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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 시대를 열다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

  • 양윤세
  • |
  • 해남
  • |
  • 2017-05-25 출간
  • |
  • 576페이지
  • |
  • 153 X 226 X 31 mm /862g
  • |
  • ISBN 978896238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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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 주요 내용
책은 양 전 장관이 혈혈단신 월남하여 미군 통역 및 국군 통역장교를 거쳐 미국 유학으로 경제관료의 준비를 마치는 과정을 제1부로, 1962년부터 1970년까지 경제개발의 사령탑인 경제기획원에서 국장, 과장으로서 경제외교를 펼친 시기를 제2부로, 그리고 1971년부터 1980년까지 농림부 농정차관보, 청와대 경제제3비서관, 주미공사, 동력자원부장관으로서 경제개발의 현장 리더로, 석유 외교가로 활동한 시기를 제3부로 했다.
분단과 전쟁의 격랑을 넘은 인간승리의 드라마
제1부에는 일제 치하 황해도 태생의 그가 남북분단 후 북한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서 혈혈단신 월남한 이래 만 서른에 미국 유학을 마칠 때까지 고난을 이겨낸 근면의 성장사를 담았다. 그는 일제 때에는 황민화 교육을 받다가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반공학생으로 몰려 처벌받을 위기에서 고등학생의 나이에 홀로 월남하였다. 그는 월남한 후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고학으로 중등학교를 다니고, 또 6.25전쟁으로 오갈 데 없는 처지에서 미군 하우스보이로 시작해서 미군 통역을 했고, 국군 통역장교로 군복무까지 했으며, 전역 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태에서 미국 유학을 떠나 미국의 명문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미국에서 경제학과 외교학을 배워 1960년대 우리가 경제개발의 시동을 걸 때 꼭 필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위대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서, 그의 공직 생활 증언에 못지않게 주목할만하다.

경제개발기 한국 정부의 대외창구
제2부와 3부에는 경제개발사의 주요 사건, 국면에서의 양 전 장관의 경제외교 활동을 담았다. 그가 관여한 경제개발사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① 1960년대 전반 한미경제협력위원회(ECC)를 통한 미국의 한국 경제정책 교화 노력,
② 1965년경 한국(의 경제개발)에 대한 미국의 시각 호전, 그에 따른 적극적 지원,
③ 월남 기술자파견, 기업 진출,
④ 한국에 대한 선진국들의 협력기구인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의 창설과 운영,
⑤ 1960년대 후반 전자부품업 등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 확대,
⑥ 포항종합제철의 성사,
⑦ 1970년대 초 전천후 농업 개발 및 농업기계화,
⑧ 1970년대 전반의 관광업 진흥,
⑨ 박정희 정부 말기 한미 관계 안정화 외교,
⑩ 제2차 석유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유고(有故) 사태 속의 원유 확보 활동

그는 미국 원조기관 유솜의 한국 측 파트너로서 한미경제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일을 했다. 군사정부 시기 및 민정이양 초기에 경제개발을 우선시하는 한국 정부와 경제안정을 중시하는 미국 정부 사이에 마찰이 있었으나, 경제안정화를 토대로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쪽으로 양측의 의견이 합치되었다. 그는 한미 경제협력위원회(ECC)의 간사로서 그 과정을 총괄했다.
또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으로 열린 1965~1966년의 한미 밀월 국면에서 정상회담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는 1965년에 미국 정부에게서 1억 5,000만 달러의 AID 차관을 신속히 제공한다는 확약을 받았으며, 1966년에는 미국 기업의 직접투자를 늘리겠다는 약속을 얻어 냈다.
또한 1966년부터 한국 기업과 근로자가 월남에 본격 진출할 길을 열었으며, 1969년에는 건국 이후 최대 프로젝트인 종합제철소 건설을 성사시키는 데도 참여했다. 그는 당시의 구미 제철 관련 회사들에게 맡긴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에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고 그를 백지화하도록 했다. 1969년 4월 파리의 IECOK 총회에서 종합제철소 차관을 얻지 못했으나, 이는 우리 정부가 제대로 손도 못쓰고 당한 일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사전 각본대로 진행된 일이었다. 그후 그는 일본 정부와 교섭해서 종합제철소 건설에 대일청구권 자금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1960년대에 그는 경제개발의 사령탑과 국제 무대를 활발히 오가면서 일했다. 그가 경제기획원을 떠나 농림부로 가던 날 한 신문은 그를 ‘한국정부의 대외창구’(《신아일보》, 1971.1.18.)라고 불렀다.
그는 1971년부터는 농업과 관광업의 개발 현장과 대미경제외교와 석유외교의 일선 지휘관으로 뛰었다. 1960년대 말부터 정부는 낙후된 농업과 농촌의 개발에 역점을 두어, 홍수와 한발에서 자유로운 전천후(全天候) 농업 개발과 농업기계화에 본격 착수했다. 그는 농림부 농정차관보로서 금강·평택지구농업 개발 사업이 원활히 완수되도록 힘을 썼으며, 경운기 보급을 중심으로 한 농업기계화 사업에도 일조했다.
또 그는 청와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관광 전담 비서관으로서 관광업의 진흥에도 나섰다. 그는 민간 대기업 계열의 호텔들이 서울에 건설되는 데 산파 역할을 했으며, 설악산과 경주, 제주 중문단지 등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를 개발하는 일도 추진했다. 이후 그는 주미 경제공사로서 1970년대의 어려운 한미 관계를 헤쳐 가는 일을 맡았다.
1979년 5년간의 주미공사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수출입은행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10.26사건으로 서거한 후 최규하 과도 정부에서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부름을 받았다. 밖으로부터 제2차 석유파동이 몰아치고 국내적으로는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음모와 야당과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맞부딪치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석유물량을 확보하는 중차대한 임무로 동분서주했다. 그 성과를 볼 즈음에 신군부의 5.17 쿠데타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경제외교로 고도성장의 문을 열다
이 경제외교는 우리나라 경제개발이 본궤도에 오르고 가속력을 얻을 수 있게 했다.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실시되었으나, 실상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은 이 개발계획대로 진행된 게 아니었다. 초기 3년간 박정희 정부는 시행착오를 반복하다가 기존 계획을 사실상 포기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계획 4년 차인 1965년에야 훗날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대표 브랜드가 되는 수출주도공업화 전략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 수출주도공업화라는 새 길을 찾기까지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기왕의 단순한 투자 일변도 계획을 접고 경제 안정화와 시장 자유화 조치 후 새 길을 찾았다.
1965년 우리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와 월남 파병을 단행한 후 미국 정부에게서 좋은 조건의 공공차관 제공과 미국 기업의 직접투자 촉진 등의 지원을 얻었다. 특히 우리 정부가 미국 및 월남 정부와 긴밀히 협의한 결과, 1960년대 후반에 월남에 근로자와 기업이 대거 진출할 수 있었다. 월남에 대한 수출, 기업의 건설 및 용역 소득, 군인과 근로자의 봉급 소득 등 베트남 특수는 우리나라가 제2차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또 1960년대 중엽 우리의 경제성장이 본 궤도에 오르자 선진국들은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를 만들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차관을 제공하였다. 전자부품 계열의 미국 기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직접투자의 시대도 열렸다. 그 덕분에 국내에서 전자부품공업이 출범하고 가난한 농가 출신의 소녀가 돈을 벌고 기술을 익힐 일자리가 생겼다. 그리고 1960년대 말 우리 정부는 일본 측의 자금 및 기술면의 적극적 협조를 얻어 포항종합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외교는 한국 경제에 고도성장 시대를 열었다. 한국 경제는 1966년에 사상 처음으로 두 자릿수 성장률(12.2%)을 기록했고, 그 후 1968, 1969년에 다시 두 자릿수 성장(11.3%, 13.8%)을 이룩했다. 이 고도경제성장에 시동을 건 것은 공산품의 수출이었다. 경공업 공산품을 중심으로 수출이 1960년대에 연평균 40%씩 성장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수출 경공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다. 경공업품 수출이 급증한다고 해서 경제 전체가 고도성장할 수는 없었다.
고도성장은 박정희 정부가 전(全) 방위로 투자 사업을 펼쳤기에 가능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미 1960년대부터 비료공장·석유화학공업단지·종합제철소 등 대형 중화학 프로젝트와 화학섬유·PVC·전자공업 등의 중형 프로젝트, 그리고 도로·항만·발전소와 수리시설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강력히 추진했다. 이 대규모 투자는 외자 도입과 외화 확보 없이는 불가능했다. 외자를 도입하고 외화를 확보할 수 있게 만든 게 경제외교였다. 이를 통해 한국경제에 고도성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 원고 작성
질문자와 증언자는 2015년 9월~2017년 3월의 1년 6개월 간 20회 넘게 만나서 질문과 답변을 가졌다. 질문자는 그 녹취록을 토대로 원고를 작성하였다. 특히 질문자는 양 전 장관의 증언을 듣고 관련 사실을 확인하면서 경제개발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새롭고 더 심층적인 질문을 해서 더 깊고 풍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이렇게 이어지는 보완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담았다. 또 질문자는 증언자의 증언에 대하여 미 국무부와 세계은행, 우리 국가기록원의 문서와 신문 기사, 각종 회고록 등 객관적 자료를 통해 그 진위를 확인하고 구체적인 사정을 파악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피상적인 서술에 머물거나 자화자찬이나 과장이 심한 그간의 회고록, 자서전, 전기의 문제점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 증언자의 말 및 추천사
양윤세(증언자)
“나는 한국경제 발전의 요소를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 우리 힘으로 살겠다는 국민의 의지, 열망이 강했다. 둘째로 그 의지와 열망에 부응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다. 셋째, 국제협력으로서, 미국과 세계은행 등 세계 자유국가와 국제기구의 큰 지원을 받았다. 나는 이 국제협력을 일으키고 활성화하는 데 내 젊은 날을 바쳤다.”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 경제학)
“이 대담집은 해당 분야의 전문 연구자가 충분한 준비 위에서 과거 경제개발 정책 담당자를 체계적으로 인터뷰한 모범적인 사례요, 성과다. 박정희 정부의 1960년대의 경제개발을 위한 국제협력 확대 작업과 1970년대의 관광업 진흥, 또 1980년의 석유 확보 외교 등에 관한 좋은 정책사 자료집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증언록 소개의 말
차례

제1부 소년, 분단과 전쟁의 격랑을 타고 넘다
01 출생과 가계 내력
02 일제하의 학교 생활
03 공산치하의 박해와 혈혈단신 월남
04 천애고아로서의 남한 생활
05 6.25전쟁 중 미군 통역이 되어
06 육군 통역장교 복무
07 미국 코넬대-뉴욕대-하버드대 유학
08 귀국길

제2부 1960년대, 경제외교로 고도성장의 문을 열다
01 경제기획원 입문
02 '왕초', '불도저장기영 부총리
03 1960년대 전반의 대미(對美) 원조 교섭
04 대일(對日) 경제협력 교섭
05 1965년 경제개발의 궤도 진입
06 월남 진출
07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의 창설
08 투자진흥관이 되어외국인 직접투자의 유치종합제철소를 최종 성사시키다
09 외국인 직접투자의 유치
10 종합제철소를 최종 성사시키다
11 경제기획원을 떠나다

제3부 1970년대, 경제개발의 현장에서
01 농업 근대화의 현장에서
02 관광 진흥의 특명을 받고
03 한미 관계의 안정화를 꾀하다
04 제2차 석유파동과 대통령 유고(有故)의 비상사태 속에서
05 공직 생활 18년의 세 은인

양윤세 연보
주요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소개

증언자 양윤세(梁潤世)는 1931년 황해도 곡산 태생으로 17세에 북한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단신 월남한 후 고학생, 미군 통역, 육군 통역장교를 거쳐 미국 대학의 학부와 대학원에서 경제학과 외교학을 공부했다. 1962년부터 1980년까지 18년의 공직 생활 중 절반은 경제개발의 사령탑인 경제기획원의 과장과 국장으로 근무했으며, 나머지 절반은 농림부 차관보, 청와대 비서관, 주미 경제공사,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봉직했다. 우리나라의 경제개발기에 원조와 차관을 들여오고 직접투자를 유치하는 국제 경제협력을 확대함으로써 고도성장 시대를 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도서소개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는 경제사 연구자인 주익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박정희 정부에서 경제외교 업무를 담당한 양윤세 전 동력자원부 장관을 심층 인터뷰한 대담 증언록이다. 경제외교는 외국의 원조를 얻고 차관을 도입하고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며 수출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대외 교섭으로서 1960~70년대에 한국 경제의 생명선이나 다름없었다. 이 책에는 양 전 장관이 경제기획원의 과장과 국장으로서, 또 주미공사와 동력자원부 장관으로서 미국과 일본, 서독, 월남,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광범위한 국제협력을 불러일으켜서 고도성장 시대를 열었던 이야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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