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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감성으로 그리다

호남의 감성으로 그리다

  • 이선옥
  • |
  • 전남대학교출판부
  • |
  • 2014-05-26 출간
  • |
  • 276페이지
  • |
  • 176 X 225 mm
  • |
  • ISBN 978896849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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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이 책은 조선시대부터 근대기까지 활동한 호남 서화가 24명에 대한 기초적인 전기를 기술하면서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한 것이다. 호남이 ‘예술의 고향’이라는 명성을 얻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각 분야에서 업적을 내었고, 서화가들의 활동 또한 두드러졌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연구와 소개는 몇몇 이름난 서화가들에 국한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짧게나마 여러 서화들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 호남서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였다. 호남의 서화가라고 했지만 그들의 활동 영역은 전국을 넘어 세계로 향해 있으며, 각자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중요한 예술가들이다.
호남 서화의 흐름에 따라 책은 크게 여섯 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호남 서화의 기틀을 이룬 화가들로서 16세기 기묘사림들과 윤두서를 비롯한 녹우당의 3대 화가들의 이야기이다. 제2부에서는 소치 허련과 그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운림산방의 화가들을, 제3부에서는 의재 허백련과 연진회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제4부는 19세기 문인화가 사호 송수면과 전북의 석정 이정직을 비롯하여 각자 뚜렷한 업적을 이룬 화가들을 다루었다. 제5부는 호남의 서예가들을, 제6부에서는 오지호, 김환기, 천경자 등 근대 화가들을 소개하였다.
이들 서화가들의 작품에는 각각 모양과 빛깔은 다르지만 자신을 길러준 고향, 혹은 조국에 대한 다양한 감성이 담겨있다. 짧은 글에 이를 섬세하게 그려낼 수는 없었지만 가능한 담으려 노력하였다.
24명의 서화가를 선택했지만 꼭 이들만이 호남화단을 대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서화가들이 각자 개성 있는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서화를 이해하고 함께 즐길 줄 아는 이곳의 분위기가 서화를 꽃피우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호남화단의 배경과 이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서화가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원고에 담을 예정이다.

-본문-
호남 서화의 기틀

의義와 예藝가 하나였다 __기묘사림들의 예술

옛 문인들은 시서화를 겸비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였고, 학문하는 목적이 자신이 배운 바를 나라를 위한 옳은 일에 쓰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붓을 잡던 문인이 나라를 위한 의로운 일에 몸을 바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다 청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조선 중기의 문신 오달제吳達濟(1609~1637)는 눈 속에 꽃을 피운 설매와 화면을 뚫고 나갈듯 힘찬 묵매로써 자신의 충절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1519년에 있었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탈관직, 유배, 사사賜死되었던 많은 문인들 가운데에도 서화에 능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천霞川 고운高雲(1479~1530),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1488~1545), 충암?菴 김정金淨(1486~1520),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1487~1521), 그리고 서예가 자암自庵 김구金絿(1488~1534) 등이다. 서화로 이름을 내지는 않았지만 귤정橘亭 윤구尹衢(1495~1549)와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은 이들과 절친하여 서화 감상을 함께하며 교유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고운과 양팽손, 윤구, 박상은 호남출신이고, 김정, 신잠은 호남에 유배를 와 살았으며 최수성은 양팽손, 김정 등과 친하여 서로 간에 시를 주고받는 등 호남지역과 여러모로 인연이 있었다. 고운, 양팽손, 윤구 등은 그들의 가문이 오늘날 호남지역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서화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호남화단의 성립과 발전의 토대라는 면에서도 의미가 있어 주목된다.

호랑이 화가
하천 고운은 오늘날에는 화가로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대에는 호랑이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던 문인화가이다. 『동국문헌록』 화가편에 “호랑이그림을 잘 그렸다(善虎畵).”는 기록과 더불어 몇 점의 호랑이그림이 그의 작품으로 전한다.
고운의 자는 언룡彦龍이며,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그의 출생지는 분명치 않으나 광주 압보촌(鴨保村, 지금 광주시 남구 압촌동)에서 성장했음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부친 고자검高自儉 대에 세거했던 영광(현재 장성군 삼계면)에서 압보촌으로 이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9세 때인 1507년(중종 2) 생원, 진사시험인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41세 때인 151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낭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사화의 중심인물인 조광조趙光祖(1482~1519)·박상과의 친분 때문에 사화에 연루되어 낙향하였다. 이후 환로에 재진출하기는 하나 크게 쓰이지는 못하고 52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고운이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다. 아무래도 호남으로 낙향하여 시간 여유가 많았던 때이지 않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더구나 그가 호랑이그림으로 유명한 것은 사화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기개를 보여주는 것 같다.
고운의 작품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화면상에 관서가 있어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호랑이그림 몇 점이 있지만, 그의 명성에 비추어 후대에 가탁된 듯 화격이 높지는 않다.
개인 소장 [송호도松虎圖]는 고운의 작품으로 전한다. 뒤편 휘어진 소나무 아래에서 비스듬히 몸을 돌려 반대편을 응시하는 호랑이 한 마리를 그린 그림이다. 소나무 줄기는 거칠고 잎은 밤송이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형태이다. 그 아래 꼬리를 S형으로 치켜세우고 몸을 비스듬히 틀어 앞을 향해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듯한 호랑이는 털은 거칠고 줄무늬는 선명하며, 콧수염을 세운 얼굴에 눈빛이 형형하다.
이 [송호도]의 진작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소나무 아래 호랑이를 그린 송호도 형식은 조선 후기 심사정의 [송하맹호도]나 김홍도와 강세황 합작으로 알려진 [송하맹호도]와 유사한 구도이다. 호랑이그림은 용그림과 함께 벽사?邪의 의미로 조선시대 초기부터 다수 그려졌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고운도 호랑이그림을 즐겨 그렸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명성과 함께 후대에까지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위 [송호도]와 다른 화풍을 보이지만 전래 경위나 함께 장첩된 다른 그림의 화격 등에서 그의 대표작이라 전하는 그림이 간송미술관 소장 [백액대호白額大虎]이다. 암반 위에 서서 몸을 틀어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앞서 본 [송호도]의 호랑이와 방향은 반대이나 비슷한 자세이다. 호랑이의 자세뿐 아니라 꼬리를 구부려 치켜세운 모습, 줄무늬를 그리는 방식 등이 앞의 그림과 같아 진작 여부를 떠나 고운 그림의 특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왼편에는 ‘금빛 눈동자는 섬광이 일고, 흰 이마의 기세는 포효하는 듯하다(金睛光閃?, 白額勢咆哮)’는 화제와 ‘하천霞川’이라는 호가 적혀있다. 인장도 ‘하천’이다. 화제에서 눈동자는 섬광이 일고 얼굴 표정은 포효하는 듯하다 하였으나, 어딘지 익살스러운 민화 호랑이를 보는 듯도 하다.
두 점의 호랑이그림이 서로 화풍이 달라 고운 호랑이그림의 진면목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호랑이그림이 고운의 작품으로 전할 만큼 그가 호랑이그림에 능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고운은 문장에도 뛰어나 친구 박시현은 그의 만사에서 “문재가 풍부하여 시문은 봄 구름이 이는 듯하였고, 화려한 문장 빠르기가 물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의 시문은 『하천유집霞川遺集』으로 묶여 출간되었는데, 친구 윤지화를 비롯하여 같은 기묘사림인 박상, 윤구 등과 주고받은 시문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부러진 대나무
기묘사림들 중 서화로 가장 이름난 사람은 학포 양팽손이다. 한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자 미상의 [산수도]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지기도 했었고, 4점의 [묵죽]이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기도 하였다. 양팽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금의 화순 능주 출신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椿이며 부친은 이하以河이다.
양팽손은 1510년(중종 5)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516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정언·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항소하다 삭직되어 고향인 전라도 능성현 쌍봉리에 내려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독서로 소일했다. 1544년 용담현령으로 잠시 나아갔지만 곧 사임했다.
양팽손은 사화 이후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그곳으로 유배 온 조광조와 매일 같이 만나 학문을 논하였다. 유배 온 지 한 달 만에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임종을 지켜보고 손수 염습까지 하였으며, 이듬해 그의 체백體魄을 용인으로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정치적 사건으로 사사된 죄인의 시신을 거둔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움을 각오해야 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를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감행했다는 것은 그가 의리를 지키는 선비정신이 투철한 사람임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부친과 함께 조광조의 장례를 도운 일로 인해 큰아들 응기應箕까지도 평생 과거에 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양팽손은 선비로서 배운 바 뜻을 펼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스승과 친구들을 비참하게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을 억누른 채 시서화로 일생을 보냈다.
양팽손의 작품으로 전하는 네 폭의 [묵죽도]는 시련을 이겨낸 대나무의 강인함을 나타내고자 한 듯 바람을 맞고 줄기가 부러진 대[折竹]가 그려져 있다. 부러진 대나무는 이정李霆(1541~1622), 유덕장柳德章(1675~1756) 등 묵죽으로 유명한 여러 문인들의 작품에도 있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묵매도에도 줄기가 부러진 매화가 많은데, 이는 당쟁과 거듭되는 전쟁의 시련을 이겨낸 강한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양팽손의 [묵죽도]는 양식상 조선 중기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백인산, 『조선의 묵죽』 대원사, 2007). 그러나 양팽손이 “묵죽에 능했다.”는 『동국문헌』 화가편의 기록이나 이정, 유덕장 묵죽과의 표현상 유사점 등으로 보아 선후관계는 분명치 않지만 이들 작품과 연관이 있는 시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양팽손의 작품으로 전하는 이 묵죽 또한 사화를 겪으면서 겪은 고통과 살아남은 자의 자괴감이 예술로 승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종이 펼치고 천진을 그대로
[묵죽]과 [탐매도] 등으로 유명한 신잠은 신숙주의 증손으로,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이며 본관은 고령이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목사를 지냈으나 기묘사화로 인해 파직당하고 진사 시험 합격증까지 몰수당하였다. 또한 1521년 10월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인해 전라남도 장흥에 유배되어 17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양팽손을 비롯하여 일재一齋 이항李恒,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귤정 윤구, 눌재 박상, 기봉岐峰 백광홍白光弘, 옥계玉溪 노진盧? 등 당대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그 중에서도 양팽손과 박상의 문집에는 신잠의 묵죽도에 대한 제화시가 다수 실려 있어 이들의 서화를 통한 교류 상황을 보여준다.
신잠은 섬세한 필치의 채색화인 [사계화조도]나 [탐매도]등을 남겼는데, 특히 묵죽화로 유명하다. 장흥에 유배 온 30대 무렵부터 묵죽을 본격적으로 그렸던 것 같으나 명성에 비해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는 않다. 신잠이 장흥에 유배 와서 보니 그가 살던 서울에서는 귀한 대나무를 이곳 사람들은 하찮게 여겨 베어 버리거나 울타리로 사용하기도 하고 불쏘시개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본 신잠은 몹시 한탄하며 대나무의 천진한 모습을 여러 폭 그렸다고 한다.
신잠의 대나무 그림 중 몇 점을 윤구가 소장하고 최고의 보물로 여겼던 듯한데,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시 함께 교유하였던 눌재 박상이 읊은 시가 전한다.

하늘은 눈도 늙으셨는지 皇天有老眼
이 대를 바다 티끌에 묻어두시었다. 此君?海塵
어찌 한 번쯤 돌보고 가엾이 여기지 않으셨나 豈不一眷閔
그래서 이 고상한 사람을 보내신 모양이다 於焉遣高人
취하여 묵죽부를 읊노라니 醉?墨竹賦
눈앞에 기원의 봄이 가득하네 滿目淇園春
남쪽 땅에서는 서리에도 푸르른 이 대나무를 우습게 알아 南土賤霜碧
깎고 베어서 길게 자라지 못하였구나 斬伐無長身
울타리 허리엔 곧은 대 꽁꽁 묶어놓고 籬腰束直節
끓는 솥 밑에서 굳센 정신까지 불태우는구나 ?下燒勁神
영천(신잠의 호)은 이것이 분하고 원통하여 靈川所憤痛
종이 펼치고 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拂箋移天眞
(朴祥,「和尹亨中求題申元亮墨竹韻」,『訥齋集』 권1 중에서)

박상은 이 시에서 먼 바닷가 장흥에 유배 온 신잠의 처지와 원통함을 이곳에서는 흔하여 하찮게 여김을 받는 대나무에 비유하여 읊고 있다. 사람들이 우습게 알고 허리를 꽁꽁 묶었으며 땔감으로 쓰인 것은 대나무만이 아니다. 그 대의 신세가 유배 온 신잠과 다를 바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곧은 뿌리 땅속까지 박혀 있어서
김정은 16세기에 수묵화조화로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원충元?, 호는 충암?菴이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3년 뒤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15년 30세 때 순창군수로 있던 중 당시 담양부사를 지낸 박상과 함께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상소를 올려 기묘사화의 불씨를 당겼다. 이로 인해 중종의 진노를 사 투옥되었고, 후에 기묘사화에도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전라북도 금산으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전라남도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에서 36세의 나이에 사사되었다. 박상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부임지와 유배지가 모두 호남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친구들과 교유하면서 남긴 그림과 시들이 남아있다.
김정은 주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화조도를 그렸지만 그의 비분강개한 마음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는 사화를 당하여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는데, 그가 유배지로 향하는 길섶에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쓴 시에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있다.

바닷바람이 부니 슬픈 소리 멀리 들리고 海風吹去悲聲遠
산달이 외로이 비치니 수척한 그림자 성글다네 山月孤來瘦影疎
곧은 뿌리가 땅 속까지 박혀 있어서 賴有直根泉下到
눈·서리 같은 사나움도 그 모습을 없애지는 못하네 雪霜標格未全除
(「김정전金淨傳」,『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권상)

김정이 제주도로 향하는 길에 해남 바닷가에서 쓴 절구絶句 3수 중 한 수이다. 바람소리가 마치 슬픈 곡소리처럼 들리고, 달에 비친 파리한 자신의 모습은 그림자조차도 엉성하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는 곧고도 굳어 어떤 위협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제주도에 건너가 얼마 뒤 사사되었으니 화폭에 기개를 펼칠 겨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김정은 임금님의 사약을 받고 얼굴빛도 변치 않았으며, 술을 가져오게 하여 통쾌하게 마신 다음 크게 품은 뜻이 중도에 꺾임을 슬퍼하는 처연한 절명사絶命辭를 남겼다.

의향이자 예향의 원동력
고운, 양팽손, 윤구 등 기묘사림들의 절의 정신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아들과 손자들의 의로운 죽음으로 이어졌다. 기묘사화로 일찍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광주에 은거하였던 고운 이후의 장흥 고씨는 5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한 문벌사족으로 성장하였다. 그 중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고운의 손자라는 사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양팽손이 지켰던 의리는 아들 응기뿐 아니라 재당질이었던 양산보梁山甫(1503~1557)에게도 이어졌다. 양산보는 양팽손의 추천으로 15세에 조광조의 제자가 되었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관직에 진출하려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양산보는 나이 열일곱에 불과하여 당시에 크게 화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은거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벼슬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처사로 평생을 지내게 된 것이다.
기묘사화로 유배되었던 윤구의 차남 윤의중尹毅中(1524~1590)은 정2품의 관직까지 오른 사림의 중심인물로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를 계기로 큰 화를 당하였다. 윤구의 증손자인 고산 윤선도는 남인의 거두가 되었으나 결국 서인의 세에 밀려 81세까지 긴 유배생활을 하였다.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공재 윤두서의 형 윤종서尹宗緖는 1696년 4월 모함을 받아 거제도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다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에는 윤두서를 포함하여 큰 형 윤창서尹昌緖, 윤두서의 장인 이형징李亨徵 등 집안 인물들이 대거 연루되었다. 이후 윤두서 집안은 서인이 집권한 갑술환국 이후 벼슬길에 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16세기 호남출신 기묘사림들이 절의정신과 함께 가졌던 예술정신과 풍류의식 또한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호남문화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고운의 손자 고경명은 의병장으로 알져져 있지만 본디 시서화에 뛰어났고 특히 문장으로 이름났다. 그는 옥당에 입직하여 임금님이 그린 어화御畵 62폭에 제화시와 글을 써 올려 명종으로부터 호피 및 황모필 등 푸짐한 상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문집 『제봉집』에도 16제 88수의 제화시가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어주도漁舟圖」를 살펴보자.

갈대 섬에 물결 일고 눈은 하늘 가득 蘆洲風?雪漫空
술 사들고 돌아와 거룻배 묶는다. 沽酒歸來繫短?
젓대소리 몇 가락에 강달이 밝은데 橫笛數聲江月白
자던 새 물가 안개 속으로 날아간다. 宿禽飛起渚煙中

목차

머리말 ㆍ 5

호남 서화의 기틀
의義와 예藝가 하나였다 __기묘사림들의 예술 ㆍ 12
조선 후기 화단의 빗장을 열다 __공재 윤두서 ㆍ 24
녹우당의 화맥을 이어 __낙서 윤덕희 ㆍ 36
삼대에 이어진 화명 __청고 윤용 ㆍ 44

운림산방의 화맥
호남 남종문인화의 종조 __소치 허련 ㆍ 54
운림산방 화맥의 가교 __미산 허형 ㆍ 68
근대 실경산수화의 개척자 __남농 허건 ㆍ 79
시대를 앞서 간 감각 __임인 허림 ㆍ 89

허백련과 연진회
예도藝道에 노닌 신선 __의재 허백련 ㆍ 102
호남화단의 동강 바람 __동강 정운면 ㆍ 116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전통 __목재 허행면 ㆍ 126
제석산 돌이 오석烏石이 될 때까지 __근원 구철우 ㆍ 134

또 다른 준봉들
나비를 그린 문인화가 __사호 송수면 ㆍ 144
교육자이자 문인화가로 __염재 송태회 ㆍ 153
심오한 학문이 빚어낸 필력 __석정 이정직 ㆍ 165
근대 초상화의 대가 __석지 채용신 ㆍ 174
포도넝쿨에 펼친 감성 __낭곡 최석환 ㆍ 185

호남의 서예
벼루 세 개 붓 천 자루 __창암 이삼만 ㆍ 194
세속과 벗하지 않은 고졸古拙한 필치 __설주 송운회 ㆍ 205
현대서예를 이끌다 __소전 손재형 ㆍ 212
탐라의 바람을 타고 __소암 현중화 ㆍ 220

근대 화단
한국 자연의 빛깔을 담으려 __모후산인 오지호 ㆍ 232
고향을 품고 세계로 __수화 김환기 ㆍ 245
남도의 햇살과 바람의 감성 __옥사 천경자 ㆍ 257

도판 목록 ㆍ 267
찾아보기 ㆍ 272

저자소개

저자 이선옥은 전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로 석사학위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회화사에 관심을 갖고, 현재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교수로서 우리나라 그림을 통해 한국감성을 찾아가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
『우리시대의 사랑』, 전남대학교출판부, 2014. (공저)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출판부, 2013. (공저)
『사군자-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 돌베개, 2011.
『선비의 벗 사군자』, 보림출판사, 2005.
『한국의 미술가』, 사회평론, 2005. (공저)

도서소개

『호남의 감성으로 그리다』는 조선시대부터 근대기까지 활동한 호남 서화가 24명에 대한 기초적인 전기를 기술하면서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한 것이다. 호남이 ‘예술의 고향’이라는 명성을 얻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각 분야에서 업적을 내었고, 서화가들의 활동 또한 두드러졌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연구와 소개는 몇몇 이름난 서화가들에 국한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짧게나마 여러 서화들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 호남서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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