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망가지고 짓이겨진 기쁜 우리가 있다”
완전히 새로운 포스트아포칼립스 시인의 등장
종말 너머로 도약하는 자유롭고 담대한 시작의 몸짓
202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오산하 시인의 첫 시집 『첨벙 다음은 파도』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아포칼립스를 내다보는 드넓은 시야로 재난의 세계와 ‘우리’를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심사평)으로 그려내 주목받은 시인은 등단 3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에서 삶과 죽음, 생존과 종말의 이미지를 독창적인 상상력과 매혹적인 언어로 직조해냈다. 시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한 혼돈의 세계”를 냉철하게 응시하면서 “파국과 종말에 대한 상상 저편에 자리한 현재의 불안”(김영임, 해설)을 되비추는 기기묘묘한 시세계를 열어 보인다. 재난과 파멸의 장면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만, 어두운 절망에 빠지지 않는 활달한 발걸음이 읽는 재미를 이끄는 동시에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진실한 태도가 깊은 울림을 남긴다. “삶을 지배하는 죽음을 자각하는 동시에 죽음에서 이어진 삶을 찾아낼 수 있는 각별한 눈”(안도현, 추천사)으로 재난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불안의 징후를 그려내는 자유분방한 리듬이 전에 없던 신선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건 하나의 생의 여러갈래”
가라앉더라도 다시 뛰어드는, 연대의 역설적 희망
시집은 엄습하는 재난의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풍경으로 거침없이 돌입한다.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시드볼트」)라는 질문은 파국 이후의 세계까지 바라보는 시인의 예민한 감각과 날카로운 예지력을 보여준다. 이때 시인이 그려내는 파국의 장면은 단순한 허구적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와 맞닿아 있으며, 요동치는 사회와 개인의 불안한 내면을 동시에 비춘다. 그러나 암울한 세계는 절망에 갇혀 있지 않다. “악몽 또한 꿈이어서 좋다”(「이후의 세계에서」)라거나 “굴러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시드볼트」)와 같은 담대한 발언을 통해 절망은 오히려 웃음과 유머로 전환된다. 이는 “유토피아적 기다림이나 구원의 약속”(해설)에 기대지 않고, ‘지금-여기’의 불안과 혼돈을 끝내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가려는 다짐이자 용기이다.
죽음 이후의 장면들은 독특하게 변주된다. “바다에 빠진 잠수부를 구하기 위해/잠수부가 바다에 뛰어들었다”(「wave」)라는 아이러니한 장면은 자기 자신조차 구할 수 없는 세계의 모순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은 그 속에서 언어와 의지의 지속을 발견하며, 종말을 목전에 두고도 삶에 대한 애착과 연민을 놓지 않는다. “첨벙 다음은 파도/더 거세졌을까”(「wave」)라는 질문은 절멸의 순간에도 언어로 세계를 붙잡으려는 시적 몸부림을 보여준다. 세상의 무너짐을 그리면서도 끝내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시인의 태도는 종말을 두려움의 상징이 아니라 견뎌야 할 현실로 받아들이는 담담한 인식과 맞닿아 있다.
한편 시집 속 세계는 일상과 비일상이 끊임없이 겹쳐지는 낯선 장면과 이미지로 가득하다. “떨이로 나온 오이를 사서/씻고 깎아 소금에 재워두는” 일상의 공간은 “홰 위에서 아이가 울고/오이 냄새가 밴 손을 내밀어도/여전히 홰 위에 서 있는”(「홰와 나무」) 기묘한 풍경으로 변하고, “길게 늘어진 불행”의 “잿더미 위에서 밥을 먹는”(「거기에서 만나」) 그로테스크한 공간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인은 일상을 위태롭고 불안정한 상상의 공간으로 뒤틀며 긴장과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귀신, 야광 인간, 신화 속의 새 호문조 같은 비인간적 존재들을 호출하면서 현실이 얼마나 쉽게 뒤집힐 수 있는지 보여주기도 하는데, 일상의 익숙한 풍경이 비현실적 장면으로 바뀌는 묘하고 낯선 순간 우리는 시대와 내면에 깔린 불안의 본질에 한층 가까워진다.
“이 말은 정해진 미래가 된다”
재난의 시대를 체화한 ‘지금-여기’의 사유
오산하의 시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면서도,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없음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벌거벗지 않은 사랑 찾기」)는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을 보여주며, “맞잡고 걷자/사라지지 않을 불빛을 찾아 걷자” “서로를 바깥으로 꺼내면서 걷자”(「수목」)라는 구절에는 따뜻한 연대의 마음이 배어 있다. 나아가 “여기 망가지고 짓이겨진 기쁜 우리가 있다”(「빈 병 줍기」)라는 선언은 끝내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단호한 의지를 전한다.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서 절망을 웃음으로 바꾸고, 언어로 버티며, 연대를 모색하는 오산하의 시는 ‘지금-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가히 신선한 충격과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인류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지 묻는 엄중한 시대적 물음 앞에서 서성이는 모든 이에게, 자기만의 목소리를 확고히 보여준 오산하 시인의 첫 시집을 자신있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