으로 움직이는 이념형 운동가가 아니라 그가 직접 본 대로 느낀 대로 움직이는 실사구시형 운동가였다. 고구마 전량수매 문제를 놓고 농민들과 정부 간의 갈등이 벌어졌던 ‘함평농민싸움’이나 ‘추곡수매가 투쟁’ 등을 몸소 체험하며 윤한봉은 민중의 삶과 유리되지 않는 운동을 꿈꿨다. 그래서 그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과 같은 전국 단위의 지하조직에도 가입하지 않고 광주지역 내에서 ‘청년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모두가 ‘노동운동’을 교과서의 정답처럼 말하던 때였지만 그는 그가 생각하고 느낀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서울에서 김근태 씨가 청년운동을 시작한 시점이 1983년이었다. 윤한봉은 이미 1970년대부터 광주에서 청년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미국으로의 망명, 작은 동양 식품점 점원에서 한인 단체의 지도자가 되다

1980년 5ㆍ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광주 운동권은 서울 다음으로 영향력이 가장 컸다. 그 핵심에 윤한봉이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이 터지자마자 윤한봉이 ‘반란의 수괴자’로 지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잡히면 꼼짝없이 죽을 것이니 도망쳐야 한다’는 가족과 지인들의 말에 서울에서 잠시 도피생활을 한 후 미국으로 망명한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뒤 윤한봉은 한동안 신분을 숨긴 채 작은 동양 식품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윤한봉은 5월의 그날에 동료들을 버리고 왔다는 사실과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광주의 원혼들을 잊지 말자. 부끄러움 없이 살자. 조국에 돌아갈 때 떳떳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철저하게 운동하자. 살아남은 죄, 도망친 죄를 깨끗이 씻고 갈 수 있도록 철저하게 운동하자. 항시 광주의 존엄을 지키자”고 다짐하며 미국 땅에서 새로이 사람들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윤한봉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광주수난자돕기회’를 만들어 5ㆍ18광주민중항쟁의 부상자와 유가족들에게 기금을 모아 송금한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 곳곳에 ‘마당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애틀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마당집을 ‘민족학교’라 이름 붙이고 그곳을 미국에 있는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의 뿌리에 대해 가르치고 민족문화를 보급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이후 윤한봉은 미국 전역에 ‘한국청년연합(한청련)’을 세웠다. 그곳에서 한청련 회원들은 함께 공부하고 각종 수익사업을 통해 기금을 모아 한인 민권의 향상을 위해 활동했다. 민청련이 자리를 잡아가자 윤한봉은 더 큰 꿈을 꾸었다. 윤한봉은 타민족과 연대해 공동투쟁해서 각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서로 돕는 ‘국제연대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인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로 보고 세계적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벌인 일이 ‘재한 핵무기 반대 서명운동’과 ‘국제평화대행진’이었다. 윤한봉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국제평화대행진’은 1989년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각국 행사단이 축전이 끝난 뒤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행진하는 것이었다. 몇 달간의 준비 끝에 시작된 7일간의 행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엄청난 행사에도 윤한봉은 이름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의 평소 소신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뒤에 숨어 지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윤한봉은 어느덧 광주에서 후배들의 사랑을 받던 선배를 넘어 미국에서 교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5월 정신을 계승하고 잠든 합수 윤한봉 선생을 기리며

미국에서 국제적인 활동가로 일하면서도 윤한봉은 언제나 조국을 그리워했다. 그는 10여 년이 넘는 미국생활을 하는 동안 영어도 쓰지 않고 혁대도 풀지 않고 자며 항시 조국과 그곳에 잠든 동료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윤한봉의 수배가 해제되면서 윤한봉은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하던 날,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윤한봉은 “나는 도망자다. 오월 광주는 명예가 아닌 멍에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살아가겠다”고 한마디 내뱉은 후 조용히 광주로 내려왔다.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5ㆍ18기념재단을 만드는 일이었다. 재단 설립 과정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온갖 경계와 음해, 인격 모독에 시달려야 했지만 묵묵히 일만 했다. 정계에 입문하라는 지인들의 권유도 뿌리치고 모금운동 등 궂은일을 하며 5월 정신을 계승하는 데만 힘쓰다 2007년 폐기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윤한봉의 별명은 ‘합수(合水)’였다. 그가 스스로 지어붙인 ‘합수’라는 별명은 똥과 오줌을 합쳐 사용하는 퇴비란 뜻이다. 정의로운 세상에 밑거름이 되겠다는 마음의 표현은 곧 실천이 되었다. 그는 5ㆍ18기념재단은 물론 어떤 단체에서도 직책이나 직함을 맡지 않았다. 미국에서 민족학교를 운영할 때도 공식 직함은 소사에 불과했다.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몇 가지 생필품이 든 가방 하나 메고 헌 운동화를 신고 평생 돌아다녔으며 12평짜리 영구임대주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명예도, 부에도 욕심 없이 평생 헌신만 하다 살아간 이가 바로 윤한봉이다. 그래서 많은 벗들이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기억하고 그의 정신을 알리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5ㆍ18광주민중항쟁이 잊혀져서는 안 되듯이 ‘이 땅에 윤한봉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헌신과 열정, 무소유를 생의 기치로 삼고 이 땅의 민중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살았던 운동가 윤한봉. 그의 삶이 더 널리 알려져 저자의 바람처럼 ‘윤한봉처럼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목차

서문
프롤로그

1부. 한국에 윤한봉이 있었다
말에 대한 책임
세 차례 결의
동지애
함평농민싸움
따뜻한 밥
옥중의 죄수들을 돕는 여성들, 송백회
이념이냐 현실이냐?
교수들과 학생들의 저항
현대문화연구소
광주민중항쟁

2부. 윤한봉의 망명 이야기
5월 광주, 빛의 도시
죽음의 고비
시애틀의 동양 식품점에서 일하다
천사들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광주 희생자를 돕기 위한 모금
마당집
고립
굳세게 살자
촌놈
시애틀에서 온 편지
미국 도처에 한청련을 세우다
헌신하는 사람들
“우리가 가면 그들도 온다”
핵무기를 반대하는 서명운동
폭설 속의 크리스마스트리
국제평화대행진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해방의 소리
새로운 노선
귀국

3부. 시대와 더불어 살다
12년 만의 귀국
변함없이 살다
형제나 다름없는 김남주가 가다
아내를 맞이하다
5·18기념재단
들불야학 이야기
합수 정신은 무엇인가
진보 정당 만들기
반성할 줄 아는 실천가
그리운 사람

후기
합수 윤한봉을 추모하며
윤한봉 약력
참고문헌

저자소개

저자 황광우는
1958년 광주 출생. 1975년 고교 시절 박정희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예비하다 투옥되었다. 검정고시를 거쳐 1977년 서울대에 입학해 틈틈이 고전을 읽었다. 1978년 6개 대학 연합 시위에 연루되어 군사법정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계엄포고령위반으로 두 번째 제적을 당하면서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1980년대 군부독재 치하에서 부조리한 현실에 맞섰던 곳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정인’이라는 필명으로 써낸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은 시대의 나아길 길을 제시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그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것은 1998년이었다. 2002년 민주노동당 연수원장을 역임하면서 건강을 해쳐 지금은 글을 쓰며 살고 있다. 2003년 《레즈》 를 집필했고, 2006년 새로운 철학교양서의 비전을 제시한 《철학콘서트》를 집필했다. 이듬해 2007년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를 출간했다.
2007년 담양의 깊은 산속에서 쓰러진 이후 몸의 반신이 마비되었다. 2009년 전남대 철학과에 진학하여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연구했다. 2013년에는 소크라테스의 삶을 정리한 《사랑하라》를 발간했고, 2015년에는 플라톤과 호메로스의 불화를 다룬 《철학의신전》을 발간했다. 2016년 조선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역사콘서트》를 출간했다. 지금은 광주에서 고전연구원을 이끌고 있다.

도서소개

『임을 위한 행진』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 있기 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던 윤한봉, 미국 망명 후 국제연대 활동가로 살았던 윤한봉, 12년 만의 귀국 후 5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윤한봉의 모습을 시대별로 살펴볼 수 있다. 저자 황광우는 기존에 출간된 윤한봉의 회고록과 타계 직전 남긴 구술록뿐만 아니라 미국에 직접 건너가 윤한봉과 함께 활동했던 이들의 목소리까지 담아와 책으로 펴냈다. 또한 젊은 시절 윤한봉과 함께 민주주의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은 이들의 이야기도 생생한 날목소리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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