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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

  • 김승태 (엮음)
  • |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
  • 2012-04-10 출간
  • |
  • 648페이지
  • |
  • 148 X 200 X 35 mm /816g
  • |
  • ISBN 9788952113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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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국내 최초 공개되는 스코필드 박사의 영문 기고문 번역 수록
스코필드 박사 기고문은 일제 만행에 대한 외국인으로서 객관적 비판 담아 3·1 독립운동사적 사료 가치 높아


이 책의 전반부(Ⅰ, Ⅱ)는 스코필드가 남긴 1차 자료를 중심으로 연대순으로 편집하였고, 후반부(Ⅲ, Ⅳ)는 스코필드에 대한 국내외 인사들의 회고의 글과 그에 관한 주요 연구 논문을 실었다. 부록에는 본문에 번역되어 실려 있는 영어로 된 원문과 스코필드의 연보를 실었다.

Ⅰ. 일제강점기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 및 기고문

01. 스코필드 박사의 일제 만행 보고서
1919년 4월 15일에 일어난 일본군의 제암리교회 방화ㆍ학살 사건에 대한 스코필드의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보고서와 그가 수촌리의 방화 학살 만행에 관해 장로회 기관지인 Presbyterian Witness에 기고한 글을 번역하여 실었다. 수촌리에 관한 보고서도 같은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이 보고서는 장로회 기관지인 Presbyterian Witness 1919년 7월 26일자에 실린 것에서 번역하여 실었다.

02. 스코필드 박사의 식민지 한국의 상황에 대한 영자 신문 기고문
1919-1920년 사이에 스코필드 박사가 일본에서 발행된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행된 글로브(The Globe) 비롯한 몇 개 영자 신문 잡지들에 기고한 14개의 기고문을 번역하여 실었다. 여기서 그는 일제 고관들의 안일한 한국 상황 인식과 피상적인 개혁을 비판하면서 근본적인 동화정책과 민족차별을 철폐하고, 한국인에 대한 강압과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한국의 독립과 자치를 허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03. 스코필드 박사의 국내 신문 기고문
동아일보 창간호에 기고한 스코필드의 글과 1926년 6월 한국을 일시 방문했다가 캐나다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캐나다에 있으면서 크리스마스 무렵 국내 신문을 통해 한국인에게 보낸 3편의 편지 형식의 기고문을 실었다.

Ⅱ. 해방 이후 스코필드 박사의 기고문

해방 후 스코필드가 은퇴하고 한국에 다시 와서 국내의 언론에 기고한 3ㆍ1운동에 대한 회고나 당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충고, 현대 사조에 대한 감상 등 다양한 내용의 기고문들을 한데 모으고, 영문으로 된 것은 번역하여 실었다.
마지막에 실은 “박정희 신임 대통령을 위한 기도문”은 스코필드가 언론에 기고한 글은 아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드린 그의 진심을 담은 기도문이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기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번역하여 실었다. 이 기도문은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을 이틀 앞둔 12월 15일 주일에 서울 용산에 있던 군인교회에서 열린 취임축하예배에 직접 박 대통령 당선자로부터 부탁을 받고 드린 기도문이다.

Ⅲ.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회고

국내외 주요 인사들의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회고의 글들을 실었다. 외국인이 영문으로 쓴 글들은 번역하여 실었다.

Ⅳ.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연구 논문

여기에는 스코필드 박사에 관한 주요 연구 논문 4편을 발표 연대순으로 실었다. 여기에서도 영문으로 된 논문은 번역하여 실었다.

부록
앞의 본문에서 번역하여 실은 영문 기고 자료의 원문을 실었다.

출판사 서평
이 책의 출간 목적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주고 일제의 3·1 독립운동 탄압 실상을 사진 자료와 함께 해외에 알리고, 일제의 만행과 한국인의 인권 침해에 대하여 일본 총리와 조선총독 등 일본인 고관들에게 항의했던 스코필드 박사의 영문, 국문 자료를 발굴 번역하여 연구자에게 도움을 주고 학생과 일반인들에게도 그의 숭고한 인도주의 정신과 실천을 널리 알리려는 데 있다.
이 책에는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1919년 4월에서부터 1920년에 한국을 떠날 때까지 스코필드가 해외 언론에 일본의 만행과 제국주의를 규탄한 글과,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은퇴한 후 1959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1970년 한국 땅에서 영면할 때까지 국내 언론에 기고한 글, 그리고 그에 대한 회고록과 연구 논문을 실었다. 특히, 3·1 독립운동 직후의 기고문은 영문을 첨부하여 그가 쓴 문장을 원어로 느낄 수 있다.
스코필드는 어려운 이웃과 후진을 양성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기미독립운동에 직접 관여하였고, ‘민족대표 34인’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고,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70년 4월 15일 서울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그가 사랑했던 한국인들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을 평생 펼쳐 나갔다.
스코필드에 대해서는 현재 전기가 한 권과 연구 논문이 있기는 하나 그가 남긴 방대한 자료를 한데 모은 자료집이나 영문으로 된 자료와 논문을 번역한 책은 아직 없었다. 이 책에는 캐나다 현지에서 수집한 자료를 번역하여 실어 연구자는 물론 쉬운 문체로 번역, 윤문하여 학생이나 일반인도 쉽게 자료를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며,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石虎弼) 박사의 서거 42주기를 맞아 ‘제10회 스코필드 박사 추모기념식 및 자료집 출판 헌정식’이 2012년 4월 12일(목)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3층) 스코필드홀에서 개최된다.

스코필드 박사 소개
3·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4인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캐나다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는 세계적 수의학자로 1916년 자원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세균학 교수로 일하였는데,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으로부터 독립만세 현장의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사진 기록으로 남겼으며,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적극 지원하였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사건이 일어나자, 감시의 눈을 피해 제암리 일대의 현장을 사진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렸다. 만세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과 어윤희,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잡힌 사람들을 옥중 방문하였고, 감옥에 갇힌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고등계 형사의 밀착감시, 암살 미수 등 일본의 전방위 견제와 캐나다 선교회와의 갈등으로 반강제로 캐나다로 귀국하게 되었다. 캐나다에 돌아간 후에도 국제 언론에 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였고, 이에 일본은 한국에서의 무단통치와 문화 말살 정책을 다소 완화하게 된다.
토론토 수의과 대학에서 그는 가축에서의 출혈 원인을 규명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이 연구는 오늘날 사용되는 혈액응고 방지제 디큐모랄과 비타민 K 발견으로 이어졌다. 캐나다에서 은퇴한 후 1958년부터 한국에 영구 정착하여 서울대 수의과대학, 연세대 의과대학, 중앙대 약학대학에서 세균학 등을 강의하였다. 보육원 후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신약성경반 주관 등으로 바쁜 날을 보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롯한 역대 정권에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정의사회 수립과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주장하여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놓인 적도 있었으나 당시 지식인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70년 4월 12일에 별세하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사단법인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소개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는 조선의 독립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의 공적을 기리며 그의 사랑, 자유, 정의, 희생, 청렴, 생명존중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계승 발전시킴을 목적으로 2009년 9월 4일 창립되어, 2010년 7월 13일에 국가보훈처로부터 비영리법인 설립허가를 받고 사단법인으로서 정식 출범하였다.
2011년 3월 스코필드박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학생의 한 명이었던 KAIST 교수 유진 박사가 회장으로 있으며, 사무실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본관 616호에 자리 잡고 있다. 이사진에는 스코필드 박사에게 직접 가르침과 도움을 받았던 인사들이 주축으로 활동해 온 ‘호랑이스코필드동우회’와 박사가 근무하였던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들, 그리고 스코필드 박사의 유지를 받들어 계승하고자 하는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과 공동으로 스코필드 추모장학기금을 조성, 해마다 4월 12일 스코필드 박사 서거일에 추모기념식과 기념장학금 수여식을 갖고 있으며, 기념학술세미나도 매년 개최하고 있다. 향후 스코필드 박사 동상 건립, 스코필드 학생동아리 설립 지원, 스코필드 사료 발굴 및 연구지원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기념사업회 홈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다.

<책속으로 추가>

총독부의 미움을 받아 1920년 캐나다로 귀국했던 그는 온타리오(Ontario) 수의과대학에서 세균학 교수로 줄곧 재직하다가 1958년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 후 서울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영어성경반을 열어 학생들에게 이웃과 나라 사랑, 부지런하고 정직한 삶의 태도, 건설적인 비판정신 등을 심어 주려고 애썼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고, 불우한 아동들을 돌보는 데에도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또 여러 언론에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의 부정부패와 비민주주의적인 행동들을 거침없이 비판하여 한국의 사회발전에 기여한 바가 사뭇 컸다. (336쪽)

한국에서 스코필드의 활동은 3·1 운동을 지원하고, 당시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농장에서 힘겹게 일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기억과 어렵게 대학교육을 마친 자신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기독교 정신에도 철저한 사람이어서,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을 돕거나 고아들을 돌보는 데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다.
또한 교육과 연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마음가짐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특별한 사유 없이 강의에 늦거나 결석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학생들의 생활이 검소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멋을 내고 다니는 것도 경계했다. 스코필드는 “한국에 와서 학생이 구두닦이 소년에게 발을 내밀어 구두를 닦는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하면서 학생답게 검소하게 생활하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346쪽)

한국인들이 전국적인 평화 시위를 시작하기 전날 저녁 이갑성은 다시 스코필드 박사를 방문해서 그에게 독립선언문의 사본을 보여주고 3월 1일에 있을 사건들을 후대에 알리기 위하여 사진을 촬영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세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독립선언문이 공개적으로 낭독된 파고다 공원 바깥에서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면서 이 기념비적인 사건의 유일한 사진 기록이 된 역사적인 사진들을 찍었다. 이 역사적인 날의 나머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다음 날 3월 3일의 고종의 국장 준비가 계속 되는 와중에 서울 전역과 주변 지역에서 독립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일본 경찰은 검거를 계속했고 얼마 안 가 경성의 감옥 대부분은 수감자로 넘쳐나게 되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러한 경과를 깊어 가는 근심으로 지켜보았다. (402-403쪽)

마을 사람들은 나에게 그들이 마을에서 독립을 외치지 않았으나, 모든 한국인들처럼 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장날에 자유를 외쳤다고 말했다. 그들은 거기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기 때문이 아니라면, 왜 그들만 그렇게 가혹한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일본 헌병이 죽었고 헌병대가 불탔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분별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그 일은 몇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507쪽)

목차

화보
일러두기
추천사 | 박유철
머리말 | 유 진
[해제] 한국을 조국처럼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한 캐나다인, 스코필드 박사 자료 | 김승태

I. 일제 강점기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 및 기고문

1. 스코필드 박사의 일제 만행 보고서
01. 제암리 학살 만행 보고서(1919. 4)
02. 수촌리 학살 만행 보고서(1919. 7. 26)

2. 스코필드 박사의 식민지 한국의 상황에 대한 영자 신문 기고문
01. 한국 사태를 조사할 제국조사위원회(1919. 7. 1)
02. 한국 민심의 파악: 일본의 가장 중대한 문제와 실패의 원인(1919. 8. 2)
03. 한국에서의 개혁 I: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도전 - 불가능한 정책(1919. 8. 26)
04. 한국에서의 개혁 II: 캐나다 혹은 아일랜드? - 조사의 필요성(1919. 8. 27)
05. 한국에서 행해지는 고문: 미즈노 박사가 해결할 문제(1919. 11. 29)
06. 한국에서 죄수들에게 행해지는 고문: 일제 통치 하에서의 죄악(1920. 1)
07. 한국의 개선책: 새로운 제도의 비평적이고 건설적인 조망(1920. 3. 12)
08. 한국의 개선책: 비평적 조망 II - 헌병경찰제도의 폐지(1920. 3. 13)
09. 한국에서의 개혁 III - 실패의 원인: 가혹한 통치 탓에 진정한 개선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다(1920. 3. 14)
10. 한국: 프랭크 헤론 스미스 목사에 대한 답변(1920. 4. 10)
11. 압제자의 멍에 아래 신음하는 한국: 서울의 한 의료인이 전하는 한국의 자유를 향한 부르짖음(1920. 7. 12)
12. 한국에서 일본의 개혁(1920. 7. 17)
13. 한국의 미래: 하라 일본 총리와의 인터뷰(1920. 9. 4)
14. 한국의 여성들은 ‘힘’을 가지고 있다(1920. 6. 7)

3. 스코필드 박사의 국내 신문 기고문
01. 한국 발전의 요결(1920. 4. 1)
02. 조선의 친구여(1) 캐나다로 귀국 중인 스코필드씨 편지(1926. 9. 17)
03. 조선의 친구여(2) 실행이 제일(1926. 9. 19)
04. 나의 경애(敬愛)하는 조선의 형제여?스코필드 박사 서한(1927. 1. 5)
05. 경애(敬愛)하는 조선 형제에게(1931. 12. 26)

II. 해방 이후 스코필드 박사의 기고문
01. 민심은 공포에 잠겨 있다 의사당 앞에 무장경관이라니(1959. 1. 3)
02. 의, 용기, 자유의 승리(1960. 4. 28)
03. 내가 본 한국혁명(1961. 1. 8)
04.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1961. 3)
05. 정직은 번영에의 유일한 길이다(1961. 4)
06. 나는 이렇게 본다. 한국의 군사혁명(1961. 6. 15)
07. 3·1 운동(1962. 3. 2)
08. 서울대의 문제점(1962. 12. 3)
09. 1919년 3월 1일과 1963년 3월 1일(1963. 2. 28)
10. 스코필드 박사, 박의장에게 서한(1963. 3. 23)
11. 3·1 독립선언기념탑 제막식에서 한 스코필드 박사의 축사(1963. 8. 17)
12. 나도 한국의 분신, 할 말은 해야겠다(1963. 9. 13)
13. 내핍은 수범(垂範)에서만(1964. 1. 16)
14. 사건의 전모 밝혀야(1964. 3. 3)
15. 나는 왜 돌아왔나?(1965. 1. 4)
16. 1919년 3월 1일, 삼일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1966)
17. 하나로 뭉친 독립만세(1969. 3. 1)
18. 3·1 운동은 한국 정신의 상징(1969. 3. 1)
19. 현대사조(1967~1969)
20. 한국 국민에 보내는 메시지(1970. 3. 1)
21. 스코필드 박사 병상 단상록(1970. 4. 16)
22. 박정희 신임 대통령을 위한 기도문(1963. 12. 15)

III.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회고
01. 석호필 박사의 최후 | 백난영, 전택부(1970. 5)
02. 고 스코필드 박사 간병 365일 | 태신자(1970. 4. 17)
03. 1919년 3·1 운동과 선교사들 | J. 어니스트 피셔(J. Ernest Fisher)(1975. 3)
04. 구두 밑창에 3·1 운동 사진 필름 숨겨 임정(臨政)에 전달 | 정환범(1997. 5)
05. 스코필드: 조선을 치유한 의사 | 정운찬(2004. 2)
06.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비범한 수의학자 | 더글라스 C. 메이플스던(Douglas C. Maplesde)(2005)
07. 국립묘지에 잠든 벽안의 애국지사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 이삼열(2006. 3)

IV.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연구 논문
01.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와 한국인의 민족의식 | 도레타 모티모어(Doretha E. Mortimore)
02.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의 영성 | 남태욱
03. “주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와 한국 독립운동 | 바바라 리걸트(Barbara Legault), 존 프레스콧(John F. Prescott)
04. 스코필드 박사의 의료(교육)·사회선교와 3·1 독립운동 | 이만열

부록
I. 원문
II. 스코필드 박사 연보

찾아보기 | 인명
§

저자소개

저자이자 엮은 김승태는
현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학력
1986. 8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문학석사)
2002. 2 한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신학석사)
2006. 8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문학박사)

주요 경력
1984. 6~1989. 11 독립기념관 연구원 및 자료과장
1990. 9~2007. 6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
2005. 1~12 독립유공자서훈공적심사위원
1990. 9~현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2001. 12~현재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

도서소개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은 3ㆍ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4인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캐나다인 스코필드 박사의 자료집이다. 해방 후 스코필드가 은퇴하고 한국에 다시 와서 국내의 언론에 기고한 3ㆍ1운동에 대한 회고나 당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충고, 현대 사조에 대한 감상 등 다양한 내용의 기고문들을 수록하였다. ‘박정희 신임 대통령을 위한 기도문’을 수록하여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기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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