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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우위의 중화를 찾아서

위치우위의 중화를 찾아서

  • 위치우위
  • |
  • 미래인
  • |
  • 2010-10-15 출간
  • |
  • 512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83946218
★★★★★ 평점(10/10) |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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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고대의 하상주 시대에서 현대의 문화대혁명까지
편협한 중화주의에 날리는 준엄하고 통렬한 죽비소리


“현대의 루쉰”으로 불리는 문화학자 위치우위(余秋雨)가 2000년대 초반 절필 선언 이후 8년 만에 펴낸 문화비평집. “이제부터 내가 쓴 문화 산문은 모두 이 책의 문자와 표제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저자 서문에 밝혔을 만큼, 지난 40년간 중국문화사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의 탐구 역정을 집대성한 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대의 하상주 시대에서 현대의 문화대혁명까지 중화문화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들과 인물들을 물 흐르듯 거침없이, 불타오르듯 강렬하게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그의 필봉은 “역시 위치우위!”라는 찬탄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도래와 더불어 한족 중심 중화주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중화를 찾아서’라는 책 제목은 수상쩍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중화문화의 유구한 흐름을 되짚어내면서, 저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돋을새김한 부분은 바로 한족 중심 중화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다.
이는 최근 ‘대국굴기(大國?起)’를 모토로 중국인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배타적 대중화주의에 대한 학문적 반격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른바 대국주의, 대중화주의는 한족 위주의 혈통주의로 빠져 오래된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쉽다고 지적한다. 그는 중화문화의 찬란한 백화만발은 오히려 외부 문화의 적극적인 흡수 및 융화를 통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수많은 중국인들이 중화문화의 절정기라 부르며 그리워하는 당대(唐代)는 실은 페르시아, 인도 등 외래문화와의 자유로운 교류의 산물이며, 한족 왕조를 멸망시킨 원흉으로 증오하는 북위·원·청 등의 유목민족들 역시 중화문화에 본디 결여된 호방한 기질, 즉 ‘광야의 힘’을 주입시킨 장본인들이다. 이로써 중화문화는 마치 광활한 초원에서 준마에 올라타 채찍을 휘두르며 내달리는 것처럼 전에 없는 생명력을 구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화문화의 역사에서 ‘호인(胡人)’의 한족화 과정은 또한 한족의 ‘호인화’ 과정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를 가리켜 ‘쌍방향 동질체의 나선형식 상생’이라고 명명한다.

요즘 ‘오릉의 젊은이’들은 쉽게 격정에 휩싸여 민족주의에 열광한다. 그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외국의 기념일은 절대로 지낼 수 없다”고 말하며 “중국인이라면 반드시 한복(漢服)이나 당장(唐裝)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당나라 시절 장안 거리에 가볼 수 있다면 분명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뛰는 가슴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장안성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은 외래문화라면 질색하고 경계를 일삼는 그들의 신경질적인 표정에 경악할 것이다. (…중략…)
나는 현대를 사는 이러한 ‘오릉의 젊은이’들을 동정한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난세(亂世) 철학’에 주입당하여 가는 곳마다 경계를 짓고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들은 권모술수를 지혜라 여기고, 스스로 모든 것을 막는 자폐(自閉) 상태를 문화인 양 오인하며 자신이 사는 곳을 천하라고 믿는다. 또한 이렇게 해야만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나약하고 불안한 열등 심리는 순식간에 포악하고 사나운 영웅주의, 비정주의(非情主義)로 가장한다. 그리하여 때로 사람들에게 전염시켜, 왁자지껄하게 “서로 위안을 주고받는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 결과 마음은 점점 좁아지고, 배타적인 정서도 더욱 진해지면서 자폐적인 상태에서 점점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본문 351-352쪽)

자신이 속한 문화의 정신적·예술적 깊이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하되, 그것이 지나쳐 자만심이나 자폐 상태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저자의 학문적 태도는 가히 보편적 지성을 추구하는 대학자의 풍모를 보여준다. 그가 책 말미에 중화문화의 미래를 논하는 대목에서 “전체 인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과 우호(友好)”, “인류의 시정(詩情) 넘치는 생존, 조화로운 생존”을 위한 적극적인 참여를 제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의 백미는 중국문화의 고갱이를 창출해낸 위대한 현인들에 관한 풍성한 이야기와 저자 특유의 독창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중화 정신의 밑바탕이 된 두 가지 사상의 창시자인 공자와 노자, 유가의 인애(仁愛)에 맞서 진정 순수한 사랑의 이상(兼愛)을 제출한 묵자,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어 정신문화의 꽃을 피워낸 직하학궁의 학자들, 중국 역사상 최초로 개인의 형상으로 출현한 시인 굴원, 세속의 공명과 탐욕을 벗어나 고원(高遠)한 마음의 경지를 펼쳐 보인 도연명, 유목민족과 한족의 통혼으로 대당 제국의 길을 연 문화개혁가 탁발굉, 주요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함으로써 중국 불교문화의 기초를 닦은 서역 승려 구마라십, 영원히 사람들에게 경이를 선사하는 시를 남긴 이백과 두보, 중세 문화의 전성기이자 정치적 수난기인 송대의 걸출한 사상가들(주희, 육유, 신기질), 거란족 출신의 명재상 야율초재, 예술을 철학적 사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홍루몽』의 작가 조설근, 문화의 암흑기인 청말 민국 초에 모든 것을 바쳐 갑골문을 수집하고 해석함으로써 허공으로 소멸될 뻔한 고대 문화의 찬란한 유산을 지켜낸 학자들(왕의영, 유악, 나진옥, 왕국유), 문화대혁명의 주도 세력에 용감하게 반기를 든 문화 영웅 파금…….
중국 역사에서 명멸했던 여러 왕조와 영웅호걸, 사상가, 문인, 예술가 들에 관한 풍성한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중화문화사를 재치 있게 압축해내는 저자 특유의 탁월한 문재(文才)는 이 책에서 한층 빛을 발한다. 유려하면서도 장중하고, 서정적이면서도 힘 있는 필치로 독자의 정신을 흔들어 일깨우는 위치우위 ‘문화산문’의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몇 년 동안 나에게 던져진 많은 질문 가운데 하나는 산문을 쓰는 데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마천”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질문자는 왠지 그냥 해보는 소리인 것처럼 유머로 받아들이기 일쑤였다.
“물어본 것은 산문인데, 왜 난데없이 고대 역사학자 이름을 꺼내십니까?”
어떻게 설명을 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후 똑같은 질문을 대하면서도 역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많은 이들의 책을 접하게 되었지만, 만약 가장 마음에 드는 산문가가 누구냐고 자문한다면 나의 답변은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산문은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경계가 높은 것은 분명 역사와 관련된 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역사야말로 가장 산문에 가까워 진정한 산문가라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역사는 바로 이러한 것이니, 사마천은 역사를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은 셈이다. 그는 줄곧 3인칭 서술 주체를 통해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지만 일반 역사 저작물처럼 지나치게 엄숙하거나 가을서리처럼 냉담하지 않다. 그의 글에는 풍부한 표정이 담겨 있다. 때로 칭찬하고 때로 비난하며, 때로 사모하고 때로 그리워하며, 추모하거나 분노를 내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멸시하거나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보다 은연중에 그야말로 입술과 치아 사이, 눈썹과 눈 사이에 존재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근본적인 서술 기조의 연관성을 흩어놓지 않는다.
―<역사의 모본>에서(본문 195-196쪽)

북위 효문제 탁발굉의 개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심히 우려하는 것은 현재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불고 있는 맹렬한 대한족주의, 대중원주의에 그릇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점이다. 효문제 탁발굉의 행동이 그들에게 또 한 번 한족의 문화가 모든 문화에 우선한다는 증거처럼 간주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효문제 탁발굉의 한족화 정책이 단순히 한족 문화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는 냉철한 시각으로 자신이 이제 막 차지한 드넓은 통치지역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제 군사력이 아닌 또 다른 통치 자격을 갖추어야만 했다. 어쩌면 효문제는 그와 거의 동시대에 살다 죽은 고대 마케도니아의 젊은 군주 알렉산드로스 대제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이 끝난 후 언제나 경건한 자세로 신령 앞에 엎드렸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새로운 통치권이었기 때문이다.
효문제 탁발굉은 부하들에게 한족 문화를 신봉할 것을 주문했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호방한 기질마저 한족 문화와 융합하도록 강제한 적은 없었다.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그들이 충분히 한족화를 이룸으로써 호방한 기질 또한 한족 문화에 스며들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선비족에게 한족의 복식과 한족의 언어를 쓰도록 강요하였지만 한족에게는 이를 강제하지 않았다. 사실, ‘호인’(胡人, 오랑캐)의 한족화 과정은 또한 한족의 ‘호인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쌍방향 동질체의 나선형식 상생’이라는 융합 방식으로 개괄하고자 한다.
―<대당으로 가는 길>에서(본문 294-295쪽)

당대(唐代) 장안(長安)은 이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당나라에 귀순하거나 복종하기 위해 온 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안은 결코 그런 오만한 시선으로 외지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장안은 다양한 문명에 대한 경건한 숭배자였다. 장안은 단순히 자신이 다른 문명에 대해 ‘관용’을 베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문명을 떠나면 자신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른 문명을 떠나면 장안 자체가 무미건조하고 경색되어 크게 위축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장안은 진심으로 다른 문명을 감상하고 추종했다. 민감한 외래 문명은 곧 주인의 이러한 태도를 감지했다. 그래서 더욱더 장안을 자신의 가향(家鄕)처럼 여기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자 했던 것이다.
―<장안의 아브라함>에서(본문 343쪽)

요즘 ‘오릉의 젊은이’들은 쉽게 격정에 휩싸여 민족주의에 열광한다. 그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외국의 기념일은 절대로 지낼 수 없다”고 말하며 “중국인이라면 반드시 한복(漢服)이나 당장(唐裝)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당나라 시절 장안 거리에 가볼 수 있다면 분명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뛰는 가슴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장안성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은 외래 문화라면 질색하고 경계를 일삼는 그들의 신경질적인 표정에 경악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다가가 세세하게 물어본다면 분명 말은 통하는 것 같지만 아무도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절반은 정신이 들어 장안성의 국내외 사람들에게 허심탄회하게 가르침을 청할 것이나, 나머지 절반은 ‘호희주점’을 드나드는 방탕한 건달로 또 다른 극단을 치달리며 결국 인생을 망칠 것이다.
―<장안의 아브라함>에서(본문 351쪽)

예로부터 중국적 정서가 되어버린 흑백논리에 따르면, 죽음으로써 의를 지킨 문천상의 반면에는 원나라와 쿠빌라이칸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사실 역사는 언제나 극히 간단한 외모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본질을 장식해버린다. 일반 대중의 요구도 극히 단순하여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읽기 쉬운 텍스트’로 만들고, 이로써 복잡한 상황을 거부해버린다. 인류의 커다란 오류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때로 진실인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문천상이 의를 위해 죽음을 택했다고 해서 그의 마음속에 쿠빌라이칸에 대한 원망과 원한이 사무쳤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며, 당시 사람들 가운데 문천상의 죽음을 가장 아쉬워하고 애석하게 생각했던 이가 바로 쿠빌라이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역사는 두 명의 걸출한 영웅이 추호의 개인감정도 없이 묵묵히 대치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마치 매우 심각하고 매순간 강력한 힘이 발산하는 것처럼 만들어놓는다. 중국인들의 역사관은 이처럼 천박한 이야기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대립하는 이들이 상대를 서로 극찬하는 모습은 아예 생각할 수조차 없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인정하는 적수의 마음을 느낄 만한 여유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문천상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추모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반대편에 있었던 쿠빌라이칸을 증오할 수는 없다. 오히려 쿠빌라이칸이야말로 뛰어난 통치자, 송대의 수많은 황제들보다 훨씬 우수한 통치자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원나라는 매우 훌륭한 왕조였다. 원 왕조를 통해 중국은 다시 한 번 진정으로 통일로 회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원의 통일은 더욱 광대하고, 더욱 효과적이며, 더욱 개방적이었다.
―<찬란한 문명의 꽃>에서(본문 427-428쪽)

문명이나 문화에 대한 공포의 폐해는 이런 공포를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최고 통치자조차도 거짓을 진실로 여기게 되고, 결국 자신마저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착각으로 인한 공포감이다. 이러한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바로 문화 주구들이다. 그들은 개인 이력이랄 것이 없다. 일정한 주군도, 일정한 입장도 없으며, 일정한 의견이나 주장도 없다. 영원히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밀고하고 적발할 뿐이다. 그들의 밀고, 그들의 적발은 자기 멋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분석과 비판, 정치적 강령의 원칙에 따른 판단까지 도맡는다.
이러한 배역은 명대에서 시작하여 청대에 성행했으며,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던 근대에 이르러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문화대혁명 기간에 활개를 펼쳤다. 지금도 골목 으슥한 곳에 소수가 잔존하고 있다. 다만 입장이나 주장에 조금씩 변화를 주었을 따름이다. 만약 대대로 이어져온 그들의 대열을 소급해 올라가보면 주원장이 길러낸 주구까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중국문화의 부정적인 산물이다.
―<문자옥의 시대>에서(본문 464쪽)

이미 작고한 왕소파(王小波)는 중국문화계에는 단지 두 종류의 사람, 즉 일을 하는 사람과 타인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후자의 힘이 오히려 막강하다. 중국문화의 최대 함정을 파는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적발이나 비판이란 말은 서양의 근대 학술계에서 말하는 ‘비판’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이는 진실, 이성, 검토, 반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허위, 감정, 광고, 공격을 최우선으로 한다. 따라서 근본적인 인문 정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된다. 중국문화는 훌륭한 부분이 많지만 치명적인 약점도 적지 않다. 이런 약점들이 여기에 특별한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문화와 서구문화를 비교해보면, 실증에 관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처에 유언비어가 난무한다. 사람들은 진실 여부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진위를 가늠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한 기능이나 절차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이는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온상이 된다.
또한 중국문화는 서구문화에 비해 법제 의식 역시 부족한 편이다. 인신권(人身權)이나 명예에 대한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비방이나 모함을 죄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이는 그것이 걱정 없이 안주할 수 있는 울타리가 되었다.
이 밖에도 중국문화는 서구문화에 비해 공공 공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에 피해를 주는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자신 역시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철학자 루소가 말한 것처럼 동료가 피해를 입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것은 마치 무인지경처럼 대중 사이로, 공공매체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중국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행해졌던 법가의 술(術), 소인배의 철학, 폭민(暴民) 심리, 반이성적 전통에 현대사에서 끝없이 지속되었던 계급투쟁에 관한 관념과 실천이 모두 합쳐져서 이처럼 거대한 함정을 파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중화는 어디로 가는가>에서(본문 502-503쪽)

위치우위는 본시 중화문화에 지극한 애정과 관심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문화를 제대로 인지하고 옹호하길 원하는 인문학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른바 대국주의, 대중화주의가 몰고 오는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기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대중화주의는 자칫 한족 위주의 혈통주의로 빠져 오래된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쉽다. 그는 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숭상하는 대당(大唐)의 위용과 호방한 기질, 문화적 개방성 등이 과연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를 심층적으로 살피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북위(北魏)의 위대한 황제인 효문제 탁발굉(拓跋宏)을 찾아 그를 진정으로 거시적인 의미의 문화개혁가로 추앙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실제로 대당 제국 황가의 주인인 이씨(李氏)가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 결정체라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이외에도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독특한 매력으로 기존의 중국문화에 융합할 수 있었던 이유를 탐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심규호, ‘역자 후기’에서(본문 509-510쪽)

목차

1장 황제를 추측하다
2장 신화와 전설의 시대
3장 은허에 점을 쳐서 묻다
4장 옛길의 서풍
5장 검은색, 환하게 빛나다
6장 직하학궁의 학자들
7장 시인이란 무엇인가
8장 역사의 모본
9장 숲속의 집 한 채
10장 천고에 울려 퍼지는 소리
11장 첩첩산중의 전원
12장 대당으로 가는 길
13장 서천 부처님의 가르침
14장 장안의 아브라함
15장 이백과 두보의 나날
16장 찬란한 문명의 꽃
17장 두 사람의 이방인
18장 문자옥의 시대
19장 중화는 어디로 가는가

저자소개

저자 위치우위 余秋雨 는 중국의 예술평론가, 문화사학자. 1946년 중국 저장(浙江) 성 위야오(余姚)에서 태어나 상하이희극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문화대혁명을 겪었으나 병을 얻어 학업을 중단하고, 저장 성 벽촌에 파묻혀 동서양 고전을 섭렵하면서 사상적 깊이를 다졌다. 상하이로 복귀한 그는 학업에 정진하여 모교인 상하이희극학원 교수가 되었고, 이후 상하이희극학원, 푸단대학, 화동사범대학 등 상하이 유수 대학들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로 있으면서 저술활동에 주력했다. 국내외에 사론(史論)과 관련된 수많은 저서를 발표해 ‘국가에 뛰어난 공헌을 한 학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론뿐만 아니라 예술이론 쪽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하는 수필과 기행문을 발표하면서부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처음 발표한 답사기인 『중국문화기행』(文化苦旅)은 1,000만 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기록하면서 중국 젊은이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위치우위 붐’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발간된 『세계문명기행』(千年之嘆), 『유럽문화기행』(行者无彊) 등도 수십 종의 해적판이 발간과 동시에 판매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현대 중국어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면서도 사색의 깊이를 두루 갖춘 ‘인문적 산수’의 전형을 세웠다고 평가되는 그의 글들은 중국 초?중?고 교과서에 실리는가 하면 대학생들에게도 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07년에는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인 시나닷컴이 인터넷 투표를 통해 ‘현대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100명의 중국 작가’를 선정한 결과 소동파, 백거이, 장자 등을 제치고 9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를 “현대의 루쉰”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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