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이진민은 맑게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설득력을 지니는지 느끼게 해준다. 우리의 낡은 통념들이 봄볕에 눈 녹듯 스르르 풀려 어떻게 자연스레 전복되는지, 사소함과 자상함과 섬세함에 깃든 힘을 문장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는 자신이 옹호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옹호하기 위해 오로지 살아가는 사람 같다. 은은하고 아름답다. 이 책은 아름다움에 관한 오랜 오해에서 빠져 나와 진짜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는 책이다. 이 전복적인 사유를 어떻게 이렇게나 보드랍게 전할 수 있을까. 철학과 미술과 문학이 한 이불을 덮고 다정해진 덕분일 것이다.”
_김소연 시인 추천의 말 중에서
복근의 비너스, 마녀 키르케, 반전의 성모마리아까지
캔버스 속 명사의 삶에서 뛰쳐나와
마침내 동사로 살아가게 된 존재들에 대하여
이 책의 1부에서는 여성의 삶에서 다시 바라봐야 할 ‘근육’ ‘마녀’ ‘거울’이라는 세 단어에 주목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속 비너스의 복근을 바라보며 남에게 ‘보이는 몸’이기보다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기 위해 ‘기능하는 몸’으로 가꾸자고 이야기한다. 워터하우스가 그린 〈마녀 키르케〉 3부작을 통해서는 오랜 역사 속에서 남성들 아래 순종하기를 거부하다 ‘마녀’로 취급당해왔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럼에도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것을 당부한다. 뭉크의 〈거울 앞의 나신〉을 보며 시간이 지나면 저물 수밖에 없는 젊고 아름다운 것에 권력을 부여하기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찰나, 즉 ‘카이로스적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 나를 찾는 일에 몰두해보라고 이야기한다.
“산다는 것은 동사다. 어딘가에 가만히 놓여 있는 명사가 아니라, 걷고 달리고 고꾸라져 넘어지고 숨을 고르고 다 시 일어서서 발을 내딛는. 그렇다면 이렇게나 무수한 동사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데 어째서 근육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딸들에게 울퉁불퉁한 근육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너희는 가만히 명사로 살아가라는 얘기다. 나는 세상의 딸들이 몸을 쓰고 움직이며, 휘두르고 걷어차며, 내뻗고 달려가며, 삶의 희열을 느끼기 바란다. 한껏 최선을 다해 다양한 동사로 살아보기 바란다.”(본문 43쪽)
2부에서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무해한 감정이지만 일상 속에서 잃어버렸던 내 안의 작은 것들(슬픔, 서투름, 사소함)을 들여다본다. 쉥크가 그린 어미 양의 〈비통함〉을 보며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에 함께 공명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슬픈 존재이며, 하지만 함께 기대면서 아픔을 나누다 보면 그렇게 또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고흐와 밀레의 〈첫걸음〉 속 아이의 첫 발자국을 바라보며 서투름이란 찬란한 보물의 가능성을 기다리는 시간이며, 상대의 힘을 신뢰하고 북돋아줄 것을 강조한다.
3부에서는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법에 관해 이야기하며 김환기, 마그리트, 에른스트 등의 그림을 통해 실존주의·현상학 등의 철학적 개념들을 소개한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 속 어느 뒷모습과, 복제된 듯한 거울 속 또 다른 뒷모습에서는 우리가 어디까지 보려고 하는 사람인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쉽게 판단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모 마리아가 경쾌하게 예수를 ‘패는’ 에른스트의 〈세 명의 목격자 앞에서 아기 예수를 체벌하는 성모 마리아〉라는 작품은 어쩌면 신을 모독하는 작품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기존의 권위와 규범 속에서 타성에 젖은 예술계에 매를 내리치고 전복하겠다는 의미다. 작가가 강조하는 ‘뒤집어 보기’의 사례이다.
“니체는 도덕적인 현상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현상에 대한 도덕적인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이런 유의 사고방식이 앞과 뒤의 관계를 보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기회를 놓친 것 같고 순서가 다 지나버린 것 같더라도, 무엇을 앞으로 놓고 무엇을 뒤로 할지는 세상이 정한다기보다 삶의 흐름 속에서 내가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본문 289~290쪽)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무해한 감정에서부터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는 것
작가는 비가 오면 마케의 〈숲길 위의 커플〉을 떠올리며 산책을 떠난다. 숲속 나무들이 꼴깍꼴깍 물을 마시고 환호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림 속 붉은 숲길처럼 매대의 이국적인 향신료들이 뿜어대는 강렬한 색감과 냄새를 탐색한다. 야코비데스의 〈아이들의 콘서트〉를 볼 때면 사랑하는 이들의 따뜻한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어본다. 찻잔 위 소리 없이 흩어지는 수증기를 가만히 지켜볼 때면 박물관 한쪽 ‘사유의 방’의 너른 여백 속 〈반가사유상〉의 고요함을 함께 떠올린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그려진 아직 보지 못한 올리브 숲은 정말로 금빛으로 빛나는지, 그 숲의 냄새는 어떨지 상상해본다.
작가는 이렇게 그림 속 요소들을 하나씩 꼼꼼히 살펴보는 것처럼 자신의 몸에 있는 모든 감각을 온전히 느껴보자고 말을 건넨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숨은 신비를 하나씩 찾아내어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톺아보는 기쁨을 누린다. 자신의 몸에서 몰랐던 근육을 찾아내듯 하나씩 새로운 것을 만나는 일과, 익숙함 속에서도 낯선 감각을 깨우는 은은한 도전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충만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듯이, 뒤는 새로운 앞이 된다. 우리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지 단계별로 단절된 시간들이 아니듯, 우리는 봄에서 여름을 보고, 여름에서 또 가을을 본다. 모든 계절은 무 자르듯 토막토막 잘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드랍게 포개 안고 있다. 봄꽃 향기 속에서 문득 여름의 태양 냄새가 느껴지고, 여름날 장대비 속에서 볼을 빨갛게 하고 있는 나뭇잎 하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본문 2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