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나들며
다양한 기록 도구를 써보고
그 가운데 탐구한 ‘기록과 기억의 본질’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 윤덕원은 가사와 글을 쓰며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을 시도한다. 손글씨로 남기는 종이 메모장부터 2000년대 초반에 획기적이었던 핸드헬드 PC 모디아, 클라우드로 연동되는 노트북과 스마트폰까지. 아날로그와 디지털 도구를 하나둘 써보는데, 이는 ‘장비를 바꾸면 더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열심’의 연장선이자 의문을 실천으로 해소해가는 모습이다. 과연, 더 고가의 장비로 기록하면 그 내용의 퀄리티도 전보다 높아질까? 이러한 고민은 문장뿐만 아니라 선율을 기록하면서도 이어진다. 카세트테이프로 곡 작업을 할 때와 온갖 기능이 갖춰진 디지털 장비로 작업할 때. 대체로 후자가 빠르고 간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좋은 결과물(노래)이 나오는지에 대해 저자는 고개를 갸웃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크게 두 방식의 ‘쓰기’를 경험하면서 저자는 기록의 본질을 탐구한다. 장비는 보조일 뿐, 결국 무엇을 기록할지 또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을지에 대한 판단력이나 감각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드는 데 더 주된 요소임을 깨닫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보고 듣기에 매끄러운 것이 꼭 우수한 결과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카세트테이프로 소리를 녹음했을 때, 음질은 열화되지만 무언가 듣기 좋은 요소를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미묘한 기록의 특성을 살피며 저자는 물성과 아날로그의 의미를 되새긴다.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물건은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기억과 기록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저자는 순간의 기록들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다 보면 ‘그래도 꽤 괜찮잖아?’ 싶은 작품이 하나둘 남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음원으로 즐기던 ‘브로콜리너마저’의 창작 과정, 그 가운데 작업자로서 하는 고민과 시도 등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 책에 많이 실려 있다.
창작 일이 막막하고 어려울수록
더 열심히 찾아낸, 과정의 재미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많이 벌이고 싶다.”
저자는 창작의 고뇌나 소진된 상태도 겪지만, 이러한 어려움에 대처하며 재미난 시도들을 해본다. “새로운 악기가 있다면 새롭게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며 새 기타를 구매하러 간 악기점에서의 일화를 소개한다. 특정한 시점에 특정 악기, 특정한 방식으로 연주했을 때만이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있다는 대목에서는 곡 작업의 디테일이 드러난다. 고요한 새벽에 홀로 작업하면서 막막하고 외롭지만, 설정한 박자대로 소리가 흘러나오는 리듬머신을 틀어놓고 미니 건반으로 이런저런 코드를 쳐보며 악상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과 함께하며 답답함을 떨치기도 한다. 저자는 내향적인 성향이라 낯을 많이 가리지만 적극적으로 동료들과 약속을 잡고 만나본다. 그리고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거나 “그래도 잘해보자.”라고 서로를 격려하는 순간의 소중함을 여실히 느낀다. 노래라는 결과물 뒤 한 명의 창작자가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애쓰고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하는 과정이 때론 유쾌하고 때론 뭉클해 책에 다양한 감정의 맛을 더한다.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많이 벌이고 싶다.”는 저자의 다짐에 읽는 사람의 마음도 한껏 즐거워진다.
저자 윤덕원은 다양한 시도 가운데 바라는 바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 ‘대박’을 치기보단 누군가의 마음에 고여 두고두고 남을 노래이길, 거듭해도 쉬워지지 않지만 그래도 작업 과정이 즐겁길 바란다. 어느덧 밴드 활동을 시작한 지 약 20년을 앞두고 하게 되는, 끝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언젠가 무대를 떠나더라도 결국 세상에 어떤 노래를 남기고 싶은지, 어떤 뮤지션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그러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끝없이 생각한다. 무력함과는 정반대인, 애쓰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지향하는 에너지가 책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꼭 음악 일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일과 삶을 되돌아보며 의미를 고민하고 지향점을 찾게 하는 힘을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에서 얻어갈 수 있다.
〈앵콜요청금지〉 〈유자차〉를 만든
남다른 관찰력과 표현력,
생활 밀착형 비하인드 스토리 대 공개!
〈유자차〉 〈공업탑〉 〈축의금〉 등에서 살펴볼 수 있듯, 소소한 사물을 개성 있게 표현하는 저자의 관찰력은 책에서도 나타난다. 저자는 그간 발표한 노래에서 많은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표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결과물인 가사 뒤에 어떤 생각의 과정이 있었는지 책에서 밝힌다.
가사를 쓸 때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일단 쓴 가사를 검증하기 위해 쓰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표현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잊어야 할 일은 잊어요.
→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잊지 말자.
우리가 함께했던 날들의 열에 하나만 기억해줄래.
→ 우리가 함께했던 날의 십중팔구는 잊어버려도 된다.
때로는 단순히 순서를 반대로 놓아보기도 하고, 가끔은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보기도 하고, 조금 더 논리적으로 수학 시간 때 배웠던 ‘대우’를 이용해보기도 한다.
_75~76쪽, 〈우리는 끝없는 과정에 놓여 있어〉 중에서
가사, 노래 제목 등의 탄생 과정이 ‘생활 밀착형’이어서 만들어지는 단계 하나하나가 흥미로운 에피소드다. 좋아하는 만화 〈속좁은 여학생〉의 제목을 빌려와 노래를 완성한 과정을 비롯해, 힘든 시절에 집을 깨끗이 정돈하고 물을 마시고 잠 잘 자고 밥 잘 먹으며 회복하며 〈바른생활〉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영종도로 동료들과 엠티 가는 길에 버스에서 유료 전화 사주 광고를 보고 즉석에서 가사를 짓기도 했다. 더불어 글 쓰는 태도를 수제비를 뚝뚝 떼는 모습에 빗대고, 방송통신대학교 과제, 고택, 커피 등 아주 일상적인 소재에서 음악 일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잡는 것도 인상적이다. 단적으로 책 제목에 실린 ‘대충’이라는 단어와 관련해 저자가 초등학생 시절 겪은 일화와 그만의 해석도 강렬하다.
신나고 재밌었던 일부터 황망함과 애도의 마음을 느꼈던 일까지, 폭넓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한 이야기도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시의성과 무관하게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사회적 참사를 언급하기도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개인과 사회가 어떠했으면 좋겠는지도 그려낸다.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쓰기에 대한 책을 즐겨 읽는 사람, 개성 있는 관찰력과 표현력을 맛보고 싶은 사람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을 읽으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그러면서도 대충 무언가를 남겨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