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의 힘』 팀 마샬 추천, “상징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
* “깃발은 역사의 미니어처” 200개의 국기 이미지로 세계 역사와 현재를 한눈에 읽는 법
* 《씨네 21》 이다혜 기자,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쏨작가 추천
* 깃발의 세계에 빠져든 덕후가 알고 보니 우크라이나 장관?
깃발은 역사의 산증인,
역사가 바뀌면 깃발부터 달라진다
태평양의 아름답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비키니 환초를 아시는지? 1954년 미국은 이곳에서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을 자행했다. 이때 일어난 폭발로 섬들이 그대로 증발했고 인근 원주민은 방사능에 피폭되면서 미국은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바로 이곳, 비키니 환초의 깃발은 미국 국기와 닮아 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오른쪽 상단에 그려진 검은 별 3개는 폭탄이 터지며 날아간 섬들을 은유한다. 더욱 눈에 띄는 점은 하단에 마셜어로 “모든 것은 신의 손에 달렸다”라고 적힌 문구다. 이것은 미국이 폭탄 실험을 위해 원주민 167명이 이주하도록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자, 비키니 환초의 지도자가 내놓았던 대답이라고 한다. 수십 년 전 원주민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와 미국이 저지른 과오가 깃발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다.
비키니 환초의 국기를 둘러싼 이 인상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국기에 담긴 기상천외한 역사는 무궁무진하다. 캐나다는 국기에서 대영 제국의 흔적을 지우고 완전한 주권국으로 거듭나고자 단풍잎 국기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여야 간 극심한 대립을 겪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오랜 내전으로 20세기 들어 열아홉 번이나 국기를 바꿔야 할 만큼 격변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적도기니에서는 광기에 휩싸인 독재자가 나라를 쥐락펴락하며 기이한 국기를 만들어내는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깃발은 한 나라의 정치, 지리, 역사를 보여주는 미니어처다. 국기의 변화는 그 나라가 평화로웠는지 혹은 굴곡 많았는지 말해준다. 격동 속에서도 살아남은 깃발 한 장은 수백 년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한다.
바람 잘 날 없이 펄럭인 깃발
그 아래 모여 역사를 뒤바꾼 인간들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 갑작스런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로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국기 대신 직접 만든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이유는 다양했다. 특정 정치 세력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우리 같은 사람도 여기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함께하는 이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아니면 그저 재미있게 즐기고 싶어서. 시위가 확산되면서 그 의미는 더욱 깊어졌다. 각기 다른 깃발이 하나둘 모여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고, 이는 시대를 역행하는 정부를 향한 민주적 분노이자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이색적이고 웃음을 자아내는 깃발을 촬영해 공유하는 문화가 생겨났고, 날이 갈수록 정교하고 일사불란해지는 기수들의 움직임이 탄식과 함께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깃발이 지닌 힘을 증명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아주 많다. 13년간 이어진 시리아 내전이 반군의 승리로 끝났을 때,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국기를 교체하는 것이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러시아 국민은 국기의 붉은색 줄무늬를 흰색으로 바꾼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는데, 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은 나치 깃발을 연상시키는 Z 표식을 사용하여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불의와 핍박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마다 깃발 아래 모여 저항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시대를 선언해왔다. 바람 잘 날 없는 격동의 시기에 때맞춰 출간된 『펄럭이는 세계사』는 전 세계 국기에 수놓인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돋보기 같은 책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정부의 내각 장관을 역임했으며 30년 넘게 국기와 깃발을 연구해온 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가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들을 세심히 골라 인류의 뜨거웠던 지난날을 펼쳐 보인다. 혁명과 함께 탄생한 삼색기부터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유니언잭,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태극기를 비롯해 백합이나 독수리처럼 익숙한 상징에 깃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를 해석하는 힘을 얻게 된다. 길거리 어디서든 마주치는 깃발의 화려한 색과 무늬 속에서 역사적 순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세계사를 읽는 가장 쉬운 방법,
패턴을 알면 역사의 흐름이 보인다
정보가 시각적일수록 우리는 더 쉽게 인지하고, 더 오래 기억한다. 『펄럭이는 세계사』는 역사서라면 으레 그렇듯 기념비적인 사건을 연대순으로 설명하지 않고, 각 장을 대표하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전 세계 국기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체계를 찾아 그 패턴의 기원과 전파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풀어내는 것이다. 프랑스 삼색기는 혁명가의 이성과 마음에 불을 지피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고, 영국 유니언잭은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지구 반대편에도 가닿았으며, 오각별은 거대한 공산주의 블록을 견고하게 쌓았다. 역사 속 수많은 장면을 완벽히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색과 무늬의 의미를 알아두면 처음 보는 국기에서도 그 나라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된다.
『펄럭이는 세계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국기는 물론이고 해학과 풍자를 섞어 만든 깃발까지 200개 이상의 이미지를 수록해 세계사의 흐름을 한눈에 펼쳐 보인다. “깃발에는 꿈과 의지, 역사와 미래가 깃들어 있다”고 이다혜 기자가 보탠 추천의 말처럼, 거리 곳곳에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깃발 하나에도 수천 년의 역사가 얽혀 있다. 그 속에 깃든 과거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변화를 구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며, 세계를 보는 방식을 뒤바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