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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권력의 역사

시간과 권력의 역사

  • 외르크 뤼프케
  • |
  • 알마
  • |
  • 2011-12-30 출간
  • |
  • 328페이지
  • |
  • 153 X 224 X 30 mm /568g
  • |
  • ISBN 978899496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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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인간은 어떻게 시간을 소유했는가

달력은 공정하지 않다,
그 안에는 종교와 정치, 사회와 문화를 움직이는 권력이 숨어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새로 인쇄되어 나온 달력들이 넘쳐난다. 벽걸이 달력에서부터 탁상용 달력, 기호에 맞게 직접 제작하는 달력까지 달력의 기본적인 형태는 그대로지만 그 겉모습은 사람들의 필요에 맞게 계속 진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시간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처럼 달력은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다. 만약 달력이 없다면 ‘오늘은 무슨 요일일까?’ ‘오늘은 며칠일까?’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까?’와 같은 개인과 집단 기억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달력은 객관적이고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달력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린다. 달력에 적어놓은 기념일이나 그날의 일정에 따라 우리는 선물을 준비하거나 약속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러한 달력이 가진 힘은 아주 오래전부터 통치자들의 권력을 향한 도구로 이용되어왔다. 다시 말해 달력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의식에 대한 지배를 의미했다. 고대의 통치자들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축제일을 제정하거나 이전에 만들어졌던 유명한 축제일에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여는 것으로 축제일과 행사를 동일시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했다. 기원전 45년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중요한 승전일을 페리아이(로마의 휴일 혹은 축제일)로 높인 것이나 카이사르의 생일이 로마에서 국가적인 희생제로 기념된 것 등이 대표적이 경우다. 그러나 권력이 바뀌면 이러한 축제일은 작은 규모로 기념되거나 달력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이처럼 고대와 중세의 정신적인 지도자와 세속적인 권력자 그리고 근대의 지배자와 현대의 독재자들은 달력을 통제의 도구로 중요하게 사용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력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일상의 삶과 생활 리듬, 사고 그리고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7일 주기의 일주일 리듬도 이러한 경우다. 7일 주기의 일주일은 헬레니즘시대에 생겼다고 추측되는 행성에 따른 일주일 리듬, 즉 일곱 행성의 신들(토성Saturnus, 목성Jupiter, 화성Mars, 태양Sol, 금성Venus, 수성Mercurius, 달Luna)에게 하루 24시간과 일주일 168시간을 부여한 것과 유대교 안식일 형식이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유대교의 안식일(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은 토성의 날을 기념하는 형식으로 로마에서 수용되었는데, 이후 유대교로부터 나온 기독교도들이 안식일 다음 날, 즉 온종일 행해지는 행사가 없는 안식일로부터 첫째 날인 일요일에 공동예배를 드렸고, 콘스탄티누스가 일요일법을 제정함으로써 정착되었다. 즉 우리가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을 법정 공휴일로 정하고 쉬게 된 데는 이런 역사가 있는 것이다.

달력, 강력한 권력을 보여주는 수단이 되다
이 책은 “율리우스가 달력 개혁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주일은 언제부터 7일이 되었을까?” “21세기의 시작은 2000년일까? 아니면 2001년일까?” “요일은 어째서 행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까?” “일본이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인 이유는 한 달 치 월급을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까?”와 같은 질문에서부터 시간을 표시해주는 달력이 얼마나 강력한 권력의 수단이었는지에 대한 문제까지 달력을 둘러싼 숨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단순하게 달력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달력에 접근하는 책이다.

권력 통제의 수단으로 달력이 이용된 경우는 수없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예는 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민회가 열릴 경우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장날과 민회가 열리는 날이 겹치지 않도록 날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장날을 민회가 열릴 수 있는 파스(fas)가 아닌 네파스(nefas)로 규정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는 민회를 열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 법안은 기원전 287년 제정된 호르텐시우스법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사례는 황제가 바뀔 때마다 통치에 용이하도록 수시로 발생했다.

근대에 들어서도 달력을 통치 도구로 이용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1873년 일본 천황 정부는 단 20일의 공지 기간만 두고 그레고리력 개혁을 단행해버렸다. 다음 해 달력이 이미 인쇄 중이었는데도 말이다. 천황 정부가 개혁을 이렇게 서두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태음태양력에 따르면 1873년에 윤달이 있는데, 이때는 모든 관료에게 한 달 급료가 추가로 지급되어야 했다. 따라서 태음태양력을 따르게 되면 일본은 한 달 치 급여 지급으로 1873년의 일본 국가 재정에 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개혁을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줄어든 12월은 달력 교체까지 단 이틀만 들어 있었기 때문에 급료를 지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개력을 통해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권력자들은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달력, 즉 시간을 통제해왔는데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교묘하게 일어나고 있다. 주 40시간 근로제에 따른 휴일 문제와 법정공휴일에 대한 대체휴무일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권력자들에게는 민감한 문제일 수 있다. 시간과 권력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권력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통치권 강화 수단이었던 달력에 관한, 다시 말해 시간과 권력에 관한 근본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책속으로 추가>

05 인간과 신의 시간
나쁜 징조가 신성한 곳에 나타나면, 예컨대 신전에 번개가 내리치면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희생물을 바쳐야 했다. 한 신전에서 여러 신을 모신다면 신관은 모든 신의 숭배상을 모실 수 있도록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나누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렇게 해서 오해의 여지없이 분명한 선이 그어졌다. 이런 구분은 축제일에도 적용되었다. 금지 사항을 어기면 속죄물을 신에게 바쳤다. 다른 관점에서도 명백한 선이 이 두 차원에서 그어졌다. 두 신이 차지하는 지역은 직접적으로 맞닿지 않았고, 좁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경계선이 필요했다. 똑같은 것이 축제일에도 적용되었다. 로마공화정의 달력에는 여러 신들의 축제일이 연달아 나오지 않는다. 축제일 사이에는 어떤 신에게도 속하지 않는 날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언제나 고수되었다. 로마의 하루는 적어도 종교적인 계산에서 볼 때 자정에서 자정까지 흘러간다고 플리니우스가 《박물지》에 적고 있지만, 당시의 시계 기술을 고려해보면 하루가 바뀌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_80~81쪽

06 변화 속의 축제
제정기의 축제 일정표를 사용한 사람들은 로마의 전통적인 축제일에 옛 공화정 시대 고대 도시 로마에서 만들어진 축제를 열었다. 이때 발생하는 원래 축제와의 차이는 조정되었는데,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며칠에 걸쳐 로마에서 진행되는 경기를 넵투날리아 축제(초막草幕짓기와 야외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연결된 로마의 축제)와 비슷하게 거행했다. 귀디졸로에서 도시 로마의 디아나 신전을 봉헌하는 의례는 불카날리아의 특이한 번제燔祭와 별로 다르지 않게 거행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신과 신을 위한 축제일은 제식적인 미묘함보다 쉽게 전달된다._104쪽

07 달력을 둘러싼 역사
풀비우스의 벽화 달력은 넓은 평면 달력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막 시작된 로마 작가들의 역사 연구와 서술은 연대기의 구성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로마의 역사를 많은 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 도시를 위해 그리스인들이 개발했던 정확한 연대기에 끼워넣는 일이었다. 기원전 3세기 말의 역사가 파비우스 픽토르와 그의 초기 후계자들은 무엇보다도 대칭적인 시대를 구성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로마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그리스 도시 역사의 핵심적인 사건들과 시간적으로 동일하게 놓고, 기타 사건들과는 연도를 대략적으로 맞추는 것을 통해 정당화했던 것이다._135~136쪽

08 달력으로 역사를 쓰다
책 달력에서 한 장짜리 목판화 달력은 오랫동안 시장에서 거래되었는데, 각 달이 한 쪽이나 두 쪽을 차지하는 방식은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페이지가 연속적이고 임의적으로 짜인 달력 형태 역시 빈번히 존재했다. 각 달이 한 쪽을 차지하는 방식이 잘 지켜진 경우는 고대의 전통에 따라 해당 달을 사치스럽게 표현한 호화 필사본에서 나타난다. 후자의 경우 전해오는 달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354년 연대기>의 사본이다. 여기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아래서 발견된 커다란 달력 그림이 추가되는데, 이 그림은 높이가 170센티미터에 넓이가 280센티미터이며, 각 달의 텍스트 칸은 45센티미터에 이른다. 여기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아래서 발견된 커다란 달력 그림이 추가되는데, 이 그림은 높이가 170센티미터에 넓이가 280센티미터이며, 각 달의 텍스트 칸은 45센티미터에 이른다. 모자이크들은 비슷하면서도 더 오래된 형태를 보여준다. <354년 연대기>가 15세기 후반 이래로 점점 더 많이 복사되었다는 사실은 고대의 달력이 좀 더 광범위한 흐름 속에서 수용되었음을 뜻한다._189쪽

09 달력에 숨어 있는 정치
아우구스투스의 목적은 달력의 날짜를 가능한 많이 그리고 강제로 차지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날짜 배치에 대한 전략은 아주 분명하다. 대부분의 신전 봉헌은 9월 23일에 행해졌고, 아우구스투스의 생일 그리고 또 다른 봉헌과 승리에 따른 축제는 8월에 거행되었다. 1월 30일 리비아의 생일은 기원전 9년에 아라 파키스 아우구스타이(Ara Pacis Augustae,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옮긴이)의 봉헌을 통해 페리아이로 상향 조정되었다. 특정한 날에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높이는 방법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헬레니즘시대에 지배자 숭배를 구성하는 원칙으로 증명되었다. 내란을 겪은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그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기원전 45년 2월 15일에 문다Munda에서의 승리(에스파냐 문다 평원에서 카이사르의 민중파가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와 싸워서 이겼다-옮긴이)를 전달하는 전령의 도착을 그냥 우연에 맡기지 않았던 것 같다. 전령들은 내란의 종결을 담은 소식을 가지고 파릴리아의 전야, 즉 로마의 건국일 직전에 도착했다. 이로써 카이사르의 존재와 승리가 신화적 인물인 로마 건립자 로물루스에 근접하게 되었다._213~214쪽

10 머릿속의 달력
일주일 단위의 리듬은 종교적 사회화의 기본 리듬이 됨으로써 그 위력을 얻었다. 이는 먼저 유대인에게, 다음으로는 유대인 집단에서 나온 기독교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의 다수로부터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상황은 시간적인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집회일이 해당 주의 7일째 날(일요일을 첫날로 잡을 때 유대인의 안식일인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의 7일-옮긴이), 즉 안식일에서 첫째 날인 일요일로 옮겨간 것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온종일 행해지는 행사가 아니라 노동이 없는 쉬는 시간인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공동예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일요일법을 제정할 때까지 안식일에 비견되는 상징적이면서 정체성을 부여하는 기능이나 그리스도의 수난사와 관련된 깊은 의미가 일요일에 주어지지는 않았다._240쪽

11 달력과 시간 속에 담긴 의미
1900년의 세기 전환을 공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날짜에 관한 논쟁으로 특징지어졌다. 1899년 12월 16일자 〈빈 신자유신문Neue Freie Presse Wien〉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섣달 그믐날 밤이 다가올수록, 20세기가 1900년 1월 1일 아니면 1901년에 시작되는지에 대한 논쟁이 점점 더 격렬해지고 복잡해졌다. 의견 차이로 두 진영으로 나뉘었고, 양 진영 모두 자신의 입장을 완고하게 주장했다. 다음 세기를 그 이듬해로 정하려는 진영은 연대 계산법에 따랐고, 다음 해의 첫날을 20세기가 시작하는 첫해로 결정하려는 진영은 감정에 따른 결정이었다.

1900년을 20세기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독일과 영국의 우체국에서 발행된 100주년 기념우표였다. 그 밖에 빌헬름 2세가 혼자 1900년 1월 1일을 공식적으로 축하했다. … 100년 뒤에 이 물음은 더 이상 논의거리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의 시간 비평가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옮긴이)가 말했듯이 교양에 대한 대중문화의 최종적인 승리가 아니라, 시간 계산을 비연대기적으로 처리한 데 그 의미가 있다._259쪽

12 달력이 정치를 바꾸다
오랜 전통에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의 직접적인 모델은 율리우스력으로, 달의 수와 그 길이, 윤년 등은 개혁의 결과물이었다. 기원전 1세기 중반의 로마력은 한 해의 자연스러운 진행에 날짜를 의도적으로 일치시킨 것으로 봐서 상당히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윤달을 삽입하거나 조정해 기한을 연장하는 방법은 로마의 국내 정치가 위태로운 국면일 때 주로 이용되었는데, 그때마다 필요한 효과를 성공적으로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은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10월 동방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귀향 후 세 번째 집정관 취임을 앞두고 민회의 선거를 치르는 가운데 행정과 부채 문제를 풀기 위해 정치 영역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개력 작업 역시 이 개혁에 포함되었는데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지배력에 맞춰 달력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_269쪽

13 시계 없이 네 번째 1000년으로
달력은 한번도 지역적인 독점을 누린 적이 없다. 물론 지배적일 수 있다. 로마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교회 시나고그와 관련된 카타콤의 비석에 율리우스력으로 날짜를 기입했다. 시칠리아 섬 타우로메니온의 로마 식민지 거주자들은 제정기에도 그리스의 태음태양력으로 일정을 기록했다. 한편으로 달력은 대립을 일으킬 수도 있다. 태양력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사이에 퍼져 있었다. 분명히 로마의 태양년이 먼저 전반적으로 퍼졌고, 이로
인해 유대인 사이에서 태음태양력의 보호와 독점이 이뤄졌다.
현재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찾을 수 있다. 자신들의 축제력을 회귀선과 분점에 맞추는 새로운 이교도 집단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분화와 복잡한 조직, 상이한 역할 속에서 개인이 맡은 다양한 의무 등으로 인해 가족, 집단, 조직을 위한 개별적인 달력이 만들어진다._288쪽

목차

01 달력, 달력 그리고 달력
달력은 곧 역사가 아니다│달력은 작은 변화의 역사가 아니다│달력은 문화의 역사가 아니다│달력 문화와 문화 달력│달력과 사회의 상관관계│달력의 문화사

02 로마의 달력, 태양 또는 달
멋지게 빛나는 달│태음력에서 태양력으로│시간 기호와 시간 제작자│달력이 문자화되다

03 시간의 전문가들, 농부와 선원 그리고 수도사
자연과 달력의 시간│천문학과 항해│시에스타를 정오 이후로 정한 이유

04 시간을 법으로 규정하다
플라비우스의 배신│달력의 새로운 규정│은행 휴무일 아니면 법정 휴일│법과 시간 경제학

05 인간과 신의 시간
신들이 소유한 시간│콘스탄티누스가 제정한 일요일에 관한 법│축제의 기쁨을 노래하다│축제일의 제정에 관하여│달력에는 나와 있지 않은 축제들

06 변화 속의 축제
지역에서 만들어진 축제력│초기 기독교의 축제력│도시와 농촌의 축제│결혼식과 축제 참가자들│축제를 지속시키는 요인들

07 달력을 둘러싼 역사
벽걸이 달력 속의 시詩│달력이 지닌 역사 기록의 성격│기억은 장소와 연결된다│읽을거리로서의 달력│달력 속으로 그림이 들어오다│달 이름으로 시를 짓다

08 달력으로 역사를 쓰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오비드는 어떻게 파스티를 사용했을까?│달력에 주석을 다는 작업은 언제 하는가?│달력이라는 장르의 가능성과 한계│오비드의 시적인 기획│달력은 어떻게 읽는가│달력 속의 역사적인 것과 달력을 둘러싼 역사적인 것│비텐베르크의 파울 에버│달력의 여러 가지 형태│달력의 역사적 흐름

09 달력에 숨어 있는 정치
달력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달력 이름의 변화│대리석 달력들은 왜 일찍 사라졌을까?│축제 기간을 연장하는 문제에 대하여│근대 정치와 축제의 정치성│달력의 역사는 권력의 역사다

10 머릿속의 달력
요일을 알려주는 소리들│연, 월, 주, 일; 시간 의식의 구조│일요일에 관한 짧은 이야기│일주일을 며칠로 정할까

11 달력과 시간 속에 담긴 의미
행성과 별자리│달력의 시간 조합술│기원후 2000년 새천년의 시작

12 달력이 정치를 바꾸다
카이사르의 개력; 끝이 없는 해│두 개의 유럽 달력; 그레고리우스 개력│프랑스의 개력이 실패한 이유│일본에서의 그레고리력

13 시계 없이 네 번째 1000년으로

감사의 말│용어풀이│주│참고문헌

저자소개

저자 외르크 뤼프케Jorg Rupke는 1995년부터 1999년까지 포츠담대학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를 지냈고, 1999년부터 에르푸르트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독일학술진흥재단DFG의 후원으로 진행된 로마 종교에 관한 연구 사업에 참여했으며, 소르본대학(2004년)과 스탠퍼드대학(2005년)에서 초빙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로마의 종교 개론Die Religion der Romer: Eine Einfuhrung》(2006), 《로마제국의 종교 집단: 형태와 경계 그리고 업적Gruppenreligionen im romischen Reich: Sozialformen, Grenzziehungen und Leistungen》(2007, 편저) 들이 있다.

도서소개

달력 속에 숨어있는 종교와 정치, 사회와 문화의 역사를 파헤치다!

인간, 문명 그리고 시간의 문화사를 기록한『시간과 권력의 역사』.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달력의 역사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시간을 표시해주는 달력이 얼마나 강력한 권력의 수단인지 알려주는 책이다. 달력을 단순히 시간을 객관적으로 측정해주는 도구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과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수단이자 통제의 도구로 바라보고 있다. 율리우스의 달력 개혁, 일주일이 7일이 된 사연, 요일이 행성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유, 일본이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인 이유 등을 밝혀냄으로써 시간과 권력에 대한 근본적이고 놀라운 통찰력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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