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 담기 close

장바구니에 상품을 담았습니다.

선진 법사상사

선진 법사상사

  • 김지수
  • |
  • 전남대학교출판부
  • |
  • 2014-09-23 출간
  • |
  • 446페이지
  • |
  • 153 X 223 mm
  • |
  • ISBN 9788968491429
★★★★★ 평점(10/10) | 리뷰(1)
판매가

20,000원

즉시할인가

19,800

배송비

2,300원

(제주/도서산간 배송 추가비용:3,000원)

수량
+ -
총주문금액
19,800

이 상품은 품절된 상품입니다

※ 스프링제본 상품은 반품/교환/환불이 불가능하므로 신중하게 선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판사서평

“동아시아 법사상의 원류는 동이족東夷族의 법사상이다!”
본서에서 연구한 ‘선진先秦’ 시대의 대표적인 유儒ㆍ묵墨ㆍ도道ㆍ법法 4가家의 여섯 분 성현의 법사상은, 명실상부하게 시대를 앞서가며 동서고금을 통해 영원히 인류의 희망의 빛이 될 ‘선진先進’ 법사상임을 확신한다. 그런 성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법사상을 알아 마음에 새기고 계승하여, 미래의 새로운 법문화의 창달과 발전에 활용하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실로 오랜 세월의 연찬과 기다림을 거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펴내게 되었다. 당시 중원의 통일을 꿈꾸던 성현들의 사랑과 슬기가, 지구촌으로 넓혀진 인류 공동체의 대동화합과 천하태평의 실현에 크게 이바지하길 바라는 염원에서 말이다.
이러한 필자의 소탈한 뜻과 앞에서 밝힌 순박한 문명역사관을 염두에 두면서, 아래에 펼쳐질 여섯 성현의 법사상 본론을 읽어주시면, 필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보람과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을 펼쳐 읽게 될 독자들과 종이에 쓰인 글을 통해 만나는 정신교감의 인연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서론序論 머리글을 마친다.

동아시아 법사상의 원류는 동이족東夷族의 법사상이다!”

왜 ‘선진 법사상사’인가? 이 책을 보고 펴드는 분들은 아마도 이런 궁금함이 퍼뜩 들 것이다. 나아가 “김지수가 왜 이 책을 썼을까?”라고 궁금해질지 모르겠다. 그렇다. 먼저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책 제목을 굳이 ‘선진 법사상사’라고 붙이는 연유에 대해, 속내를 조금 풀어 보여드려야겠다. 그러려면 학문하겠다고 대학원 가게 된 배경부터 좀 말하자!
전주고 다닐 때 성적이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라 서울대 법대에 지망해서 간신히 합격했다. 입학 초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10.26과 5.18이 연달아 터지면서, 침울해진 촌놈한테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까지 겹쳐,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에 차분한 안정과 적응이 무척 어려웠나 보다. 2학년 겨울방학 때 남들 하는 대로 ‘고시(사법시험)’ 1차 공부를 시작했는데, 보름 만에 체력이 바닥나 배탈과 무기력이 덮쳐 더 이상 책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3학년 때 내가 좋아하는 한문공부나 실컷 해보자고 중문학 부전공을 신청해 1년간 오로지 골몰했다. 재미있으니 푹 빠졌고, 대학원도 중문과로 가려고 맘먹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중문과 이병한 선생님께서 전공을 내팽개치는 게 아깝다며, 법학과로 진학해 전공과 부전공을 함께 살림이 좋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강추하시는 바람에, 5학년 막판에 다시 대학원 법학과 입시준비를 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합격하자마자 입학도 하기 전에 ‘한국법제사’를 전공하겠다고 박병호 교수님을 찾아뵙고 뜻을 여쭙자, 대뜸 집안형편이 어떤지 물으셨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님 행상하시는 사실을 여쭈니, “집안형편도 어려운데 고시 봐서 출세나 하지!”라고 시큰둥하게 답변하셨다. 사실은 당신 체험에서 학문의 길, 특히 한국법제사의 앞길이 얼마나 험난할지 너무도 잘 아시기에, 도대체 학문연구의 조건이라곤 ‘한문 해독’ 능력밖에 없는 풋내기 촌놈한테, 가시밭길을 권하고 싶지 않으셨으리라!
허나 어머님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나 혼자 독단으로 결정한 다음 치른 시험에 합격했으니, 뒷감당은 어찌 되었든 일단 입학해서 박병호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선택해 연구실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했다. 형편이 어렵다고 조교 자리에 일찍 추천 받아, 두 가지 일을 아우르다 보니 체력이 바닥나고, 만성간염을 앓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3년만에 ‘조선조 전가사변률全家徙邊律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헌데 석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우리 전통 법전과 사료를 한문원전으로 뒤지다 보니, 중국의 전통법을 알지 못하면 수박 겉핥기에 그치겠다는 느낌이 강렬해졌다. 우리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중국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박사 주제는 중국으로 정했다. 허나 한국에서 중국을 깊이 연구하기가 어려워, 이병한 교수님의 적극 추천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중화민국 대만대학臺灣大學 법률학연구소에 유학遊學을 가게 되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던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어렵사리 3년을 공부하면서, 채식과 수행의 인연도 만나고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발판도 마련하여 귀국했다. 다시 복학해 박사과정을 마치고 2년만에 ‘전통 중국법에서의 정情리理법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전후로 엄청난 우여곡절과 시련을 거치면서, 학위 취득 7년만에 2001년 가까스로 전남대 법대에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지금까지 내 할 일을 해왔다. 석박사 연구하면서 눈여겨두었던 주제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정토불교 염불법문 번역소개와 불경공부를 병행하는 작업이다.
지도교수께서는 나한테 우리나라 법제사를 연구하지 않고 중국 걸 한다고 핀잔을 주셨고, 그게 사실은 험난한 가시밭길의 빌미가 되었다. 유학 후 “관자管子의 법사상”을 정리해 발표하고, 박사 취득 후 “老子의 무위자연 법사상”을 발표했는데, 교수가 되면서 공자의 법사상을 발표할 기회가 찾아왔다. 몇 년 전부터는 세 편의 논문에 기본 얼개를 덧붙여 ‘동양 법사상사’를 처음 개설해 강의하면서, 얼른 교재 겸 연구서를 내야겠다고 다짐하며 별러 왔다. 그래서 정교수 승진 논문으로 “장자의 법철학”을 완성해 발표하고, 작년 겨울 “묵자의 법사상”도 정리해 발표했다. 올 2학기 법학전문대학원과 법학과 ‘법사상사’ 과목 교재를 목표로 정하고, 여름방학 동안 맹자의 법사상을 정리해 두 편의 논문으로 발표해, 최종 여섯 성현의 법사상으로 책을 묶기로 하였다. 순자나 한비자 같은 중요한 위인이 빠져서 아쉽지만, 이 책의 인연은 여기까지로 정한다.

“동아시아 법사상의 원류는 동이족東夷族의 법사상이다!”
이 책을 마무리하는 막바지에 감사하게도 활안活眼 스님의 불교방송을 들은 인연으로 문득 찾아온 새로운 일깨움이다. 한국법제사에서 출발한 나의 학문연구 역정歷程이 막바지에 결국 다시 우리 한겨레 동이족의 역사철학으로 귀환한 것이다. 지도교수께서 우리나라 법 연구하라고 그렇게 채근하시고, 내가 우리 걸 깊이 알기 위해서 중국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파고든 것인데, 결국엔 한 바퀴 돌아 처음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앞으로 법제사 및 법철학의 마무리 정리 작업은, 불교의 법사상을 곁들여, 바로 한겨레의 뿌리 동이족東夷族의 역사와 사상을 법의 관점에서 찾아 비추어보는 일이다. 올 초 펴낸 “공자가 들려주는 관계의 미학” 끄트머리에서 선현들의 역사정신을 정리해 내 역사관을 대강 피력했거니와, 지난 6월 뜻있는 교수ㆍ학자들이 모여 ‘세계환단학회’를 창립해 새로 돛대를 펴고 발돋움했단다. 이제 인연 있는 분들과 함께 서로 협력해 “홍익인간弘益人間”과 “리화세계理化世界”를 꿈꾸고 펼쳐온 우리 동이족의 어질고 착한 숨결과 발자취를 찾아보고 싶다.
역사란 원래 권력을 쟁취한 승자가 기록한 것이므로, 누락과 삭제, 파괴와 왜곡으로 뒤범벅이기 십상이다. 특히 중국의 역사왜곡은 몹시도 심각한데, 사실 사마천의 사기와 그 이전의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 역사부터 그래왔다. 지금 중국의 서북공정 및 동북공정을 보라. 티벳과 위구르를 강제 편입한 걸로도 모자라, 남사군도까지 마수魔手를 뻗치고 발해와 고구려까지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지 않은가? 한번 중국의 영토와 역사 안에 들어온 적이 있는 모든 민족과 영역의 역사는 모두 자기네 역사라는 논리다. 그렇게 치면 징기스칸이 수백년 지배한 중국 전역은 몽골의 역사가 되고, 만주족이 호령했던 중국 전역은 또한 만주족의 역사가 될 것이다. 몽골과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했듯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이족이 중국의 동해안과 내륙 깊숙이까지 정착해 선진문명을 전파했는데, 그때그때 지배층의 정치이념에 의해 이전 역사기록을 깡그리 지우고 없애온 것이다. 특히 한무제가 대대적인 대외정벌을 벌이면서 동중서를 내세워 유가독존儒家獨尊의 통치이념과 삼강오륜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한족 중심으로 역사와 철학사상을 왜곡했는데, 그 배경에서 사마천의 사기도 쓰였다.
그런데 최근 고고학의 발굴과 함께 더 이상 속이거나 거짓말할 수 없는 명백하고 확실한 역사유물이 쏟아져 나와 동이족의 찬란한 선진문명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문漢文의 창시자로 알려진 창힐蒼?이 처음 만든 새발자국(鳥跡) 문자도 우리 고조선의 신치神誌글자인 사슴발자국(록도鹿圖) 문자에 몇 글자 더 보탠 거라고 밝혀졌으며, 은허殷墟에서 대량 출토한 갑골문甲骨文도 우리 동이족의 문화작품이란다. 왜냐하면 상商(殷)나라를 창업한 탕湯 임금이 동이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나라가 망하면서 왕족 출신 기자箕子가 조상의 뿌리인 조선으로 귀향歸鄕해 교화를 펼친 것이다. 아니, 아무런 연고나 뿌리도 없는 망국의 유민遺民이 낯선 나라에 가서 지배세력이 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사실 요堯 임금한테 천하를 선양禪讓받았다는 순舜 임금도 동이족이었다고 전하며, 순임금 때 대법관을 맡아 중국고대 법제와 법사상의 기틀을 마련한 고요皐陶도 동이족의 수령이란 게 중국 기록의 정설이다. 고요의 유명한 법언法諺은 3~4천년에 걸쳐 중국 및 동아시아 각국 전통법문화의 정수精粹이자 전통법의 핵심정신으로 살아있다.

“황제의 덕은 허물이 없어, 신하들을 간명하게 대하고 백성들을 관대히 통솔하소서. 벌은 자손에게 미치지 말고, 상은 후세까지 이어주며; 과실을 용서함에는 큰 것을 가리지 말고, 고의를 처형함에는 작은 것도 빠뜨리지 마소서. 죄가 의심스러울 때는 되도록 가볍게 처리하고, 공이 의심스러울 때는 되도록 후하게 논하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할 바에는, 차라리 무도한 죄인을 놓치는 편이 낫습니다. 이렇게 생명을 사랑하는 덕이 백성의 마음에 흡족히 스며들면, 인민이 저절로 관리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또 중국의 정사正史인 진서晉書에는, 순임금의 뒤를 이은 “우禹임금이 서강西羌 출신”이고, 周나라 왕업의 기틀을 다진 “문왕文王은 동이東夷 출생”이라는 기록이 무려 네 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문왕의 아들로서, 하례夏禮와 은례殷禮를 바탕으로 주례周禮를 제정한 주공周公도 당근! 동이족이다. 주공은 공자가 자나 깨나 그리며 꿈에라도 뵙길 고대하던 성인이다. 주례는 춘추전국까지 살아있는 법규범으로서 한漢 이후 율령체제의 골간骨幹을 이루어 청말까지 이어졌고, 아직도 동아시아 인민의 무의식에 뿌리 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은나라 때까지는 고조선이 줄곧 산동반도 일대까지 지배했으며,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창업한 강태공도 그곳 동이족 출신이란다.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주나라가 영역을 확장하였고, 산동 지역은 주공을 봉한 로魯나라와 강태공을 봉한 제齊나라가 들어서게 되었다. (참 흥미롭게도, 내가 대만대학 유학 시 등산 가서 대륙에서 건너온 분을 만나 중국어로 한참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분이 내 말씨가 완연히 산동말씨라는 것이다. 산동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같은 동이족의 터전임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까지 대륙에 가본 적도 없고, 북경에서 자란 조선족 교포한테 중국어를 좀 배운 적이 있을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제 환공을 도와 춘추 오패의 첫 패권을 차지한 관중管仲도 동이족 출신이고, 공자와 맹자도 동이족이다. 공자의 조상은 은나라가 망한 뒤 봉해진 송宋나라의 시조 미자계微子啓의 왕위를 물려받은 아우 미중微仲의 직계 후손으로 송 귀족이었는데, 내란으로 피살하면서 자손이 로魯나라로 망명했단다. 동이족 은나라의 후손이니 동이족 혈통을 이어받은 것은 물론이다. 공자가 그토록 동이를 예찬한 이유를 이제 조금 알겠다. 맹자의 조상은 로魯나라 환공桓公의 세 서자(三桓)인 맹손孟孫ㆍ숙손叔孫ㆍ계손季孫씨 가운데, 맹손씨의 지손支孫이 姓을 ‘孟’으로 바꾸어 ‘추鄒’로 이주했다고 하니, 역시 주공의 후손으로 동이족의 핏줄과 정신을 물려받았다.
그러고 보니, 본서에서 연구한 여섯 성현 가운데, 관중ㆍ공자ㆍ맹자는 우리 동이족인 셈이다. 로자老子는 진陳 나라 사람으로 주나라 도서관장을 맡았다고 하니 동이족인지 알 수 없다. 묵자墨子는 신비에 싸여 피부가 검어 외국인이란 설도 있으나, 송宋나라 대부 출신으로 몰락해 로(魯)나라로 이주한 수공업자라는 통설에 따른다면, 송宋나라 몽蒙(河南 商丘) 출신인 장자莊子와 함께, 공자처럼 동이족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 중국 역사문화의 절반 이상은 동이족의 유물이니, 본서도 대략 그 비율에 합치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필자나 본서가 한겨레 동이족의 민족주의를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지워지고 왜곡되어온 역사의 본래모습을 찾아, 민족정기와 역사정신을 되살리고자 할 뿐이다. 나아가 중국 및 일본의 끈질긴 역사왜곡은 물론, 국내에서도 사대주의 모화慕華사상에 젖거나 신라 중심으로 편협하게 치우쳐 고구려와 백제를 말살해온 역사왜곡, 그리고 실증사학이란 명분 아래 이병도 이래 일제 식민사관을 물려받아 한겨레의 역사와 정신을 말살하려는 주류 역사학의 삐뚤어진 눈과, 미국 제일주의로 치닫는 한심한 친미주의의 사팔뜨기를 바로잡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그동안 잊히고 사라진 우리의 얼과 자취를 되찾아 밝히고자 할 따름이다.
그러니 다소간 한겨레 동이족의 예찬론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읽어보면 알겠지만 본서의 내용은 순전히 현전하는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객관 공정한 안목으로 착실하게 실증한 연구다. 적어도 본서는 동이족과는 전혀 무관한 학술연구이자 교양고전이다. 다만, 제목은 ‘중국’에 한정하지 않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선진’ 법사상사로 정했는데, ‘선진先秦’과 ‘선진先進’의 뜻을 아우른 중의법重義法을 따랐다. 당초 나의 연구의식이 뇌리에 깊이 새겨진 인연인지, 박사학위 논문 주제에 ‘중국’이란 단어를 썼을 뿐, 그 뒤로 펴낸 책이나 연구논문의 제목에는 줄곧 ‘전통법’이나 ‘전통법문화’라는 포용력 있는 용어를 써왔다.
사실 ‘東夷’는 동쪽 큰 활 잘 쏘는 종족이란 뜻이며, ‘오랑캐’란 폄훼의 의미는 나중에 동이족에 대한 경외심敬畏心과 중화족의 열등감이 어우러져 굴절된 역설의 소산이다. ‘중화中華’나 ‘이적夷狄’의 차별이나 편 가르기는 아주 야비하고 저열하며 편협한 못난 열등의식의 발로일 따름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상 고대 그리스로마의 ‘바바리즘’부터 유대인의 선민의식(헤브리즘)과 한족漢族의 중화의식, 그리고 세계대전의 원흉이 된 히틀러의 게르만 우월주의 나치즘에 이르기까지, 편협한 극단적 민족우월주의는 자기 민족의 열등감을 감추려는 위장(camouflage)전술과 역설적인 자아기만(최면)의 발로이며, 끝내는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참혹한 비극으로 치닫고 말았다.
어느 때나 곳을 막론하고, 양심과 지혜의 빛을 밝힌 성현들은 만물의 궁극 근원인 하나(一)의 진리(道)를 깨달아, 인류평등과 중생평등까지 설파하고 계신다. 하물며 인종차별과 민족의 우열을 따지겠는가? 인도는 아직까지 사성계급(카스트) 차별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일찍이 석가모니 붓다는 “출신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따라 사람의 귀천과 존비가 판가름 난다”고 가르치셨단다. 청정한 마음으로 착한 행위를 하면 고귀한 존재가 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나쁜 짓을 하면 비천한 중생이 되는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다른 성현도 정도와 표현의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그런 깨달음과 가르침을 전하였다. 다산도 론어論語의 주석을 모으면서, 오랑캐 짓하면 ‘이적夷狄’이고 예의바르면 ‘제하(諸夏: 中華)’라고 공자의 뜻을 풀이한다. 사실 ‘중국’이란 ‘문명의 중심국가’란 뜻이다. 그러니 ‘동방예의지국’인 동이족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중국’인 셈이다. 근현대 중국의 지성인 학자 양수달(楊樹達: 1885~1956)도 건국 직후에 아주 양심 바른 식견을 펼친다.

“필?의 전쟁에서 초楚 장왕莊王이 예의에 맞게 움직여, 진晉이 이적夷狄으로 변했고 초楚는 군자가 되었다. 계보?父의 전쟁에서 중국은 새로운 이적이 되었고, 오吳는 조금 진보했는데, 백거柏?의 전쟁에서 오왕吳王 합려闔廬는 중국(의 문화)을 염려하여 이적을 물리쳤으며, 황지黃池의 회동에서 吳王 부차夫差는 성주成周를 내세워 천왕天王을 드높였다.(존주양이尊周攘夷) 초와 오는 모두 춘추에서 줄곧 이적으로 지목한 나라들이다. 공자는 로魯 소공昭公ㆍ정공定公ㆍ애공哀公 시대에 살았으니, 초楚 장왕莊王 일은 들었을 테고, 합려闔廬와 부차夫差의 일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적에게 (어진) 군주가 있고 중국에 임금이 없다는 탄식을 하지 않았겠는가? 춘추의 의리(정신)는 이적도 중국(문명)에 나아가면 중국으로 대하고, 중국도 이적(짓)이 되면 이적으로 여긴다. 무릇 공자는 이적과 중화의 경계를 그음에 혈통ㆍ종족ㆍ지리나 기타 조건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행위를 표준으로 삼았다. 2천수백년 전에 산 분이, 어떻게 그리 활연 대오하여 수천년 뒤에 히틀러나 도우죠우 히데끼(東條英機: 1884~1948, 일본 전범으로 처형당함) 같은 인간쓰레기가 나와 민족우월론으로 천하를 전란의 참화에 빠뜨릴 줄 미리 훤히 알고서, 미연에 예방하고자 (경고)하셨을까? 이런 식견은 얼마나 탁월한가! 이런 지혜는 얼마나 심오한가!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대민족주의를 반대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공자의 이런 위대한 정신을 참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론어를 해석하면서, 혹시라도 ‘이적에 비록 임금이 있더라도 중국에 임금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풀이해, 편협한 견해로 공자 글을 읽는다면, 이는 정말 크나큰 오류다.”

참으로 공감할 만한 공평한 정견正見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인류는 시와 비, 선과 악을 나누며 사물과 인간을 둘로 가르는, 서양의 이분법적 흑백논리의 불완전함과 위험한 함정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다. 이제 인류의 정신문명은 바야흐로 선악과 시비는 물론, 동서양과 남녀ㆍ고금古今까지 함께 하나로 아우르는 ‘천하대동天下大同’과 ‘사해동포四海同胞’의 ‘세계일화世界一華’가 활짝 꽃피려는 시절인연이 무르익고 있다. 그런데도 미ㆍ일ㆍ러ㆍ중 같은 강대국은 아직껏 세계패권을 차지하려는 정치ㆍ경제ㆍ군사ㆍ외교적 제국주의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말로는 평화공존을 떠들면서 영토확장과 역사왜곡을 끈질기게 집요히 밀어붙이고 있다. 특히 “중국은 제국주의ㆍ패권주의ㆍ식민주의를 반대하고, … 세계 평화를 수호하고 인류 진보를 촉진하는 사업을 위해 노력한다.”는 헌법 선언과 정반대로, 제국주의ㆍ패권주의ㆍ식민주의를 강화하느라 혈안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 및 세계질서 속에서, 우리 한겨레는 세계의 중심축이 되기 위하여, 저들의 잘못된 망상과 미몽을 깨우치고 민족의 얼과 혼을 불러 일깨우는 자아성찰의 배움과 수양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한글을 지키고, 잊히거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밝히는 일이 아주 중요하고도 시급하다. 다행히도 과학기술과 학문연구가 눈부시게 발달하여, 수천년간 땅속에 묻혀 파괴와 왜곡을 면한 유물유적들이 하나씩 나타남으로써, 도저히 없애거나 속이거나 거짓말할 수 없는 철증鐵證과 확증確證이 되고 있다.
사실 공자가 역사를 고증하는 증빙자료로 명확히 언급한 사료史料로서 ‘문헌文獻’이란, 문자기록으로서 ‘문文’과 사람을 통해 전해 바치는 ‘헌獻’을 나란히 가리킨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벽에 숨긴 서책이나 현인들이 암송하여 전한 경전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고 역사‘문헌’으로 공인받았다. 불경도 오랫동안 암송에 의한 구전을 거쳐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심지어 지금도 인도인 가운데는 방대한 경전을 통째로 암송하는 분이 있단다. 인도는 중국과 정반대로 문자기록을 하지 않는 전통이라서, 고대 인도의 역사기록은 베다와 불경을 통해 간접으로 알 수 있는 정도란다. 하지만 사람의 두뇌와 마음에 새겨져 구전되어오는 ‘헌獻’을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도에는 고대사가 거의 없는 것이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하물며 뒤에 나올 장자莊子의 말처럼, 마음을 비우고 맑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밝아지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천하일과 남의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보고 아는 신통력(숙명통ㆍ천안통ㆍ타심통)이 저절로 나타난다는데, 그런 성현들이 손바닥 안의 구슬에 비춰보듯 보고적어 전하는 과거 역사는 도대체 역사 ‘문헌’이 아니란 말인가? 권력 투쟁과 유지에 혈안이 된 속물 정치가나 어용학자들이 문자기록을 조작ㆍ폐기ㆍ왜곡하기가 어려울까, 아니면 문자를 모르는 총명한 두뇌가 암송해 구전하거나 성현이 숙명통으로 과거역사를 비춰보는 게 어려울까?
인류의 혈통과 문명도 지구상의 바람이나 해류가 기압과 수온 차이에 따라 자유롭게 흐르며 뒤섞이듯이, 예로부터 끊임없이 교류하고 뒤섞여왔다. 하물며 불교의 가르침처럼, 우리 영혼이 이 나라 저 종족을 윤회한다면 어떠하겠는가? 신라 왕릉서 나온 유리구슬은 유럽과 중동에서 인도를 거쳐 전해진 기술로 자바섬에서 만들어 뱃길 타고 교역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전남북 일대에 널리 분포하는 남방식 지석묘도, 온조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해 확장하기 훨씬 이전에, 인도네시아 폴리네시아 인종이 뱃길 타고 흘러들어와 정착해 남긴 유물유적임이 분명해졌다. 나주 반암리 고분도 남방 해양성 유물이란 소식이 들린다.
하물며, 뭍으로 이어진 중국에, 히말라야 천산에서 몽골을 거쳐 만주에 이른 동이족이 료동반도와 발해만을 따라 산동 일대까지 내려와 살며, 나름대로 문명을 꽃피워 전한 흐름과 자취는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夏와 은殷이 중원의 일부를 차지한 부족국가라면, 그 주위는 사람이 살지 않은 텅 빈 황무지였을까? 은나라가 여섯 번이나 천도한 사실 자체가 주위의 막강한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실례가 아닐까? 은殷 자체가 산동 일대까지 확장한 고조선의 동이족에서 따로 떨어져나가 세운 나라로서, 하夏를 대체해 중원 문명의 중심이 된 것이리라!
사실 중국은 영토나 문명 자체가 엄청난 포용성을 지닌 용광로처럼, 갈수록 불어나는 눈덩이처럼 엄청난 가속도로 커져왔다. 은殷과 주周부터, 남북조와 5호16국, 료遼ㆍ금金ㆍ원元ㆍ청淸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에서 북이나 동에서 내려와 중원을 지배한 동이족 계통의 왕조가 전체의 절반이 넘게 많았으나, 대부분 왕조의 운명이 다하기 전에 중국문명이라는 용광로에 다 녹아 융화되고 말았다. 한문漢文만 해도 동이족의 록도문자鹿圖文字에서 시발하여, 갑골문을 거치며 오랜 세월을 두고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며 확장 발전해온 역사적 산물이란다. 따라서 한문을 비롯한 중국 문화 자체가 동이족과 한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의 공동 합작품이고, ‘동아시아 문화’로 부름이 공평하고 정당한 객관 식견일 것이다.
실제로, 근대 공산혁명 이후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공산주의가 전 인류 문화지식을 종합해 집대성한 전형이 마르크시즘이라는 이론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주의를 골간으로 전통문화와 근대 서양문물까지 흡수해, 인류 문화지식유산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중국식 사회주의 문명을 창조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의 정치지도층과 역사학계도 이러한 공정하고 유연한 문명사관에 입각하여, 말이나 글로만이 아니라 실제 행위로서 참된 ‘중화中華 문명’의 전범典範을 솔선수범으로 실천궁행하길 간곡히 권청勸請한다. 아울러 우리나라 정치가ㆍ학자ㆍ지식인은 물론 교양 있는 국민도, 다함께 이러한 안목과 가치관으로 민족주체성을 확립하여, 새로운 인류문명의 창조와 세계평화 발전에 흔들림 없는 핵심축이 되길 간절히 염원한다.
본서에서 연구한 ‘선진先秦’ 시대의 대표적인 유儒ㆍ묵墨ㆍ도道ㆍ법法 4가家의 여섯 분 성현의 법사상은, 명실상부하게 시대를 앞서가며 동서고금을 통해 영원히 인류의 희망의 빛이 될 ‘선진先進’ 법사상임을 확신한다. 그런 성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법사상을 알아 마음에 새기고 계승하여, 미래의 새로운 법문화의 창달과 발전에 활용하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실로 오랜 세월의 연찬과 기다림을 거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펴내게 되었다. 당시 중원의 통일을 꿈꾸던 성현들의 사랑과 슬기가, 지구촌으로 넓혀진 인류 공동체의 대동화합과 천하태평의 실현에 크게 이바지하길 바라는 염원에서 말이다.
이러한 필자의 소탈한 뜻과 앞에서 밝힌 순박한 문명역사관을 염두에 두면서, 아래에 펼쳐질 여섯 성현의 법사상 본론을 읽어주시면, 필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보람과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을 펼쳐 읽게 될 독자들과 종이에 쓰인 글을 통해 만나는 정신교감의 인연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서론序論 머리글을 마친다.

갑오경장 및 동학혁명 120주년을 맞이한 2014년 8월 25일
팔월 초하루 필자 씀

책속으로 추가
공자의 사상은 철학ㆍ윤리ㆍ정치ㆍ사회ㆍ경제는 물론, 교육ㆍ문학ㆍ음악ㆍ미술 등 모든 학문영역에서 접근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해왔다. 헌데 다양한 분야와 관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된 귀결이 있는데, 공자를 대표하는 핵심사상이 ‘仁’이라는 점이다. 확실히 ‘仁’은 공자를 다른 제자백가와 구분하는, 공자 특유의 철학 범주라고 할 만하다. 물론 仁이 공자의 독창물이나 전유물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후술할 바와 같이, 仁은 이미 춘추시대에 상당히 보편적인 개념으로 등장했고, 다만 공자가 이를 자기 철학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아 종합화했다고 보면 좋다. 또 공자 말고도, 묵자도 사상 체계상 유가와 비슷하게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의 정통 성왕聖王을 도통道統으로 존숭尊崇하여, 仁義로 대표되는 요순지도堯舜之道를 철학사상의 핵심으로 삼고, 또 하늘이 부여한 자신의 사명으로 실천궁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묵자의 仁義는 공자의 仁義와 조금 다른 각도와 실질을 가지며, 특히 ‘겸애兼愛’라는 독특한 범주로 표현하기 때문에, 仁을 공자 특유의 철학범주라고 해도 크게 지나침은 없을 것이다.
仁은 춘추이전의 진정한 고문서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특히 갑골문이나 금문金文에는 보이지 않는, 춘추시대의 새로운 명사로서, 반드시 공자가 창조한 것은 아니겠지만, 공자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사실이라는 곽말약郭沫若의 지적이 학계의 통설이다. 론어에 ‘仁’을 언급한 곳이 모두 58장章에 걸쳐 105회에 이르는 사실만 보아도, 공자사상에서 仁이 차지하는 지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2. 춘추시대 ‘仁’ 개념의 등장

‘孝’와 ‘德’은 갑골문에도 등장할 만큼 역사연원이 유구하고, 서주西周시대의 주된 윤리규범이었다. 이에 반하여, ‘仁’은 ‘忠’과 함께 춘추시대 들어서 사회적 대변혁의 시기에 새로 등장한 도덕 범주다. 부모나 존장을 잘 섬기는 孝처럼, 군주나 사직(국가)에 一心으로 복종하는 忠이 단순한(一義적) 개념인 데 반하여, 仁은 德처럼 비교적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를 함축하는 다의多義적 범주로 출발하는 것도 눈에 띄는 특징이다. 仁은 공자 이전의 춘추시대 사상언론을 기록한 문헌에서부터, 이미 여러 사회관계를 표현하는 윤리규범으로 등장하여 아주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부자간의 관계에서 仁은 부모를 공경스럽게 섬기는 효도를 가리킨다.
진晋 헌공이 애첩 려희驪姬의 애교와 참소讒訴에 넘어가, 태자 신생申生을 폐위시키고 려희 소생인 서자 해제奚齊를 새 태자로 세우려 했다. 이때 려희가 인용한 말 가운데, “仁을 행함과 나라를 위함은 같지 않나니, 仁을 행하는 자는 부모를 사랑함을 仁이라 일컫지만, 나라를 위하는 자는 나라를 이롭게 함을 仁이라 부릅니다.”는 구절이 나온다. 태자 신생이 仁을 몹시 좋아하는데, 부모(부왕)의 뜻에 순종하는 仁이 아니라, 인민들에게 호감을 사서 나라(권력)를 지배하려는 仁이라는 뜻이다. 또 좌전左傳에 보면, 정鄭나라가 초楚나라의 종의鍾儀를 포로로 잡아 진晋에 바쳤는데, 진晋 경공景公이 종의를 보고 문답하면서, 악관樂官 집안인 종의한테 음악을 연주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선친先親의 직관職官인데 감히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답하자, 거문고를 주며 초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군왕에 관해 묻자, ‘소인이 아는 바가 아니다’고 사양하다가, 굳이 캐묻자 태자 시에 사보師保의 가르침을 받든 상황으로 답변하였다. 이 상황을 진경공이 범문자范文子에게 말하자, 범문자는 종의를 군자라고 극구 칭송하였다.

“답변에 선친의 직관을 언급함은 뿌리(조상)를 저버리지 않음이오, 음악 연주에 고향 악조를 탐(연주함)은 옛것을 잊지 않음이며, 태자를 언급함은 사사로움이 없음이고, 두 대신(師保)을 거명함은 군왕을 존경함입니다. 근본을 잊지 않음은 仁이고, 옛것을 잊지 않음은 信이며, 사사로움이 없음은 忠이고, 군왕을 존경함은 민敏입니다. 仁으로 일을 대하여 信으로 지키고 忠으로 이루며 敏으로 행한다면, 그 일이 비록 아무리 클지라도 반드시 해결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어찌 그를 초나라에 되돌려 보내 우리 진과 초의 화해를 주선하도록 도모하지 않으십니까?”

둘째, 군신관계에서 仁은 군주를 원망하지 않고 시해하지 않는 충성을 가리킨다.
진헌공이 태자를 폐위하려고 기도한 위의 사건에서, 주위 사람들이 신생한테 망명하라고 권유하자, 신생은 “어진 자는 임금을 원망하지 않고, 지혜로운 이는 똑같은 곤경에 두 번 다시 처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자는 죽음에서 달아나지 않는다.(仁不怨君, 智不重困, 勇不逃死.)”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권유를 거절했다. 아울러 “망명하여 죄가 거듭 중첩됨은 지혜롭지 못함이며, 죽음을 피하려 임금을 원망함은 어질지 못함이고, 죄가 있으면서 죽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다.”고 부연하면서 스스로 죽음을 각오한다.
그 뒤 진晋 대부 란무자欒武子가 한헌자韓獻子에게 려공?公(B.C. 580~573 재위)을 시해하자고 요구하자, 한헌자는 “군주를 시해해 위세를 구함은 내가 할 수 없나니, 그런 위세를 행함은 어질지 못하다(不仁)”는 명분으로 반대했다.
그렇다면 국가(왕권)를 양보함은 仁이 될 것이다. 송宋 환공桓公의 병이 위독해지자, 태자인 자보玆父(훗날의 襄公: 원음은 ‘상공’인데, 우리는 ‘양공’으로 잘못 읽음.)는 자기 서형庶兄인 목이目夷(子魚)가 나이도 많고 어지니 그를 왕으로 세우라고 건의했다. 이에 환공이 자어에게 왕위를 계승하라고 명하자, 자어는 “태자 자보처럼 나라(군주)를 양보할 정도면, 이보다 더 큰 仁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사양하면서 물러나 달아났다. 백이숙제는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로서, 아우인 숙제를 세우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백이가 도망가자 숙제도 달아났는데, 나중에 주周 무왕이 은을 평정하자 의롭지 못한 곡식을 먹을 수 없다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주려 죽었다. 이를 두고 공자는 仁을 구해 仁을 얻은 현인이라고 칭송했다. 조선시대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태종의 뜻을 알고 세속을 떠난 효령대군과 양녕대군도 어질다고 하리라.
셋째, 춘추시대 제후국 상호간의 국제관계에서, 仁은 상호원조와 구휼의 정치외교 윤리를 가리킨다.
로魯나라 계강자季康子가 주?를 정벌하려고 대부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모의하자, 자복경백子服景伯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소국이 대국을 섬김이 信이고 대국이 소국을 보호함이 仁이니, 대국을 배반하면 不信이고 소국을 정벌하면 不仁입니다. 인민은 성城으로 보호하고 城은 德으로 보호하는데, 이 두 가지 덕(信과 仁)을 잃으면 위태로워질 테니, 장차 나라를 어떻게 보호하겠습니까?”
그리고 진晋나라에 두 해 거듭 기근이 들어 진秦나라에 양식 원조를 요청하자, 秦 목공穆公이 자상子桑에게 자문을 구했다. 자상이 “천재天災는 돌고 돌아 나라마다 있기 마련인데, 천재를 구제하여 이웃나라를 원조하는 것은 道(德)이고, 도(덕)을 행하면 복이 있다”고 답하자, 선뜻 뱃길로 곡식을 대주었다. 이것이 유명한 범주지역汎舟之役이다. 그런데 이듬해 거꾸로 秦에 기근이 들어 晋에 양식원조를 요청하자, 이번에는 晋 혜공惠公이 거절했다. 이에 晋의 대부인 경정慶鄭이 간언하였다.

“보시(은혜)를 배반하면 친구가 없고, 남의 재앙을 기뻐하면 仁이 아니며, 재물을 탐착하여 아끼면 상서롭지 못하고, 이웃을 노하게 하면 의롭지 못합니다. 네 가지 덕을 모두 잃고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보시(은혜)를 배반하고 남의 재앙을 기뻐하면 인민들이 모두 저버릴 것입니다. 가까운 이도 오히려 원수로 여길 텐데, 하물며 원망하는 적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晋 혜공은 괵사?射의 말을 듣고 끝내 외면하여, 그 이듬해 한전韓戰에서 진 목공에게 정벌당해 생포되는 굴욕을 겪게 된다.
넷째, 이 밖에도 앞의 첫째에서 부수로 언급한 것처럼, 국가를 이롭게 하는(利國) 인민 사랑이 仁이 되기도 하는데, 좀 더 복합적인 개념 규정도 있다.
晋의 한헌자韓獻子가 연로하여 퇴직하자, 晋 도공悼公은 무기無忌를 임명하려 했다. 이에 무기는 자신이 질병이 있어 “직책을 몸소 실행하지 못하면 인민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시구詩句를 인용하면서, 대신 자기 아우인 기起를 추천했다. 起와 함께 교유하는 전소田蘇가 起는 ‘인을 좋아한다(好仁)’고 칭찬하는데, “인민을 불쌍히 여김이 덕이고, 올바르고 곧음이 正이며, 굽은 것을 바로잡음이 直인데, 이 세 가지(德, 正, 直)의 통일조화가 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결국 도공은 그러한 무기가 어질다고 여겨 그를 대부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주周의 단상공單襄公이 晋 도공悼公의 어린 시절 품행을 평가하는 가운데, “仁을 언급함에 반드시 남에게 미치며(言仁必及人)” “남을 사랑하여 능히 어질다(愛人能仁)”는 조목이 나온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仁은 춘추시대에 이미 상당히 포괄적인 보편 개념으로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설령 춘추좌전이나 국어의 실제 기록이 공자 사후에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仁’의 개념이 공자보다 앞선 춘추 초기부터 이미 사용되었음을 전면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물며, 공자 자신이 “자기를 이기고 예로 되돌아감이 인이다(克己復禮, 仁也)”라는 옛 격언을 인용하며 楚 령왕靈王을 칭송한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도, 자명하지 않겠는가? ‘克己復禮, 爲仁’은 공자 철학사상의 핵심명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춘추시대의 仁개념은 공자 인학仁學의 선구적 기초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자의 철학사상은 바로 역사적 대변혁기인 춘추시대의 사상적 발전을 종합하고 체계화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3. 孔子 仁學의 함의

仁은 공자에 이르러 하나의 이론 체계를 이루게 된다. 물론 공자가 仁을 직접 이론으로 체계화하거나 집대성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마음(정신) 속에 仁의 심상心像 체계가 이루어져, 그것이 시절인연 따라 그때그때 밖으로 영상映像을 투사(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제자들이나 상대방(질문자)의 자질과 근기에 맞추어 인재시교因材施敎하고 대기설법待機說法한 것이 기록되어 론어論語로 전해온다. 그러다 보니 仁의 내용과 의미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히려 외연으로 보면, 이전의 춘추시대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풍부하게 확장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자장子張이 仁을 묻자 공경恭ㆍ너그러움寬ㆍ믿음信ㆍ민첩함敏ㆍ은혜惠의 다섯 가지를 천하에 행할 수 있으면 仁이라 답한다.(論語, 陽貨편. 이하 론어는 편명만 기재함) 또 번지樊遲가 仁을 묻자 거처에 恭하고 일처리에 敬하며 사람을 대함에 忠하면 비록 오랑캐 속에 가더라도 버릴 수 없다고 답한다.(子路편) 그러나 교묘한 말과 아부하는 낯빛(巧言令色)은 仁과는 거리가 멀다.(學而, 陽貨편) 반대로 강직하고 굳세며 질박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剛毅木訥)은 오히려 仁에 가깝다.(子路편) 부모에 효성스럽고 형제한테 우애하는 孝悌는 仁의 근본이며(學而편), 널리 배우고 의지가 돈독하며(博學而篤志) 절실하게 묻고 가깝게 생각하면(切問而近思) 仁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한다.(子張편) 또 仁者는 반드시 용기가 있고(憲問편), 智者는 仁을 이롭게 여긴다.(里仁편) 론어에 나타난 仁의 덕목만도 스무 가지가 넘는다.
이렇듯 혼란스러우리만치 복잡하고 다양한 仁의 내용과 함의를 어느 정도 일관되게 체계화할 수 있는 개념이 있을까? 만약 인의 내용에 그 어떤 공통분모랄까 구심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愛人’의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위에 열거한 仁의 모든 덕목은 한결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愛人’에 포함되고 귀결한다. 우리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요즘 일부 극성인 사람들을 보라, 하다못해 골동품이나 애완견에 대해서조차도 공경과 관용과 믿음과 은혜와 기민성 등, 위에 열거한 모든 덕목을 기꺼이 발휘하지 않을까? 더욱 절실한 예로, 어머니가 자식 사랑하는 걸 생각해 보라.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고생과 희생도 감수하고, 심지어 적과 싸우거나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치기도 하는 대단한 용기와 강단도 저절로 나온다.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고 상황이 어떠한지에 따라, 그 仁의 명칭이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목차

서문 5

제1편 유가儒家의 법사상
제1장 孔子의 법사상 / 24
제2장 맹자의 법사상 / 77

제2편 묵가墨家의 법사상
제3장 묵자墨子의 법사상 / 176

제3편 도가道家의 법사상
제4장 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법사상 / 244
제5장 장자莊子의 법철학 / 336

제4편 법가法家의 법사상
제6장 관자管子의 법사상 / 380

강의안 / 415
Abstract(中文摘要) / 430

책을 마치며(跋文) 443

저자소개

저자 보적(寶積) 김지수(金池洙)는 전북 부안 곰소 출생으로, 서울대 법대(중국문학 부전공) 졸업했다.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으로 3년간 한학을 연수하고, 서울대 석사과정에서 조교로 근무하며 한국법제사로 학위논문 쓰고, 박사과정 재학중 國立臺灣大學 法律學硏究所 3년간 유학하며 중국고전을 폭넓게 섭렵하였다. 귀국해 서울대서 학생들 상대로 무료 고전강의를 10회 하고, 대우재단서 老子원전강의를 2회 실시하며, 서울대 대학원서 법학박사(전통 중국법의 情理法)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국립 전남대 법대(법학전문대학원)에 재직하고 있다.
수십 편의 전공 논문과 몇 권의 공저가 있으며, 번역서로 「화두 놓고 염불하세(印光大師嘉言錄)」, 「운명을 뛰어 넘는 길(了凡四訓)」, 「절옥귀감折獄龜鑑」, 「불가록不可錄」, 「의심 끊고 염불하세」,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遺敎經」, 「중국의 법조윤리 규범집」이 있고, 저서로 「中國의 婚姻法과 繼承法」, 「傳統 中國法의 精神」, 「傳統法과 光州反正」, 「유불선 인생관-道 닦고 德 쌓자」, 「채식명상 20년」, 「공자가 들려주는 관계의 미학」 등이 있다.

도서소개

[선진 법사상사]는 본서에서 연구한 ‘선진先秦’ 시대의 대표적인 유儒ㆍ묵墨ㆍ도道ㆍ법法 4가家의 여섯 분 성현의 법사상은, 명실상부하게 시대를 앞서가며 동서고금을 통해 영원히 인류의 희망의 빛이 될 ‘선진先進’ 법사상임을 확신한다. 그런 성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법사상을 알아 마음에 새기고 계승하여, 미래의 새로운 법문화의 창달과 발전에 활용하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실로 오랜 세월의 연찬과 기다림을 거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펴내게 되었다.

교환 및 환불안내

도서교환 및 환불
  • ㆍ배송기간은 평일 기준 1~3일 정도 소요됩니다.(스프링 분철은 1일 정도 시간이 더 소요됩니다.)
  • ㆍ상품불량 및 오배송등의 이유로 반품하실 경우, 반품배송비는 무료입니다.
  • ㆍ고객님의 변심에 의한 반품,환불,교환시 택배비는 본인 부담입니다.
  • ㆍ상담원과의 상담없이 교환 및 반품으로 반송된 물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ㆍ이미 발송된 상품의 취소 및 반품, 교환요청시 배송비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ㆍ반품신청시 반송된 상품의 수령후 환불처리됩니다.(카드사 사정에 따라 카드취소는 시일이 3~5일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 ㆍ주문하신 상품의 반품,교환은 상품수령일로 부터 7일이내에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ㆍ상품이 훼손된 경우 반품 및 교환,환불이 불가능합니다.
  • ㆍ반품/교환시 고객님 귀책사유로 인해 수거가 지연될 경우에는 반품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 ㆍ스프링제본 상품은 교환 및 환불이 불가능 합니다.
  • ㆍ군부대(사서함) 및 해외배송은 불가능합니다.
  • ㆍ오후 3시 이후 상담원과 통화되지 않은 취소건에 대해서는 고객 반품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반품안내
  • 마이페이지 > 나의상담 > 1 : 1 문의하기 게시판 또는 고객센터 1800-7327
교환/반품주소
  •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11 1층 / (주)북채널 / 전화 : 1800-7327
  • 택배안내 : CJ대한통운(1588-1255)
  • 고객님 변심으로 인한 교환 또는 반품시 왕복 배송비 5,000원을 부담하셔야 하며, 제품 불량 또는 오 배송시에는 전액을 당사에서부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