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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세트

서태후 세트

  • 장융
  • |
  • 책과함께
  • |
  • 2015-07-27 출간
  • |
  • 608페이지
  • |
  • 152 X 225 X 35 mm
  • |
  • ISBN 9791186293232
★★★★★ 평점(10/10) |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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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전 세계 베스트셀러 《대륙의 딸》《마오》의 저자 장융이 들려주는
난세의 여걸, 서태후의 생애와 시대


한나라 여후, 당나라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의 3대 악녀, 야망으로 가득 찬 후궁, 권모술수로 국가를 손에 넣은 독재자……. 열여섯 살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마침내 황실의 최고 결정권자가 되어 50여 년 동안 청나라를 통치한 서태후에 대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서태후의 생애를 다룬 기존의 책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서, 실존 인물의 회고를 바탕으로 하거나 상상력을 가미하고 가상 인물을 앞세운 역사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감성적으로 ‘여성 서태후’에 초점을 맞추어 궁중의 암투를 서술했고, 이는 기존의 서태후의 이미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서태후가 사망한 지 3년 만에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이내 군벌들이 난립해 나라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살아서 악녀로, 죽어서는 망국의 장본인으로 역사에 남은 서태후. 야사와 정치적 암투를 걷어내고 진정한 서태후의 삶을 복원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지난 100년은 서태후에게 매우 부당한 시기였다. 서태후는 폭정을 거듭한 사악한 인물이거나 아니면 절망적으로 무능력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혹은 그 둘 모두이기도 했다. 서태후가 성취한 업적 중 일부분만이 인정되었는데, 그나마 그 공은 언제나 그녀의 부하 몫으로 돌아갔다. 이는 대체로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광서제의 이름으로만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태후의 정확한 역할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확한 정보와 지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풍문만 무성했고 거짓말이 계속 만들어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믿었다.” (570쪽)

쓰촨 성 첫 해외 유학생으로 영국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영국으로 귀화한 작가 장융이 《대륙의 딸》 《마오》에 이어 평전 《서태후》를 집필하였다. 저자 장융은 명 왕조와 청 왕조 자료의 보고(寶庫)인 중국 제1역사당안관(第一歷史?案館),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기록보관소를 비롯한 중국어 자료들과 미국 의회도서관, 영국 국립보존기록관, 영국 윈저 궁의 왕립문서보관소,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외교부기록보관소,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 등 서구의 자료를 섭렵하고, 특히 중국에서 새로 나온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서태후 전기에 하나의 전범(典範)이라 불릴 만한 책을 완성했다.
궁중뿐 아니라 서구 세력까지 장악했던 치밀한 정치력, 경쟁과 협조를 넘나들며 타협을 이끌어내는 리더십, 외세의 침략과 내부 반란에 맞서 싸운 강인함,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영국 화가와의 나이와 국적을 초월한 우정, 비극으로 끝난 환관과의 사랑, 불타버린 원명원을 재건하려는 집착……. 잔혹하기만 했던 이미지를 뒤엎고,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 서태후의 삶을 청나라의 역사와 함께 생생하게 그려낸 《서태후─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를 만나보자.

서세동점의 시대에 최후의 권력을 누린 악녀인가, 중국을 근대로 이끈 혼란기의 개혁가인가
파격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새롭게 읽는 서태후 평전


열여섯 살에 함풍제의 무수한 후궁 중 한 명으로 선택된 서태후! 함풍제가 1861년에 사망하고 황제 사이에 낳은 아들이 황위에 오른 뒤로 서태후는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 책은 서태후가 1908년 사망할 때까지 47년 동안 중국을 다스리면서 중국 개혁을 가로막는 엄청난 장애물들과 어떻게 싸웠는지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녀가 완고한 보수파이고 잔인한 전제군주라는 통설을 완전히 뒤집는다.
이를 테면, 흔히 서태후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정적을 살해했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그 수가 수십 명도 되지 않고, 게다가 대부분이 서태후를 암살하려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목숨을 앗아갔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아들 동치제와 동태후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일축한다. 동치제는 평소 생활방식에 따라 매독에 걸렸거나 아니면 당시 유행한 천연두가 사인일 것이고, 동태후는 의료 기록에 따르면 뇌출혈로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태후는 10대 시절부터 친한 친구이자 20여 년을 함께 해온 정치적 동반자로서 서로에게 힘을 주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서태후에 대한 중상과 비방은 정확한 근거가 결여된 상태에서 만들어지고 퍼져갔는데, 펄 벅이 이야기한 것처럼 ‘서태후를 증오하는 이들이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보다 목소리가 더 컸을 뿐’이었을 수 있다.
반면에 태평천국운동과 의화단운동, 서구 열강 및 일본과의 전쟁 등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헤쳐 나온 통치자의 면모나 개혁군주로서 성취한 업적들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광서제나 개혁파들의 치적으로 남았다고 역설한다. 서태후가 다스리는 동안 중국은 근대 국가의 기반을 닦았는데, 전기, 전선, 철도 등 기간시설을 다지고 최신식 병기로 군대를 정비했으며, 의회 선거를 도입하여 공화국의 틀을 이룩하고자 했다. 제한적 교육체계인 과거를 폐지하고 근대식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최초로 해외에 대사를 파견하고 국제무역 시대를 열었다. 1천 년 넘게 중국 여성을 고문하던 전족 폐지, 비인권적인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근절, 형벌제 등 억압적 관습 철폐 역시 서태후 치하에 이뤄낸 성과이다. 서태후의 바람대로 최종적으로 입헌군주제가 도입됐다면 잇따른 봉기로 인한 내전과 뒤 이은 군벌들의 난립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는 어느 정도 수긍되는 바가 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일본이 근대화 사업을 시작했는데 일본은 성공하고 중국은 실패한 사례를 살펴보면 참고가 된다. 두 나라의 성패는 지도자와 그 지지 세력의 일치단결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판났다. 일본은 권력자의 명분과 현실이 합치되어 있어서 메이지 일왕과 그 신하들 그리고 국민 전체가 선진국을 향해 나아가려는 진취적 태도를 보인 반면, 서태후의 중국은 그녀가 황제 뒤에서 격화소양(隔靴搔?)의 통치를 해나가려다 보니 국민 전체의 지지를 활기차게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서태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망함과 동시에 최고 통치자가 국가의 진운과 융성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 때문에 서태후 전기는 100여 년 전 중국의 역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인 것이다.” (582쪽, ‘옮긴이의 말’에서)

현재의 중국은 100년 전의 서태후처럼 진정한 부국강병의 꿈을 스스로 이루어나가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국가 일방이 주도하는 부국강병 정책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부정부패, 언론 탄압과 지식인 통제 등으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장융이 궁중 기록과 외교 문서, 공식 문서와 개인 편지, 일기와 목격자 회고담 등 다양하고 신뢰할 만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려낸 서태후의 강력한 힘의 근원은 청 제국에 대한 자존심이었다. 반면 새로운 국가를 이뤄나갈 동반자는 없었던 서태후, 지금의 중국에 꼭 있어야 할 것 또한 부강한 나라를 향해 함께 꾸는 꿈일 것이다.
빠른 전개와 매혹적인 드라마로 가득한 《서태후》는 현대 중국의 탄생을 개관하는 동시에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친밀한 초상화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후궁에서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다스리는 절대군주가 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 서태후의 삶과 그 시대가 펼쳐진다.

1권의 주요 내용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이 청나라에 대한 지분 확대를 호시탐탐 노리는 가운데 열여섯 살 만주족 처녀 자희(서태후)는 황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아들을 낳는다. 남편 함풍제 사망 후 아들 동치제로 황위에 오르자 서태후는 섭정이 되어 정권을 장악한다. 완고한 수구파를 억제하면서 개혁파 관료들과 함께 개국 방향을 정하고, 국제무역과 세관 개혁을 통해 얻은 재화를 바탕으로 통신, 철도, 전기 등 다양한 개혁을 단행한다. 환관과의 비밀스러운 사랑, 아들 동치제의 급서, 뒤 이어 황위에 오른 광서제와의 갈등 그리고 청일전쟁 발발로 서태후는 통치력의 최대 위기를 맞이한다.

2권의 주요 내용
19세기 말, 청나라를 파멸 직전까지 끌고 간 청일전쟁이 끝난 뒤, ‘과거의 대국’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영토쟁탈전에 휩쓸린다. 내부의 반란과 살해 음모,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동시에 서양에 시찰단을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며 강인한 개혁군주의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광서제와 그를 둘러싼 개혁파, 그리고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청나라의 국력은 점점 쇠퇴해가고 마침내 국운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륙의 딸》 《마오》를 잇는 중국 역사 드라마
‘온갖 어려움, 박탈, 정치적 시련을 겪었으나 인간의 위엄을 잃지 않은 여성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국방장관), ‘가장 많이 읽힌 중국 관련 서적’(《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이라는 평을 받은 《대륙의 딸》은 군벌 장군의 첩이었던 외할머니, 골수 공산당원이었던 부모, 문화혁명과 홍위병 활동에 젊음을 저당 잡혔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장융의 첫 번째 책이다. 현대 중국 전반에 걸친 파란만장한 여인 3대의 역사적 생의 기록이자 중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매혹적인 역사소설로 영국 논픽션 최고상, 영국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20세기 최고의 기록문학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장융이 역사학자인 남편 존 핼리데이와 함께 쓴 두 번째 책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10여 년 간 방대한 자료를 면밀히 분석해 완성한 새로운 마오쩌둥 평전이다. ‘원자 폭탄 같은 책’(《타임》), ‘파란만장한 마오의 삶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적나라하게 조명한 굉장한 책’(《가디언》) 등 호평을 받았고 2005년 영국에서 출간된 이후 30개국 이상에서 번역, 출간되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전 세계에서 1500만 부 이상 팔린 《대륙의 딸》과 《마오》에 이어 장융이 세 번째로 선보이는 《서태후―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는 영어와 중국어 자료들을 폭넓게 섭렵하고 활용하여 정치와 음모, 반란과 침략, 열정과 금지된 사랑 등 서태후에 대한 모든 것을 펼쳐낸다. 중국사, 나아가 세계사의 한 중요한 시대에 대한 역사적 사고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을 또 하나의 역작이다.

책속으로 추가
서양 각국에 대사를 파견해 외교력을 확장하다

서방국가들에 대사를 파견하는 것은 서태후의 일관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메울 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외국어를 말할 수 있거나 외국 사정에 밝은 관리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1867년, 북경 주재 미국 공사인 앤슨 벌링게임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자 공친왕은 벌링게임을 유럽과 미국의 특별 대사로 임명하는 안건을 상신했다. (…) 서태후는 파격적으로 그 제안을 즉각 수락함으로써 벌링게임은 서방을 상대하는 중국 최초의 대사가 되었다. 청 제국은 그에게 공식 임명장과 인장을 주었다. 벌링게임의 임무는 새로운 중국을 세상에 알리고 새로운 외교정책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에 손해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거나 제지하면서 중국에 혜택이 되는 것은 적극 동의하는 것’이었다. 그의 수하에는 두 명의 중국인 지강과 손가곡이 따라붙었는데 모든 문제에 대하여 이들과 협의하기로 되었다.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중국 측에 문의해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각국의 외교관 한 명씩을 이 사절단의 서기로 초청했다. (1권 127쪽)

권력에 대한 집착인가 제국을 위한 충정인가
서태후가 곧 권좌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은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는 개혁파를 경악하게 했다. 그녀의 정력적인 제안과 추진력이 없다면 그녀가 시작한 각종 개혁 사업들은 흐지부지될 수 있었다. 여러 날 동안 이홍장은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또 ‘지속적인 공포 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는 순친왕에게 편지를 보내 서태후가 좀 더 권좌에 머무르는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호소했다. 순친왕도 아들 광서제가 서태후의 대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으므로 서태후가 황제의 ‘후견인’으로 몇 년 더 정사에 참여해달라고 호소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아들에게 압력을 넣어 서태후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은퇴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게 했다. 서태후는 군기처를 움직여 관리들의 호소문을 작성케 함으로써 그 운동을 측면 지원했다. (…) 서태후는 양아들의 정신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옹동화에게 광서제를 안정시켜 학과에 다시 집중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조상들에 대한 의무’ 때문에 권력 이양을 잠시 미루는 것이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광서제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1권 233~234쪽)

원명원 복원을 향한 집착
이화원의 여흥이 즐거움을 줄수록, 서태후는 더 큰 심적 고통을 느꼈다. 비겁한 남자들이 일본에 그 큰 배상금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도 폐허가 된 원명원을 얼마나 멋지게 복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할 수 있었겠는가! 거기다 얼마나 많은 근대화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비겁한 남자들을 질책하는 것을 자제하던 서태후는 격분에 휩싸였다. 어느 날 그녀는 엄청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면서 호부 상서 옹동화에게 원명원을 복원시키고자 하니 아편세를 거두어 전부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1860년 공인된 이래 중국의 많은 땅에서 아편이 재배되었는데, 여기서 나오는 세입은 상당한 규모였다. (2권 326쪽)

강유위의 서태후 살해 음모
광서제가 자신의 마력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자, 강유위는 황제에게 보낸 비밀 편지 가운데 하나에서 자신이 오해했으며, 자신은 절대 공자가 과거에 황제로 등극했다는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고 열심히 해명했다. 그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를 노린다는 생각을 지워내려 애썼다. 광서제가 마침내 유혹에 넘어왔고, 강유위는 황제를 배후에서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최초의 인형 조종가가 되어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 노선은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서태후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서태후를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2권 355쪽)

서태후와 광서제의 도피
서태후는 머리에 쪽을 찌고 궁중에서 자주 입던 면으로 된 수수한 푸른 겉옷을 걸친 뒤 노새 마차를 타고 도피를 시작했다. 한여름이라 그녀의 옷은 땀이 흐르는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땀을 흘리는 노새와 짐 때문에 파리와 온갖 곤충이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서태후는 1천 명에 이르는 수행원들처럼 온몸이 비에 흠뻑 젖지는 않았지만, 마차가 진창 위를 지나가면서 거세게 흔들리는 바람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나중에 누군가 노새 두 마리가 싣고 가던 의자를 가져와서 서태후는 조금 편안해졌지만 평탄치 않은 길에선 여전히 의자가 흔들렸다. 다리가 없는 범람한 강을 건널 때, 호위병들은 그녀가 앉은 의자를 어깨에 메고 건넜다. 하지만 물살이 빨라서 서태후는 거의 휩쓸릴 뻔했다. (2권 429쪽)

서양인들과의 친교
격식을 갖춘 알현이 끝나자 모든 부인과 아이들은 편안한 분위기의 연회가 준비된 또 다른 회장으로 안내되었다. 서태후는 세라 콩거를 찾았는데, 그녀는 이에 관해 기록을 남겼다. “황태후는 격정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내 양손을 잡았다.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정이 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일들로 인해 나는 몹시 슬프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실수였지요. 앞으로 우리 청나라는 외국인들과 친구로 지낼 것입니다. 지난 일과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청은 외국인을 보호할 것이며, 앞으로는 서로 친구로 지내길 바랍니다.’” 그것은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동시에 진심 어린 맹세였다. (2권 475~476쪽)
타운리 부인은 서태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드시고 계신 그릇을 선물로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물론 아무도 통치자의 식기를 가질 수 없다는 궁중 예법을 잘 알고 있었다. 타운리 부인의 요청은 그야말로 모욕적인 것이었다. 나중에 서태후는 한 궁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외국인들은 청나라 사람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러니 유럽 사회에서 하는 것처럼 신경 써서 행동하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그녀는 많은 서양인들이 의화단사건으로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모욕도 꾹 참으며 타운리 부인에게 그릇을 선물했다. (2권 475~476쪽)

여성 평등과 교육제도 개혁을 위한 조치를 취하다
다시 한 번 서태후는 강압보다는 설득과 홍보를 통해 여자들을 가정과 남녀 구분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근본적인 유교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대중 앞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극장에 가기도 하며, 전례 없던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서태후는 특히 여성들도 현대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총독, 고관, 귀족 들이 솔선하여 여학교를 세우고 기금을 낼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다. 이어 황태후는 귀족 여성을 위한 학교를 개별적으로 설립함으로써 그녀 자신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그녀가 세운 학교의 교장은 영수 공주가 맡았다. 황태후의 또 다른 계획은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해 졸업하는 여성은 황태후의 학생이라는 호칭을 부여받는 영광과 특전이 주어졌다. (2권 499쪽)

서양식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다
중국 사회의 또 다른 핵심 요소는 제국을 통치하는 엘리트를 선발하는 교육체계(과거)인데 이마저도 결국 폐기되었다. 과거의 교육체계는 근대화를 방해하는 것이었고, 중국의 전반적 사상 체계에도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 교육개혁은 몇 년 동안 서태후의 의제이기도 했다. 그사이에 그녀는 점진적으로 대안 교육체계를 설립했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물론 민간 영역에서도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우회로가 생겨났다. 1905년에 최종적으로 과거가 폐지되었을 때 1천 년을 넘게 중국의 정치 기반을 형성하던 거대한 기둥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붕괴되었다. 새로운 교육체계는 서양식 교육체계에 기반을 두었다. 전반적인 교육 과목이 도입되는 가운데 비록 교과과정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중국의 고전도 살아남게 되었다. 1905년, 유럽식 교실, 도서관, 체육관을 갖춘 신식 학교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영어를 말하는 교사들의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본 세라 콩거는 놀라워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수만 명의 교육받은 청년들이 졸업한 뒤 광대한 인구 속으로 스며들면 장래 중국엔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2권 500~501쪽)

언론의 자유를 구현하다
그녀는 급격히 늘어나는 언론의 불경不敬 사상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언론 자유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를 역모로 간주하고 옛 국법으로 주모자를 처리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으므로 서태후는 그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유학을 가서 온갖 불경스러운 사상을 배워 오니 유학을 중단하거나 억제하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그녀는 이를 듣는 것조차 거부했다. 서태후는 대신 서양과 일본식의 법률과 규정으로 언론을 통제하기로 했고, 이런 시도는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20세기에 들어서자 중국어로 된 신문과 잡지 발행이 크게 증가했다. 제국 전역의 60군데 이상에서 수백 개의 신문과 잡지가 생겨났다. 자금만 있다면 누구든 신문을 낼 수 있었고, 아무도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려 하지 않았다. (…) 서태후가 보인 자신의 정부와 자신에 대한 공격에 인내하는 모습과 다양한 관점을 기꺼이 허용하는 모습은 전임자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또 후임자들과 비교해서도 틀림없이 관대한 것이었다. (2권 503~504쪽)

입헌군주제를 위한 첫걸음
1907년에는 의회 준비기구인 ‘자정원’이 설립되어 과도기의 의회 역할을 수행했다. 의원 구성을 포함해 미래 의회의 설립을 위한 규정 입안엔 열 달이 걸렸다. 이 안은 1908년 7월 8일 서태후에 의해 승인되고 선포되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의원이 상원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군주에 의해 만주족 친왕, 만주족과 한족 귀족, 몽골, 티베트, 회족(이슬람) 귀족, 중간 계층 관리, 저명한 학자, 고액 납세자 중에서 지명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하원에 참석하게 되는데, 지방의회의 의원 중에서 선출되었다. 지방의회는 중국 전역에 설립되는 중이었고, 이 지방 의원은 지방민들이 직접 선출했다. 지방의회 선거를 위한 선거 규정안은 1908년 7월 22일 서태후의 승인을 받고 공표되었다. (2권 522쪽)
서태후가 만든 입헌군주제에서 중국 유권자들은 서양의 유권자들만큼 권력을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이 무자비한 전제 군주제에서 탈피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정부의 문호를 개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국민이 된 것이었다. 서태후는 앞으로 자신의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중국 정치에 협상의 장을 도입하게 될 것이었다. 군주와 다양한 이익집단을 대표하는 국민대표는 그 장에서 협의하고, 흥정하고, 또 논쟁도 벌일 것이었다. 서태후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의 공정함과 합의를 선호하는 성격을 생각하면 국민들의 소망은 계속해서 폭넓게 수용될 것이었다. (2권 524쪽)

당시 조선의 상황과 일본의 야욕
1907년 여름, 일본은 대한제국을 거의 합병했다. 고종은 강제로 퇴위당하고 그의 아들 순종이 즉위했는데, 고종이 일본인 ‘고문’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고문은 다름 아닌 전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였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초대 통감이 되어 자신의 승인 없이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2년 뒤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하여 ‘가혹한 통치로 인해 대한제국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고 보도했다. 서태후는 이토가 조선 통감으로 승진한 모습을 보고 1898년의 일을 떠올렸다. 이 ‘일본을 세계열강의 반열로 끌어올린 주역’은 그 당시 광서제를 거의 통제할 정도로 가깝게 다가와 있었으며 만약 이토가 광서제의 고문으로 취임했다면 중국 역시 또 다른 대한제국이 될 수도 있었다. (2권 542쪽)

최후의 순간을 예감하다
실제로 서태후는 자신의 개혁으로 청이 급격히 변할 것을 예견했고, 이로 인해 제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한 만주족 황제는 보장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망하면 계승자는 아마도 그녀와 같은 힘을 가질 수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도입하려던 입헌군주제는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청나라는 물론 서양인들도 진작에 서태후가 죽고 나면 반만주 봉기가 터져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동족인 만주족의 운명은 임종의 순간에도 서태후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2권 564쪽)

목차

1권
이 책의 출전에 관하여
도판 목록

제1부 폭풍우 시대의 황실 궁녀(1835∼1861)
1. 황제의 후궁(1835∼1856)
2. 아편전쟁과 원명원의 전소(1839∼1860)
3. 함풍제의 사망(1860∼1861)
4. 중국에 변화를 가져온 신유정변(1861)

제2부 아들의 옥좌 뒤에서 통치하다(1861∼1875)
5. 근대화 대장정의 첫걸음(1861∼1869)
6. 서방에 최초의 시찰단을 파견하다(1861∼1871)
7. 비운으로 끝난 사랑(1869)
8. 서구에 대한 복수(1869∼1871)
9. 동치제의 생애와 죽음(1861∼1875)

제3부 입양한 아들을 내세워 통치하다(1875∼1889)
10. 세 살 난 아이가 황제로 선포되다(1875)
11.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다(1875∼1889)
12. 제국의 수호자(1875∼1889)

제4부 아들 광서제의 친정(1889∼1898)
13. 서태후에게서 멀어지는 광서제(1875∼1894)
14. 이화원(1886∼1894)
15. 은퇴 후의 한일한 시기(1889∼1894)
16. 일본과의 전쟁(1894)

2권
17. 중국을 망친 평화(1895)
18. 중국 쟁탈전(1895∼1898)

제5부 무대 전면으로(1898∼1901)
19. 1898년의 개혁(1898)
20. 서태후 살해 음모(1898. 9.)
21. 광서제를 폐위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1898∼1900)
22. 세계 열강과의 전쟁-의화단과 함께(1899∼1900)
23.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기(1900)
24. 도피(1900∼1901)
25. 회한(1900∼1901)

제6부 현대 중국의 진정한 혁명(1901∼1908)
26. 북경으로의 귀환(1901∼1902)
27. 서양인들과의 친교(1902∼1907)
28. 서태후의 개혁(1902∼1908)
29. 투표!(1905∼1908)
30. 반란, 암살, 일본에 대항하다(1902∼1908)
31. 최후의 나날(1908)

맺는말: 서태후 이후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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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도판 출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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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장융(張戎, Jung Chang)은 1952년 중국 쓰촨 성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홍위병이 되어 문화혁명기 동안 농촌에서 살았다. 공장에서 주물공과 전기공 일을 하다가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 쓰촨대학교 영어과 강사로 재직했다. 공산당 집권 이후 쓰촨 성의 첫 외국 유학생이 되어 1978년 영국으로 건너가 1982년에 요크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영국에 귀화하여 현재 런던에서 살고 있다. 저서로 《대륙의 딸Wild Swans: Three Daughters of China》(1992), 남편 존 핼리데이와 함께 쓴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Mao: The Unknown Story》(2005)이 있다. 두 권 모두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1500만 부 이상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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