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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의 유한사상

서한의 유한사상

  • 조원일
  • |
  • 전남대학교출판부
  • |
  • 2017-02-28 출간
  • |
  • 429페이지
  • |
  • 153 X 226 X 21 mm /639g
  • |
  • ISBN 978896849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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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본서는 서한시기 유학사상에 대하여 육가, 가의, 동중서, 양웅의 사상 등을 중심으로 분석 정리한 글이다.
서한시기 전반기라고 하면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뒤부터 한무제 건원(建元) 연간까지에 해당된다.
현재 국내의 학술계에서 양한시기의 유학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한 상황이다. 대부분의 중국유학 관련 연구가 선진유학이나 송명리학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학술계의 현실이다. 양한시기의 유학은 그동안 학술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외면을 받아왔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선진유학이 송명리학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누락되어서는 안 될 관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양한 시기의 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소홀했던 것은 시대상황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국내에서도 양한유학의 연구가 좀 더 활성화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머리말
서한시기 전반기라고 하면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뒤부터 한무제 건원建元 연간까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진나라가 폭정으로 인하여 단명하게 된 것을 교훈으로 삼는 한편 사회적으로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서 통치자들은 황노사상을 기반으로 제국을 통치 하면서 사회와 정치의 안정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이처럼 황노학설은 한나라 초기 통치자들의 선택과 장려 속에서 한나라 초기의 주류사상이 되었던 것이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는 백가쟁명이면서 다양한 사상체계가 융합되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휴식의 시간을 절박하게 염원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육가陸賈의 사상은 당시의 사상적 조류의 영향으로 인하여 유가와 도가 및 음양가 그리고 법가의 사상이 잡다하게 혼재되어 있었지만, 유가와 도가의 사상이 그 주요한 토대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당시의 시대적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했던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육가의 사상과 같은 경우에는 한대 초기의 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의賈誼의 사상과 함께 빠져서는 안 될 관건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 초기 국가의 시스템을 갖추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한무제 시기의 유가사상의 부흥에 있어서 그 단초의 역할을 했던 육가의 사상에 대한 조명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양한시기의 유학사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선진시기의 유학사상이 어떻게 양한시기로 계승되고 발전되는 가에 관련하여 육가의 사상은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한 초기 문제文帝 재위시기에 이르러 서한의 사회적ㆍ경제적 모순 현상은 이미 매우 심각한 지경에 도달하게 된다. 가의賈誼는 당시의 사회적 풍조 즉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추구하며, 백성들이 서로 앞을 다퉈 사치를 일삼고 또한 농업생산 인구가 감소하는 한편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없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가의가 갖게 되는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서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질서의 붕괴와 도덕적 타락에 대한 염려와 국가재정 고갈의 위험성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사항들 외에도 더욱 심각한 문제들은 바로 문제 재위시기에 자행된 민간에서의 불법적인 화폐 주조 및 유통으로 인하여 촉발된 경제시스템의 대혼란이었다. 만일 이러한 혼란을 그대로 방치했을 경우 서한제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서한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가의는 유학사상을 통하여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게 된다.
서한제국은 중기 이후에 들어서 점진적으로 안정된 궤도에 오른 반면 학술과 정치의 경계는 매우 모호해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점진적으로 만연되어 특히 전제정치체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는 통일된 제국이 건립된 후부터는 학술의 자유는 그 빛이 퇴색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은 자신의 학설을 확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학설을 황제에게 추천했으며, 더한 경우는 자신의 학설을 황제의 통치에 필수 불가결한 정책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사상과 현실사무의 관계는 융합의 양상을 띠게 된다. 동중서董仲舒의 사상 역시 이러한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진다. 또한 동중서의 사상은 현실 문제를 그 사상의 귀착점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추상적인 천인관계天人關係의 문제를 자신의 사상체계 정립의 기초로 삼는다. 동중서는 서한시기의 사상가로 그가 제창한 유가사상의 학설만을 존숭해야 한다고 하는 ‘독존유술獨尊儒術’은 중국학술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공자, 주자와 함께 동중서를 중국학술사상사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주요한 삼대 사상가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동중서 사상의 체계는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음양오행학설이 그 기본적인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로 특징을 지울 수 있는 천인관계론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중서는 이러한 이론들을 바탕으로 선진유학의 인성론, 윤리론, 정치론 등의 문제에 대한 해석 작업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서한제국 말기 성제 재위시기에 장락궁과 임화전, 그리고 미앙궁의 동사마문에 화재가 발생하고, 다시 몇 개월 뒤에 패릉의 성덕원 동궐에 또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의 한나라 조정은 성제의 모후인 왕태후의 동생 세 사람이 차례로 정권을 장악하여 왕씨 일족이 전횡을 일삼고 있었는데, 이러한 화재는 왕씨 일족의 전횡에 대한 경고이자 그들이 장차 국가에 큰 피해를 준다고 하는 징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서한말기 대변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던 양웅揚雄은 당시 사회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형태의 사건들과 관련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제기한다. 특히 그는 당시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여러 종류의 학설이나 주장들이 성인의 가르침이나 도리에 위배되며, 심지어는 일반 백성들을 호도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이러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법언』을 저술했다. 양웅은 『법언』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역사ㆍ문화ㆍ교육ㆍ군사 등 제반 제도와 문물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정치와 역사 및 교육에 관한 그의 사상은 눈여겨 볼만 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국내의 학술계에서 양한시기의 유학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중국유학 관련 연구가 선진유학이나 송명리학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학술계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양한시기의 유학은 그동안 학술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외면을 받아왔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선진유학이 송명리학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누락되어서는 안 될 관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양한 시기의 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소홀했던 것은 시대상황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국내에서도 양한유학의 연구가 좀 더 활성화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자그마한 저작을 내놓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본서는 서한시기 유학사상에 대하여 육가, 가의, 동중서, 양웅의 사상 등을 중심으로 분석 정리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제1장은 서한 초기의 유학사상에 대하여 서한 이전의 시경학 현황에 대한 분석과 서한 초기 시경학의 지위에 대한 고찰 및 서한 초기 유학과 제자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글은 원래 『온지논총』 제24집(2010년)에 게재했던 문장을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제2장은 육가의 유학사상에 대하여 인성론에 대한 고찰과 역취순수 이론에 대한 조명 및 진나라 멸망에 대한 반성적 회고를 담은 역사철학에 대한 분석 그리고 천도와 기론을 중심으로 한 천인관계론에 대한 서술과 무위의 숭상과 덕치를 제창한 정치론에 대한 분석 및 군주의 도덕수양과 그것의 효용성을 살펴본 군주론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글은 원래 『퇴계학논총』 제28집(2016년), 『중국학논총』 제48집(2015년), 『온지논총』 제41집(2014년), 『온지논총』 제45집(2015년), 『동서철학연구』 제79집(2016년), 『동양철학연구』 제88집(2016년)에 게재했던 문장들을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제3장은 가의의 유학사상에 대하여 인성론에 대한 고찰과 국가 기간산업 육성 및 각종 규제에 대하여 주장한 정치론에 대한 조명 그리고 예禮에 대한 연원과 예의 가치와 효용성 및 예의 특성을 분석한 예론禮論에 대한 서술을 하였으며, 또한 중농억상의 주장과 민간의 화폐주조 금지정책을 표방한 경제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글은 원래 『동양철학연구』 제88집(2016년), 『동양철학연구』 제84집(2015년), 『동서철학연구』 제73집(2014년), 『동양고전연구』 제50집(2013년)에 게재했던 문장들을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제4장은 동중서의 유학사상에 대하여 천인감응설의 이론적 기반과 천인감응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통한 천인관계론에 대하여 조명을 했으며, 하늘과 군주의 권력 및 백성에 대한 통치방식 그리고 군주와 지식인의 관계설정과 제후에 대한 정책과 대외정책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 정치론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글은 원래 『중국학논총』 제38집(2013년), 『중국학논총』제42집(2014년)에 게재했던 문장들을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제5장은 양웅의 유학사상에 대하여 인성론에 기초한 교육론에 대한 서술 및 교육의 기능과 목표 그리고 오경과 공자의 가르침에 근거한 교육을 중심으로 교육사상에 대하여 조명을 했으며, 아울러 성인의 통치와 예악교화를 통한 치국에 대한 분석을 통한 정치사상에 관한 논의를 서술했으며, 또한 도덕실천의 문제와 성인을 본받은 본성의 수양 및 군자의 덕에 관한 분석을 한 인성론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글은 원래 『퇴계학논총』 제24집(2014년), 『중국학논총』 제44집(2014년), 『중국학논총』 제45집(2015년)에 게재했던 문장들을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필자는 중학교 시절에 학급의 독서부장을 하면서 많은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시기는 필자가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던 매우 소중한 시간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당시에 읽었던 고대 중국의 다양한 고전들은 이후 필자의 진로를 중국학자로 만든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고전에 대한 심취는 필자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중국 유학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한국과 중국은 아직 수교가 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북경대학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은 그저 막연한 염원이었다. 그래도 막연히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하면서 대학에 진학 후 4년 동안 꾸준히 중국어 공부를 하였으며, 동서양의 고대 지적전통에 대한 공부 역시 소홀히 하지 않으며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드디어 타이완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강산이 한 차례 바뀔 세월동안 타이완 중국문화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한 후 중국의 북경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유학 기간 동안 타이완과 중국의 석학들로부터 엄정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자세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 이러한 가르침은 평생의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주신 타이완과 북경의 은사님들에 대하여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또한 타이완과 북경에서 함께 유학을 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학문과 인생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부족한 후배를 일깨워 주셔서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들어주신 도중만, 박영종 선배님께 평생 감사하는 마음을 올린다. 그리고 장기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각박한 현실에 직면하여 좌절하고 있는 후학에게 대학 강단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시고, 학계로 이끌어 주셨으며 부족한 후학을 항상 따뜻하게 배려해주셨던 은사님과 같은 권용옥 선생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의 뜻을 올린다. 이러한 분들의 소중한 가르침과 질책이 있었기 때문에 후학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대학원생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부하는 사위를 항상 신뢰해주시고 늘 변함없이 든든한 지주가 되어주신 장인ㆍ장모님께 깊은 감사의 뜻을 올리며 두 분께서 항상 건강하시길 염원하는 마음을 올린다. 그리고 공부하는 남편을 한결같이 성원해주었으며, 힘들거나 어려울 때를 막론하고 항상 곁에서 함께 고생을 감내해준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과, 어린 시절에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주지 못한 무심한 아빠를 묵묵히 기다리며 바르게 커준 딸 수현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전한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조그마한 책을 바친다.

2016년 겨울
남녘땅 屯德齋에서
조원일

책속으로 추가
공자는 춘추시대 후기에 생존했는데 이 시기는 『시경』에 대한 연구와 활용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시경』의 인식에 대하여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언급은 공자의 『시경』에 대한 강령성의 주장임과 동시에 그가 『시경』의 도덕적 윤리적 효용에 대하여 매우 중요시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공자는 『시경』의 정치적 효용에 대해서도 강조하여 “시에서 인생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게 되고, 예로써 자립하게 되고, 음악에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얘들아 왜 시경을 공부하지 않느냐? 시경의 시들은 사람의 감흥을 일으켜 줄 수 있고,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하며, 남과 잘 어울릴 수 있게 하고, 잘못을 원망할 수 있게 하며, 가까이는 아버지를 섬기게 하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게 하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도 많이 알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공자의 이러한 ‘시경학’이론은 삼백 편의 시가 시에서 경전으로 바뀌어 가는데 있어서 관건적인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 중기의 저작인 『맹자孟子』에 수록되어 있는 『시경』의 작품들이 논증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맹자는 『시경』에 대하여 매우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심도 있는 연구를 했었다. 사마천의 “일선에서 물러나 만장 및 다른 제자들과 시경과 서경을 차례에 따라 서술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맹자’ 일곱 편을 저작했다.”라는 언급과 조기趙岐의 「맹자제사孟子題辭」에 있는 “유학의 도리를 잘 익혔는데, 특히 시경과 서경에 뛰어났다.”라는 언급 속에서 알 수 있듯이 맹자는 『시경』의 효용을 매우 중시했다. 그러나 맹자는 『시경』을 인의仁義의 도리와 연계하여 유가 사상의 색채를 띤 방향으로 해석함으로써 『시경』의 유학화를 더욱 심화 시켰다.
맹자의 뒤를 이은 순자는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에 『시경』을 외우는 것과 『예기禮記』를 정독하는 것과 직접 연결시켜 “학문이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가? 학문을 하는 순서는 먼저 시경과 서경 등 경전을 외우는 데서 비롯하고, 『예기』를 정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며, 그 목적은 군자가 되는 것을 비롯하여 성인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순자荀子』 속에 『시경』에 관하여 기록된 것은 대부분 예禮를 중심으로 하여 언급된 것이다. 순자는 ‘육경六經’에 기록되어 있는 성인의 뜻과 행적 등은 천하의 도道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일체의 언론과 효ㆍ불효 등의 명목은 다 성왕을 모범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사실을 제기한다. 또한 순자의 저작 곳곳에서 ‘육경六經’을 인용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으며, 『시경』을 인용한 곳만 해도 무려 82 곳이 있다. 이는 전국시대 제자백가 가운데 순자가 가장 많이 『시경』을 인용한 사상가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이르는 문헌들 속에 공자와 그의 후학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시경』을 학습하고 전수한 사실들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전국시대의 중ㆍ후기에 이르러 『시경』은 점진적으로 유가 학파의 경전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도가를 비롯한 법가 등의 학파로부터 유가가 공격을 받게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즉 장자나 한비자 같은 경우 유학에 대한 공세의 돌파구로서 이론과 실천적인 측면에서 『시경』을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방법을 취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자莊子』에서는 유가에서 언급하는 『시경』과 『상서尙書』를 신랄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한비자韓非子』에서는 “유가는 학문으로써 법률을 문란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는 군주가 “학문을 일삼으며, 논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예우 해주면 국가가 멸망하게 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의 “학문”은 유가에서 떠받들고 있는 『시경』과 『서경』 등의 경전을 의미한다.
진시황 시기에 자행된 ‘분서갱유’ 때 『시경』은 제거되어야 할 유가 경전 가운데의 하나였다. 이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의 “『시경』이나 『서경』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저자거리에서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하며, 옛날 것으로 현재의 것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자는 모두 멸족시키며, 이를 알고도 검거하지 않는 관리도 같은 죄로 다스리십시오.”라는 언급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상과 같이 『시경』은 유가 경전의 전습과 연구의 전범이 되어 한나라 시기의 유학의 기본 상황을 반영하는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3. 서한 초기 시경학의 지위
선진시기에 있어서의 유학은 매우 유명한 학문의 하나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지만, 그 발전은 그렇게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유학은 묵가와 법가 등의 여러 학파들로부터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후일 진시황에 의해 자행된 ‘분서갱유’는 유학에 더욱 심한 타격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결코 유학의 전파에 심각한 장애요인이 될 수가 없었다.
한나라가 건국된 후 ‘시경학’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한다. 『한서漢書』에는 “시경에 대하여 언급하는 사람에는 옛날 노나라 땅의 신배공과 옛 제나라 땅의 원고생 그리고 옛 연나라 땅의 한태부가 있다.”라는 기록과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이 “모씨시와 좌씨춘추 박사를 설립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 초기에 『시경』을 전수한 사람은 『한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신배공, 원고생, 한태부, 유덕 네 사람이다.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제각기 다른 지역에서 출현하였는데 이는 당시 『시경』을 배우는 사람이 많았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학습자들이 분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나라 시기에 가장 먼저 출현한 『시경』의 판본은 『노시魯詩』인데, 이는 서한西漢이 멸망될 때까지 그 영향력이 가장 컸던 판본이다. 『노시』라는 이름은 전수한 사람의 출신지에 맞춰서 정해진 것으로 신공에서 비롯되었다. 『사기』에는 “신공은 옛날 노나라 땅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에는 “신공이 전한 시경을 노시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역대로 학자들이 말하는 『노시』는 신공이 전수한 『시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 초楚원왕 유교와 함께 부구백에게 『시경』을 배웠다. 한漢나라가 건국된 뒤 고조가 노나라 땅을 지나갈 때 신공은 학생의 신분으로 선생님을 따라서 노나라 남행궁에서 고조를 알현했다. 여태후가 집권하던 시기에 부구백은 장안에 있었는데, 초원왕이 그의 아들 유영을 신공과 함께 부구백에게 학업을 마치게 했다. 초원왕이 죽고 유영이 왕위를 계승하자 신공을 태자 유무의 스승으로 모셨다. 유무는 학문연마를 좋아하지 않아 신공을 난처하게 했다. 후에 유무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공을 잡아들여 노역장으로 보냈다. 신공은 수치감을 느끼고 노나라 땅으로 돌아가 집에 은거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평생 동안 대문 밖을 나가지 않는다. 또한 손님도 받지 않고 왕명으로 부를 때만 문 밖으로 나섰다.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 학생만 해도 천여 명이 넘었는데 신공은 『시경』의 뜻을 구술로만 가르쳤을 뿐 문장으로 남기지 않았다. 혹자는 문장이 있었으나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위에 인용한 문장을 비춰볼 때 신공이 『시경』을 배움으로써 한나라의 상류층 인사들과의 교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나라 초기의 상류사회에는 유학을 숭상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공이 생존하던 시대는 한나라 초기의 몇 십 년 정도였다. 신공은 초원왕楚元王과의 교류 외에도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및 무제武帝와도 교류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서』의 “난릉 사람 왕장이 신공에게 『시경』을 배워 경학에 통달했다. 그래서 경제 치하에서 태자의 소부의 직분을 맡았으나 후에 파면된다. 무제가 막 즉위했을 때 왕장은 궁중에서 경비를 설 수 있게 해달라고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린 끝에 낭중령에 임명되었다. 대군 사람 조관 역시 신공에게 『시경』을 배우고 후에 어사대부의 지위에 오른다. 조관과 왕장은 조정에 명당을 건립하여 제후들이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하자고 주청 하였으나 이루지 못해 황제에게 스승을 천거했다. 그래서 황제는 비단 묶음과 벽옥을 포함한 예물을 지닌 관리들과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보내 신공을 모셔오게 했다. 두 제자 역시 수행했다. 신공이 도성에 이르러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는 신공에게 국가의 안정과 동란에 대해 물었다.”라고 하는 기록에 잘 드러나 있다.
『제시齊詩』는 원고생이 전수했다고 할 수 있다. 『한서』에는 “무제가 처음 즉위하자 현명하고 훌륭함을 들어 원고생을 다시 불렀다. 그러나 여러 유생들이 모두 원고가 늙었다고 헐뜯어 말하자 그만두고 돌려보냈다. 이때 원고는 이미 90세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만일 무제가 즉위한 시기에 원고생의 나이가 정말로 90세였을 경우 그는 신공과 마찬가지로 한漢나라 초기에 생존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원고생의 인생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사건은 ‘돼지 찌르기’였을 것이다.
『사기』의 “두태후竇太后는 노자라는 책을 좋아하여 원고생을 불러 노자의 도道를 물었다. 원고생이 ‘그것은 미천한 사람들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두태후가 노해서 ‘어떻게 사공이 죄수들의 책을 썼다는 말인가?’라고 말했다. 원고생을 우리에 넣어 돼지를 찌르게 하였다. 경제는 태후가 비록 노했다고 할지라도, 원고생이 바른 말을 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곧 예리한 칼을 원고생에게 주어 우리에 내려가 돼지를 찌르도록 하였다. 한 번 찔러서 돼지의 심장을 바로 적중시키니 돼지는 쓰러져 죽었다. 태후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것으로 다시 죄를 논하지 않았다. 원고생은 얼마간 집에서 쉬었다. 경제는 원고생이 청렴하고 정직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청하왕의 태부로 삼았다. 원고생은 오랫동안 태부로 있다가 병이 들어 면직했다.”라는 기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두태후竇太后를 필두로 하는 ‘황노학’ 추종세력이 점차 증대하여 주도적인 지위를 점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쓰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 가운데 “미천한 사람들의 말”과 “사공이 죄수들의 책을 썼다”는 문구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해석이 분분한 상황이다. 노간勞干은 「論 ‘家人言’ 和 ‘司空城旦’」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증을 했는데 비교적 정확한 고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두태후가 언급한 요지는 ‘미천한 사람들’과 ‘사공이 죄수들의 책을 썼다’는 말로써 이는 모두 신분적인 측면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노간勞干은 “ ‘미천한 사람들의 말’은 천자나 제후들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쓴 책이 아닌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대중적인 언어로 쓴 책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두태후는 『노자老子』가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저술된 책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죄수들의 책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반문을 했어야만 했다.” 이와 같이 볼 때 문제의 핵심은 바로 『노자』라는 책의 성격에 있는 것이다.

목차

머리말 / 4
제1장 서한 전기의 시경학 / 17
제2장 육가의 유학사상 / 40
제3장 가의의 유학사상 / 193
제4장 동중서의 유학사상 / 296
제5장 양웅의 유학사상 / 347
참고문헌 / 419
찾아보기 / 423

저자소개

저자 조원일은 청풍명월의 고장인 대전에서 출생하고 성장기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동서양의 고전을 탐독하며 보낸다. 특히 당시에 읽었던 고대 중국의 다양한 고전들은 이후 필자의 진로를 중국학자로 만든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중국 고전에 대한 심취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중국 유학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그 후 충남대학 철학과에 진학한 후 4년 동안 꾸준히 중국어 공부를 하였으며, 동서양의 고대 지적전통에 대한 공부 역시 소홀히 하지 않으며 보냈다. 대학에 다니다가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대학에 복학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臺灣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중국 유학의 꿈을 좀 더 구체화 시킨다. 대학 졸업 후에는 臺灣으로 유학을 떠나 中國文化大學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뒤에 다시 중국 본토로 유학을 가서 北京大學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8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남서울대학교 중국학과를 거쳐 현재 전남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장을 겸직하고 있다. 지난 2012년도와 2014년도에 전남대학교 교육우수교수에 두 차례에 걸쳐 선정 되었다. 2016년에는 제20회 용봉학술상을 수상 받았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浙江大學 한국연구소의 객원연구원 및 寧夏大學 학술고문을 겸직하고 있으며,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연구회 자문위원 역시 겸직하고 있다. 그 동안 집필한 저서로는 『東吳哲學』, 『哲學ㆍ宗敎與人文』(中國出版), 『半生緣』(영화로 배우는 중국어), 『맹자의 도덕사상과 정치사상』, 『고대중국의 사유세계』, 『동아시아의 유학사상』, 『선진유가의 사상』, 『맹자의 철학사상』, 『공자의 철학사상』, 『순자의 철학사상』, 『맹자와 도덕의 이상』 등이 있으며, 외국에 발표한 논문으로는 「韓昌黎的天人關係論」 등을 포함하여 다수가 있으며 국내에 발표한 논문에는 「孟子의 經濟思想에 관한 硏究」 등을 포함하여 다수가 있다. 고대 중국의 철학사상과 중국의 전통신화 분야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또한 고대 중국의 역사와 인문지리 및 전통문화 그리고 동남아시아 화교문화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도서소개

서한시기 유학사상에 대하여 육가, 가의, 동중서, 양웅의 사상 등을 중심으로 분석 정리한 『서한의 유한사상』. 선진유학이 송명리학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누락되어서는 안 될 관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양한 시기의 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소홀했던 것은 시대상황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국내에서도 양한유학의 연구가 좀 더 활성화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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