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잘 지내고 있겠지? 나는 너와 절교하기를 원해.”
고립이란 정말 멋진 것이다. 그것은 거의 쾌락의 차원이다. 그것을 찬미한다.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진정 고립을 모르거나 혹은 나약하게 겁을 먹은 것이다. (…) 글을 쓸 때 내가 선호하는 몇 가지 사소한 방법이 있는데, 동일시하거나 비판하거나 개입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가능한 한 이런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고립이란 그것과 비슷하다. 고립이란 반드시 혼자 지낸다거나 배타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고립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은 그런 식으로 고립된 정신의 한 종류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절교의 편지를 쓰고 있다. 혹은 개의치 않는다. 스스로 사물이나 장소가 되기를 원한다. 고립이 이 글의 아이덴티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이 작품은, 일자리가 필요한-동물원 킨트라고 주장하는-한 사람의, 말하자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작성된 지원서의 형태를 하고 있다. 즉 동물원의 모니터링 서류 양식”이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작중 화자는 동물원의 직원이 되고 싶어한다. 도시만의 풍경인 동물원에 매혹된 ‘나’는 특히 한겨울과 비 내리는 날의 동물원 풍경을 사랑한다. 소설은 화자가 동물원을 어슬렁거리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얘기로 전개된다.
‘작가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동물원’은 ‘고립’의 다른 이름이다. ‘동물원 킨트’는 고립을 찾아 떠났으며, 고립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했으며, 마침내 충만한 고립을 얻었다. 완전하게 홀로 된 뒤에야 ‘나’는 갑자기 사라져버린 ‘하마’를 만날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나’는 하마에게 ‘동물원 놀이’를 알려 준다. 그것은 작가가 낯선 나라에서 잠시 잠깐 즐겼던 ‘이방인 놀이’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당신 역시 언제라도, 충분히 동물원 킨트가 될 수 있다.
동물원 킨트는 단지 계속해서 길을 걸어. (…) 동물원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다가, 그들은 갑자기 알게 돼. 그는 동물원 킨트였던 거야. (…) 동물원에 가기 위해 다른 것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리고 이미 그렇게 했다면, 그리고 어떤 여행지에서라도 가장 먼저 그 도시의 동물원을 찾아간다면, 또한 동물원을 혼자 찾아갈 때가 가장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이미 동물원 킨트야._15p
작가에게 동물원은 사막에 있는 동물원도 아니고 그가 작품을 쓰면서 머물렀던 독일 어느 도시의 동물원도 아니며,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생애 최초의 동물원이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동물원도 아니다. 그것은 동물원이며 동시에 동물원이 아니고, 모든 구체적인 것들에 반하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혹은 정서적 경험에 의해 부여된 토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