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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학사요강

중국사학사요강

  • 이계명
  • |
  • 전남대학교출판부
  • |
  • 2014-03-18 출간
  • |
  • 744페이지
  • |
  • 153 X 223 mm
  • |
  • ISBN 97889684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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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저자는 초판 『중국사학사강요』에서 중국사학사는 주요 역사영역으로 중국역사학을 학생ㆍ일반인들이 이해하는 좋은 읽을거리라는 점을 강조하였었다. 당초기 館修5書주편자의 편찬설명과 『남제서』 주편자 소자현, 『자치통감』 사론 작성한 사마광과 그의 同修 范祖禹의 이ㆍ경력 그리고 『당감』에 나타난 역사관의 내용을 이번 개정판 『중국사학사요강』에 전부 넣었다. 또한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의 이ㆍ경력은 위 계평ㆍ송연신의 명저 등에서 많이 보아왔기에 이를 함축하여, 위 저자의 拙著 『자치통감사론탐방』에 넣었었지만, 이 책의 내용 중에 唐宋부분이 크게 늘어나 상당히 편중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온누리 인류에게 필요한 읽을거리로 제공할 수 있는 그렇게 더욱 보강되어 優美한 사학명저 중국사학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제1부 중국 전통사학의 성립과 발전

제1편 고대 殷周시대의 史學

제1장 사학의 기원
사학은 문자의 발생, 역사 기록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그런데 이는 史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편 중국고대사학에 있어 사학이 줄곧 사관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중국 사학의 기원을 연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의 출현과 사관의 발생으로부터 살펴야 된다.

제1절 은대의 갑골문자의 출현
중국에서의 문자의 발생과 관련하여 後漢代의 許愼은 黃帝의 사관 倉?이 “새, 짐승들의 발자국을 보고서 그 이치가 서로 다르고 구별되는 바를 알고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문자는 한 사람의 독창성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으로 오랜 사회적 통용을 거쳐 그 정형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許愼의 논법에는 문제가 있다.
한편 갑골문자는 우리에게 문자의 기원을 탐색하는 데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갑골문자는 은대 후기인 B.C. 1300년에서 B.C. 1028년에 걸쳐 사용된 것이다. 즉 늦어도 은대 말기에는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갑골문은 중국 최초의 문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문자라는 점에서 가장 원시적인 문자가 아니라, 은대 말기에 문자가 최초로 출현하였다고 볼 수 없다. 陳蒙家는 갑골문 이전에 적어도 500년 정도의 발전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B.C. 20세기 무렵에는 문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학설이 타당성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1974~1975년 사이에 江西省 淸江 吳城의 은대 중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도기나 돌로 된 주형에는 70개 이상의 문자가 발견되었으며, 그중 한 도기의 조각에는 모두 12개의 문자와 부호가 새겨진 문구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있었다. 또한 1973년 河北省 藁城 台西村의 은대 전기와 중기 문화유적에서도 문자가 새겨진 도기가 발견된 바 있다. 이러한 글자들은 갑골문보다 훨씬 원시적인 요소가 많으면서도, 또한 갑골문과 연속관계에 있기 때문에 선행단계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 있는 최초의 문자이다.
그러나 중국문자의 첫 출현은 이보다도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부터 5000년 전의 유적인 山東 大汶口유적에서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토기들이 출토된 바 있다. 문자인지 그림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후세의 문자 출현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에서 문자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결국 문자의 출현의 은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자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鄭樵는 『通志』 『六書略』에서 六書는 모두 象形의 변용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鄭樵는 문자란 圖畵에서 출발하였다고 지적하였는데, 한자는 주로 이 圖畵에서 발전했던 것이다.
중국인들의 선조가 최초로 창조했던 문자는 사물의 형상을 그림으로 뜻을 나타내었던 상형문자였다. 그러나 언어 가운데에는 그림으로 그려내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뜻을 지닌 것도 있었다. 이에 기존의 상형문자를 빌려서 音符를 만든 假借字가 만들어졌다. 또한 表音의 假借字 옆에 사물을 나타내는 形部를 덧붙이는 形聲字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에는 이러한 3가지 종류의 글자가 모두 이미 갖추어져 있는데, 상형자가 가장 발달한 상태였고 가차자가 증가추세에 있었다. 형성자는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으나 西周 시기의 金文에 이르러서야 조각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한자의 발전은 상형→ 가차 → 형성의 순서를 따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인류의 사회생활상의 필요에 의해 문자를 창조하였다. 문자는 圖畵에서 기원했는데, 특히 고산준령의 암벽 위에 그려 놓은 圖畵에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곳에 그림을 남긴 것은 무엇보다도 원시종교 및 씨족제도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바이다. 원시인들은 자연사물을 인격화해서 자연계에 대한 神性을 부여했는데. 이것이 곧 자연숭배를 탄생시켰다. 동시에 생산력이 낮은 상태였기 때문에 集體노동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이러한 集體는 혈연관계에 의존하여 유지되는 것으로서 어떤 공동선조의 후예들은 공동으로 씨족을 이뤘다. 이런 점에서 祖先에 장엄한 신성을 부여하는 祖先숭배를 낳게 되었다. 원시사회는 이러한 자연숭배와 조상숭배로 인해서 토템숭배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토템은 숭배의 대상으로, 그 형상을 그려서 자기 씨족의 표식으로 삼았다. 殷ㆍ周시기의 金文에는 씨족 표식들이 대량으로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은 원시인들이 표현한 도화의 일종이다.
이와 같은 원시인들의 도화는 사물의 형상을 본떠 그림으로 사정을 기록해서 어떤 의사와 소망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며, 그것은 원시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방법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것은 圖象일 뿐 언어를 표현하는 부호가 아니라 완전한 뜻을 표현ㆍ전달하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아직 사회에서의 의사교환 도구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사회적 생산이나 교환관계가 발전하고 사유제의 발생에 따라서, 인간들의 사회생활 또한 나날이 복잡해졌다. 까닭에 사물을 기록하는 원시적 도화는 점차 언어를 기록하는 부호 즉 문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자의 형성과정에서 史官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許愼은 문자의 창조자인 倉?이 皇帝의 사관이었다고 하였다. 『易』 『繫辭』 下에서도 “상고시대에는 매듭을 묶어서 다스리는데 쓰다가(결승문자) 성인이 그것을 문자로 바꿨으니, 百官은 이로써 다스리고 만민은 이로써 알아보게 되어 여러 가지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하여, 문자를 ‘정치’와 관련시키고 있다. 따라서 문자의 형성과 활용은 사유제ㆍ계급ㆍ국가 등의 발생과 관련된다. 즉 민간에서 생겨난 문자가 오히려 통치자에 의해 거둬들여졌고 우선적으로 문자에 대해 연구를 행했던 것이 사관인 셈이다.

제2절 은의 卜士 등 史官의 발생과 최초의 역사기록
사관은 어떻게 발생했던 것일까? 원시사회에서는 자연숭배와 조상숭배의 형태인 제사와 기도를 통해 선조의 神明을 구한 것이다. 占卜의 방식으로 그들의 의문에 대한 신명의 해답을 구하였다. 그래서 하늘과 사람간의 일종의 매개 즉 신명에 능통하고 그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巫祝 또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러나 신명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무축이 전달하는 신명의 지시란 곧 무축 자신의 의지였다. 이런 점에서 무축은 직무상 그들의 ‘지혜’, ‘성스러움’, ‘총명함’ 등이 마땅히 요구되었다. 또 그들 씨족의 역사를 익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조상 및 인류 기원의 전설을 말할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무축은 총명하고 재간이 있으며 누적된 지식을 말할 수 있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씨족장의 고문이거나 씨족장을 겸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후 종교활동 가운데서 때로는 사실을 기록할 필요가 생겼다. 무축은 降神과 卜文의 本務 이외도 사실 기록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민간에서 싹튼 원시문자는 이렇게 해서 수집ㆍ정리ㆍ응용되었다. 이에 ‘史’의 직무가 생겨난 것이다.
중국에서 ‘史’는 늦어도 은대에 이미 출현하였다. 갑골문에는 이미 ‘史’字가 보이는데, 손으로 簡冊을 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즉 이런 사람이 문자를 베끼고 읽는 일을 한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作冊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은대의 史는 아직 巫祝의 卜과 혼연일체의 상태라서 직무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殷墟 출토의 갑골 卜辭는 은대 사관의 작품으로, 이러한 占卜은 통치계급이 군중을 마비ㆍ통제시키고 그들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는 일종의 정신적 수단이었다. 은왕은 上帝나 각종 귀신들과 자기 조상들에게 항상 제사를 지냈는데, 사람과 신의 의지를 소통시키는 방법은 占卜이었다. 殷墟에서 발견된 占卜이 15만 조각에 달하였다는 점은 은왕이 일만 있으면 반드시 점을 쳤고 점을 치지 않는 날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바이다. 그런데 占卜을 통해 말해지는 上帝의 회답은 은왕 자신의 답변이었다. 당시 福兆의 길흉은 모두 은왕 혹은 귀족 스스로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결국 그들 자신들의 의도에 근거해서 福兆를 해석하였다. 은왕은 이러한 점복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신성시했고 하늘의 것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하늘이 준 권한과 자신들의 의지대로 행사하므로 그것을 거슬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천명사상은 노예ㆍ평민ㆍ이민족들을 기만하고 위압하는 한편 스스로의 권위를 부각시킴으로써, 통치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도구였던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占卜은 기록으로 남겨져서 그들이 상제의 의지에 따라서 행사한다는 근거로 삼고자 하였으며, 후일의 참고자료로서 비치해 두고자 했다. 그래서 卜辭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러한 복사는 4개 부분을 포함하는 일정한 격식이 있다. 즉 점을 친 날짜 및 점치는 사람의 이름, 卜問하고자 하는 사건, 복조로 정해지는 길흉, 그리고 점 친 후의 효험 등이다. 이러한 복사는 종교적 산물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정치사무의 결정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국 최초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은대는 고대사회였고 국가가 이미 형성되었던 만큼, 통치를 위해 비교적 조리 있는 문서가 필요했다. 이에 사관과 卜辭가 출현했던 것이다.
『尙書』 「多士」에서는 “은의 선왕들에게는 冊과 典 등이 있었다”고 했는데, 典은 서가 위에 펼쳐두는 竹簡이고 冊은 줄줄이 엮어 메어둔 죽간이다. 은대의 문자와 어법은 모두 상당히 완비된 상태라는 점에서, 은대에 책이나 전이 있었다는 논법은 신빙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제2장 주대의 사관 및 작품
周代에는 계급통치의 강화와 국가기구의 완비에 따라 문서 또한 번다해졌고, 사관의 직무도 더욱 분업화해갔다. 또한 史라고 불리우는 허다한 관직은 周 뿐만 아니라, 각 제후국에도 있었다. 그러나 巫와 史의 직능은 아직 미분화한 상태여서 祝과 史 혹은 巫와 史가 連用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사관이 시사문제를 기록하고 공문을 기초하고 보관하는 목적은 다스림을 돕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교육적인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관의 발생과 발전은 통치 강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주대의 관부의 기록으로써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들로는 金文ㆍ『尙書』ㆍ『逸周書』에 남아 있는 약간의 기록들 및 『竹書紀年』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관의 작품이며 중국사서의 초기형태라 할 수 있다.
金文이라고도 불리는 西周의 鐘鼎文은 鍾ㆍ鼎ㆍ盤ㆍ盂 등의 청동기에 주조된 銘文이다. 기물에 문자를 주조 혹은 각인 하는 것은 당초에는 그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지만, 뒤에 이르러서는 사실기록을 명문화하고 기물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현존 금문 중에서 가장 긴 것은 497자에 달하는 毛公鼎의 명문인데, 옛 眞迹인 금문을 베껴 적는 과정의 착오나 후세인의 개찬이 결코 없는 만큼 매우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鐘鼎의 명문은 『尙書』와 같은 문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書』라고도 불리던 『상서』는 중국 현존 최고의 서적 중 하나로 孔子의 편집을 거쳐서 완성되었다. 이러한 『상서』는 진시황의 분서 때에 소각 대상이 되었는데, 伏勝이라는 한 유생이 몰래 한 부를 숨겨두었던 것이 漢文帝 때까지 전수되어 왔다. 서한 조정이 파견한 晁錯이 기록 정리했을 때 겨우 28편뿐이었는데, 이를 당시 통용되던 隸書로 옮겨 적었기 때문에 『今文尙書』라고 일컬어졌다. 이 『금문상서』는 서한 조정에 의해서 學官에 설립되어, 광범위하게 傳誦되었다.
한편 한무제 때에 공자의 옛 저택의 벽장에서 발견되었던 또 다른 『상서』는 秦代 이전의 옛날 字體로 필사된 것이기 때문에 『古文尙書』라고 일컬어진다. 공자의 11대 손인 孔安國이 이 『고문상서』를 조정에 헌납했지만 학관에 설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널리 전해지지 못한 채, 西晉 永嘉의 난을 거치면서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후에 동진 왕조가 경전을 광범위하게 구하는 과정에서 梅?이 이른바 『고문상서』를 헌상한 적이 있는데, 朱熹(宋)ㆍ閻若?(淸) 등을 통해 僞本으로 밝혀졌다.
다음 『금문상서』 28편도 전혀 문제가 없지는 않다. 虞ㆍ夏 시대에 대한 기록은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기 어려우며, 단지 이 시대에 대한 전국시대의 얼마간의 사상관점을 반영하는 참고자료로 볼 수 있을 따름이다. 「商書」의 경우도 후인에 의해 덧붙여진 작품이라고 해야 마땅하므로, 이 또한 은대에 이뤄진 작품은 아니다. 『상서』 가운데 진실로 당시에 기록된 원문으로는 「周書」 부분뿐이다.
『상서』의 체제는 일반적으로 典ㆍ謨ㆍ訓ㆍ誥ㆍ誓ㆍ命의 6부분으로 개괄된다. 즉 『상서』의 주요내용은 殷王ㆍ周王ㆍ周公ㆍ召公 등과 같은 당시 통치자들의 명령ㆍ지시ㆍ훈화 등을 기록한 것이다. 평상시 호령을 ‘誥’라고 하였고 군사와 관련된 것을 ‘誓’라고 하였다. 군주가 신하에게 고하는 말을 대부분 ‘命’이라 했으며 그 반대의 경우는 ‘謨’라고 했다. 『상서』는 주로 말을 고하였는데, 때로는 말과 아울러 사실을 기록한 부분도 있다. 이러한 『상서』는 중국 최초로 이뤄진 역사문헌이하는 점에서 최고의 사료적 가지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책이다.
공자가 『상서』를 編定하고 난 뒤에 남은 자료는 이후 어떤 이에 의해 『周書』라고 하는 별도의 책으로 엮어졌다고 한다. 이 책의 내용이 『상서』 속의 「周書」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진의 郭璞은 『逸周書』라고 명명하였다. 또 『竹書紀年』과 같이 汲郡의 戰國 魏墓에서 출토된 것으로 오인하여 『汲家周書』라고도 불렸다.
이러한 『주서』는 후인이 옛 기록을 기술한 내용이 뒤섞여 있기는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서주 시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 가운데 「世?解」, 「克殷解」, 「商書解」 등은 서주 초기의 저작이라고 곽말약은 간주하였다. 이 가운데 周武王이 은을 멸망시킬 때 주무왕이 殷紂王의 시신에 대한 학대 기사나 살해한 수효 등에 대해 서주를 이상적인 왕국으로 여겼던 유학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주서』의 기록이 진실이 아니며 후인들의 위작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오히려 잘못으로, 『주서』 중의 수많은 편들은 확실히 서주 시대의 문헌이며 『상서』와 더불어 동등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金文ㆍ『상서』ㆍ『일주서』 등으로 볼 때 서주 문헌은 은대 卜辭의 종교적 형식을 이미 탈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 업무에 관한 결정이거나 정치적 사건에 관한 직접기록이다. 하지만 사상 내용으로는 上帝와 占卜 등을 또한 크게 다루고 있는 이들 기록들은 은대의 천명ㆍ귀신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은의 멸망을 귀감으로 삼았던 주나라 사람들은 사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어떤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이기도 한 서주의 문헌은 복사에 비해 더 상세하고 완전하며, 정확한 현재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典冊’식 작품이다.
그러나 서주 문헌들은 명확한 시간을 표시하지 않은 점에서 공통된 결점을 보인다. 말을 기록하는 것을 위주로 했던 『상서』는 내용 속에 다뤄지는 그 말들의 배경을 기록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내력이 없는 문헌이 되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서주의 역사기록은 매우 불완전한 상태의 것이었다.
한편 주의 동천과 함께 문화의 중심지도 동으로 옮겨갔는데, 이로 인해 열국의 역사기록이 더욱 발달하기 시작했다. 晉의 『乘』, 魯의 『春秋』, 楚의 『??』 등이 있으며, 『墨子』 「明鬼」편에는 周의 『춘추』, 燕의 『춘추』, 宋의 『춘추』. 齊의 『춘추』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진시황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공자가 편수한 『춘추』가 전한다. 이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기록에 의거해서 만들었다고도 하고, 여러 방면에서 옛 기록을 활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현존 『춘추』를 통해 춘추시대 열국 사서기록들의 대체적인 모습을 다소나마 알아볼 수 있다.
한편 西晉 咸寧 5년(279)에 汲郡의 도굴한 묘에서 竹簡에 쓰여진 晉 고서 수십 대 분량이 출토되었다. 이것이 『竹書紀年』인데 당시 紀年 13편이 있었다. 편년체 사서로서 夏 시기에서 西周 멸망 시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서 晉나라의 기년으로 연결시키고 있으며, 전국시대 韓ㆍ魏ㆍ趙로 분열된 다음에는 위나라의 기년을 써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今王 20년에 이르러서 끝맺고 있다. 이 금왕은 魏 襄王으로 파악되며, 『죽서기년』은 魏 사관의 작품으로 晉의 『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년』은 송대에 이르러 사라져 버렸다. 이후 각 서적에서 흩어져 있는 것을 채록해서 편집하였는데, 요즈음의 方詩銘ㆍ王修齡의 『古本竹書紀年輯正』이 가장 완비된 輯逸本이다.
『춘추』와 『죽서기년』으로 볼 때 춘추시대 각국의 사기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다. 제사, 전쟁, 災異, 군주의 즉위ㆍ혼인ㆍ사망ㆍ시해ㆍ매장ㆍ朝聘ㆍ會盟ㆍ성의 축조ㆍ망국 등이 모두 들어있다. 뿐만 아니라 본국 발생의 사건 이외도 다른 국가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왕왕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赴告’제도에 의해서 이다. 즉 한 나라에 일이 있으면 그것을 죽간에 써서 보내어 각국에 통고하는 것이다. ‘부고’를 접한 국가는 죽간과 같은 문자에 의지하여 역사 기록에 기록해 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열국의 사기는 기록일 따름으로, 기껏해야 관부의 ?案을 약간 정리 배열해서 만든 일종의 장부나열식의 큰 사건 위주의 기록에 지나지 않았다.
『고본죽서기년집교』는 사건을 일ㆍ월ㆍ년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서주 시기의 역사 기록보다는 진보했으나 단지 역사적 사실에 관한 간단한 기록일 뿐으로 한 구절이 하나의 사건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아무런 해석도 덧붙이고 있지 않다. 구절과 구절 사이에도 상관관계가 없고 인과관계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서진시대 杜預는 이러한 역사기록을 ‘記註’, 즉 역사적 사실에 관한 원시적 기록이라고 해서 ‘撰述’과는 구별하고 있다. 즉 아직 조직적이고 계통적이며 일관된 명확한 관점이 있는 작품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하여 ‘一家之言’이 아니라는 점에서 역사 저작으로 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중국 현존 최고의 역사 저작은 공자가 노나라 사관의 기록에 근거로 편성한 『춘추』이었다.

제3장 중국 최초의 역사저술, 공자의 『春秋』
1. 『春秋』의 명칭과 내용
춘추 전국시대 각국의 사기는 고유한 명칭을 지니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춘추』라고 통칭되었다. 이와 같이 각국의 사기가 『춘추』로 통칭된 것은, 각국의 사기는 사실 기록과정에서 반드시 연도를 표현하였는데, 殷代는 춘추 두 계절로만 구분하고, 西周 이후는 춘하추동 사계절로 구분하였지만 후세 사람들이 봄, 가을만 중시했던 까닭에 춘추 두자만 연용해서 연도를 대신 표기하는 방식을 역사기록의 통칭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편수했던 사서의 명칭을 『춘추』라고 한 것은 魯나라 사기의 원래 이름을 답습한 것이며, 또한 당시 통용되고 있던 명칭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국의 사기가 사라져 감에 따라서 『춘추』라는 이름은 곧 공자에게 전속되어 버린 셈이다.
공자의 『춘추』는 魯隱公 원년(B.C. 722)에서 魯哀公 14년(B.C. 402)까지 242년간의 역사사실을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각 제후국들의 통치계급에 속하는 인물들의 활동상이나 정치적 사건이나 일식과 같은 자연 현상에 관한 기록들이며, 광범위한 백성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다. 『춘추』에서의 사실 기술방법은 노은공 이후 12대의 군주 순서로 년, 계절, 월, 일에 따라서 사실을 배열하는 것이었다.
『춘추』는 노나라 史官이 본래 지니고 있던 역사기록을 근거로 하였다. 이렇게 편수된 노사기인 『춘추』는 거의 본래 기록을 그대로 답습하였지만, 원문을 완전히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공자는 『춘추』를 편수할 때 그가 근거로 삼았던 노나라 원문을 일단 첨삭했다. 공자가 『춘추』를 지은 것은 옛날의 문헌을 이용해서 자신의 관점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만약 옛 문헌이 자신의 관점에 적합하면 그것을 이용해서 그대로 그 문장을 옮기게 되었고, 자신의 관점과 저촉되어 취사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보면 개조하기조차 하였다. 따라서 공자가 지은 『춘추』는 筆削ㆍ짜맞추기ㆍ윤색을 거쳐 공자사상이 관통되게 한 하나의 작품으로 그것은 하나의 역사 서술이었다.

목차

제1부 중국 전통사학의 성립과 발전
제1편 고대 殷周시대의 史學 / 17
제2편 고대사학의 확립 / 38
제3편 위진남북조시대 사학의 모색과 발전 / 65
제4편 宋元시대의 사학의 확립과 전개 / 330
제5편 명청시대 사학의 발전 / 484

제2부 중국근대사학사조와 그 유파
제1장 근현대 사학의 개괄 / 523
제2장 아편전쟁시기의 經世致用 史學思潮 / 532
제3장 洋務思潮 영향에서의 史學 / 546
제4장 20세기 초의 新史學 사조 / 576
제5장 辛亥革命時期의 國粹主義 史學風潮 / 611
제6장 5ㆍ4시기의 史學思潮와 流派 / 623
제7장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학 / 639

제3부 마르크스史觀의 도입과 종합서술체
제1장 중국역사에 있어서 마르크스사관 도입 / 648
제2장 중국의 국가와 법 / 680
제3장 역사이론과 역사문헌 / 682
제4장 綜合敍述體 / 684
제5장 歷史文學 / 693
제6장 세계사와 중국사 / 695

참고문헌 / 706
찾아보기 / 714

저자소개

1942년 전남 나주 출생,1960년 광주고등학교 졸업,1964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수료,1969년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수료(문학석사), 1987년 전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수료(문학박사). 주요 저서 北朝의 士族-范陽盧氏를 중심으로(1987), 隋唐官僚制의 成立과 展開-山東士族ㆍ官僚를 중심으로(1995), 中國政治思想史綱要(2001), 資治通鑑史論探訪(2009), 中國史學史要綱(2014). 주요 논문 中國科擧制의 成立(1998), 魏徵의 歷史認識 - 『隋書』 史論을 중심으로(2001) 등 30편.

도서소개

『중국사학사요강』은 개정판으로 당초기 館修5書주편자의 편찬설명과 『남제서』 주편자 소자현, 『자치통감』 사론 작성한 사마광과 그의 同修 范祖禹의 이ㆍ경력 그리고 『당감』에 나타난 역사관의 내용을 수록하였다. 또한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의 이ㆍ경력은 위 계평ㆍ송연신의 명저 등에서 많이 보아왔기에 이를 함축하여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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