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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곶 Cape Cod

대구곶 Cape Cod

  • 헨리데이빗소로우
  • |
  • 간디서원
  • |
  • 2020-11-27 출간
  • |
  • 290페이지
  • |
  • 152 X 225 mm
  • |
  • ISBN 978899753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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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월든』(Walden)의 작가 소로우의 대구곶(Cape Cod) 여행기!

대구곶(Cape Cod)의 ‘cape’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cap’에서 유래한 것으로 라틴어의 머리라는 뜻이다. ‘Cod’는 1602년 고스놀드Bartholomew Gosnold 선장이 거기서 포획한 ‘거대한 대구의 창고great store of codfis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한다. 지도를 들여다보면 매사추세츠주에서 뻗어나온 대구곶은 마치 대서양 쪽으로 팔뚝을 ㄴ자로 뻗은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마치 ㄴ자로 뻗어 대구곶 만을 보호하고 있는 형상이다. 팔뚝을 뻗어 보호받고 있는 만 쪽은 호수같이 잔잔한 반면 대서양 쪽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으르렁거리는 파도로 유명하다.
대구곶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영국 청교도들이 1622년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노셋 인디언들의 옥수수와 콩을 샀던 곳(이스트햄)이기도 하다. 트루로에서 반스테이블 사이 모래밭길 여행이나 곳곳에서 보이는 예배당과 풍차들 묘사, 주민들이 고래떼를 추격하는 장면, 지빠귀새 6마리를 죽여야만 결혼할 수 있는 이스트햄의 조례 등등 소로우의 섬세한 묘사는 그곳에 가보거나 생활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대구곶의 흥미로운 풍물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자연주의자 소로우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1.대구곶(Cape Cod) 첫 여행지는 코하셋이었다.
대구곶(Cape Cod)의 ‘cape’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cap’에서 유래한 것으로 라틴어의 머리라는 뜻이다. ‘Cod’는 1602년 고스놀드Bartholomew Gos?nold 선장이 거기서 포획한 ‘거대한 대구의 창고great store of codfis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대구곶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영국 청교도들이 1622년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노셋 인디언들의 옥수수와 콩을 샀던 곳(이스트햄)이기도 하다.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사추세츠주에서 뻗어나온 대구곶은 마치 대서양 쪽으로 팔뚝을 ㄴ자로 뻗은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마치 ㄴ자로 뻗어 대구곶만을 보호하고 있는 형상이다.
소로우는 대구곶을 여섯 번 여행했다. 1849년 10월과 1850년 6월에 그리고 1855년 7월에는 트루로를 여행했다. 그러니까 대서양 쪽의 이스트햄에서부터 프로빈스타운까지 걸어서 두 번, 만 쪽에서도 한 번, 이렇게 4~5마일을 제외하고는 오가며 곶을 여섯 번이나 여행한 셈이다.
1849년 가을 보스턴에서 시작된 소로우의 대구곶 여행의 주요 지명은 보스턴-플리머스-샌드위치-반스터블-야머스-(데니스)-(부르스터)-올린즈-이스트햄-웰플릿-트루로-프로빈스타운 등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로우의 첫 여행지는 코하셋이었다.
코하셋은 보스턴에서 멀지 않은 남쪽 해변가 마을인데 폭풍우로 45명이 사망한 난파선이 있는 곳이었다.

2. 자연주의자로 불린 소로우는 단순하고 금욕적인 삶을 선호하였다. 도시생활에는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명인들의 소유의식과 사고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런 그의 사고는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플리머스에서 시작된 위원회가 인디언들의 영토인 이스트햄을 샀을 때, ‘누가 빌링스게이트Billingsgate의 소유권을 주장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구 소유권은 그들이 구매했던 땅 중에서 곶의 북쪽 모든 지역에 해당된다고 이해되었다. ‘대답은 그곳을 소유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그렇다면, 그 땅은 우리 거야’라고 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토착 원주민들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 것이죠’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은 놀랄만한 단언이자 허가였다. 순례자들은 그들 자신을 그 누구도 아닌 자의 대표로 여기는 듯했다. 아마 이것이 아직 점령하지 않은 곳, 혹은 적어도 그만큼 많이 개발-그들의 후손들이 해 왔고, 여
전히 광범위하고 행하고 있는-되지 않은 곳을 조용히 ‘대표하는’ 최초의 예에 해당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가 양키들 이전에 모든 미국의 유일한 소유주였던 것처럼 보였다(46쪽, 인디언들과의 땅거래).

멕시코 전쟁을 반대하며 인두세 납부를 거부했던 그의 생각은 『시민 불복종』이란 저작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문명인의 토지소유 개념과 대비되는 위 인디언의 발언에 소로우는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이 말하듯 그곳 저 대지를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진실 아니겠는가?

3. 소로우는 자연을 깊이 있게 관찰한 자연주의자였다. 그에게 자연은 관찰 대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대화하는 그 무엇이었다. 때문에 그는 대자연과 교감하면서 생각하고 느낀 점을 적고 있으며, 또한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심도 있게 그리고 있다.

”대개 곶의 뒤쪽은 강한 역류 때문에 멱 감을 만한 곳이 없지만 지난번, 그러니까 3달 전 거기에 갔을 때는 바다가 등대 근처에 2마일 길이와 10로드 넓이의 모래톱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 위로는 물결이 지나가지 않아 좁고 후미진 만이 하나 생겨났고 그 톱과 해안 사이에 1/4마일가량 멱감기에 딱 좋을 만한 곳이 있었다. 이 작은 만은 때때로 모래톱이 북쪽으로 이동하면 완전히 닫히는데, 한번은 그곳에 사오백 마리의 민어와 대구가 갇혀 죽은 일도 있었다. 그러고 나서 물이 맑아지면서 마침내 모래가 빠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모래톱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곳에 2~3일후면 다시 6피트 깊이의 물이 들어찬다.
등대지기의 말에 의하면 바람이 해안으로 세차게 불어 닥치면 파도가 빠른 속도로 제방을 갉아 먹지만 바다 쪽으로 불 때 모래를 되가져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바람은 해변가 바다 표면에 모여, 모래니 뭐니 온갖 것들을 싣고 곧 바다로 되돌아오는 강한 역류와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바다 위를 걷기란 굉장히 힘들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역류가 모래를 싣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이 해안으로 불 때는 난파당한 선원들이 상륙하기가 특히 어려우나 바다 쪽으로 불 때는 그보다 쉽다. 수면 아래로 흐르는 역류는 자신이 만들어 낸 모래톱 위에서 상층의 수면과 만나 파도가 부서지는 제방의 일부를 형성한다. 흡사 수직 벽 위로 부서지듯이.
바다는 그리하여 입속에 조금 전 자신이 삼킨 모래톱을 물고서 육지와 장난을 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물고 장난치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집어삼키는 치명적 순간이 온다. 바다는 탐욕스러운 동풍을 보내 육지를 강탈하지만, 파도가 자신의 제물을 집어 들고 멀리 사라지기 전에 이번에는 육지가 자신의 정직한 서풍을 보내 약탈품을 조금 되찾아온다. 하지만 데이비스 중위의 말에 따르면 모래톱과 제방의 모양, 크기, 분포는 바람이나 파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로 조수 간만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153-154쪽, 모래톱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바람 방향에 따른 모래이동, 400-500마리 민어와 대구가 떼죽음 당함)“

”등대지기의 말에 의하면 길고 강한 바람 뒤에는 갈수록 그 크기가 커지면서 연속적으로 세 차례의 큰 파도가 몰아치는데, 그런 다음에는 한동안 파도가 더 세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척의 배를 타고 육지로 들어오고 싶을 때면 마지막의 가장 큰 파도가 칠 때를 틈타면 된다고 했다(156쪽, 파도가 치는 해안에 상륙시 노하우: 마지막 세 번째 큰 파도 다음에 상륙한다)“.

”프로빈스타운에 관한 몇 장의 그림들 속에는 주민들의 몸이 발목 아래쪽으로는 그려져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빈스타운의 원주민들은 슬리퍼를 신고서도 문제없이 길 한중간을 걸어 다닐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래 속에 파묻지 않고 발을 내디뎠다가 살짝 들어 올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만약 그가 혹시라도 밤새 신발 속에 모래 몇 알이 들어간 것을 알면 놀랄 것이며, 젊은 숙녀들이라면 매번 걸음을 디딜 때마다 신발 속으로 들어오는 모래를 교묘하게 비울 줄 아는데, 이 모든 방법을 이방인들이 배우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218쪽, 모래 속에 파묻지 않고 걷는 법, 신발 속의 모래를 교묘하게 비울 줄 아는 법 등은 이방인은 흉내낼 수 없다)“.

4. 소로우는 이곳 토착적인 풍물들을 여과없이 그리고 있다. 예를 들면 무료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고등어세를 부과했던 일, 1655년에는 성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육체적 처벌을 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던 사건 또는 예배당에 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일요일 날 차꼬를 채워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찬반 투표가 있었던 사건, 지빠귀새 6마리를 죽여야만 결혼할 수 있다는 이스트햄의 조례 등은 모두 당시 사회 분위기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다.

“1662년, 마을 사람들은 해안가로 떠밀려 온 고래의 일부가 성직자를 부양하는 데 씌어져야 마땅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처럼 성직자들의 생계유지를 신의 섭리에 맡기는 것은 확실히 타당한 듯했다. 성직자들이야말로 유일하게 폭풍을 다스릴 줄 아는 신의 하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그들은 쌓이는 고래가 거의 없게 되자 그들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목사님들은 틀림없이 폭풍이 불 때마다 절벽 위에 앉아 걱정스럽게 해안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만약 내가 목사였다면 나는 내가 아는 수많은 시골 교구민들의 관대함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대구곶 뒤쪽에서, 나를 위해 고래 한 마리를 던져 주는 커다란 파도의 내장을 믿을 것이다. 당신은 시골 목사의 봉급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고래 한 마리쯤 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진 고래에 의존했던 목사는 분명히 그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나 같으면 차라리 포크랜드섬에 작살을 가지고 가서 그것을 해치웠을 것이다. 폭풍에 죽도록 얻어맞은 뒤 장애물들을 지나 그를 부양하기 위해 끌려온, 숨이 붙어 있는 고래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얼마나 그에게 위안이 되었겠는가!(48-49쪽, 떠밀려 온 고래는 시골목사 봉급).

“순례자들pilgrims(이 책에서는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플리머스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들을 의미한다-옮긴이)이 1622년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노셋 인디언들의 “옥수수와 콩을 63갤런들이 여덟 혹은 열 통 샀던” 곳도 이곳이었다. 1667년 이스트햄 마을은 모든 주부들이 옥수수에 피해를 입히는 검은 지빠귀새 12마리나 까마귀 3마리를 죽여야 한다는 데 대해 찬반투표를 실시했고, 이 투표는 수년간 반복되었다. 1695년에는 이름하여 “마을에 사는 모든 미혼 남성은 결혼하지 않는 동안 검은 지빠귀새를 6마리 죽이든지 아니면 3마리의 까마귀를 죽이든가 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시행하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처벌로서 이 조례를 지킬 때까지 결혼할 수 없다”라는 내용의 추가조례가 통과되었다. 하지만 검은 지빠귀새들은 여전히 옥수수를 못살게 굴었다. 그 다음해 여름 이스트햄에 가 보았을 때 검은 지빠귀새를 겁줄 수 있을지scare-blackbirds는 모르나 까마귀를 겁주기 위한 허수아비는 들판에 엄청나게 많았는데, 하마터면 사람으로 여길 뻔한 일이 종종 있었다. 거기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많은 남자들이 결혼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검은 지빠귀새들이 많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언덕에는 옥수수 씨앗을 서너 알밖에 심어두지 않아서 남아 있는 식물들이 거의 없었다. 1802년에 출간된 『역사 전집』에서는 이스트햄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민들이 소비하는 것 이상의 옥수수가 생산되어 매년 약 1000부셸이 시장으로 보내진다. 토양에 돌이 없어서 매우 빨리 경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옥수수가 나온 후에는 염소보다 약간 큰 작은 말이 두 소년의 도움을 받아 하루에 3~4에이커는 쉽게 캐낸다. 몇몇 농사꾼들은 매년 500부셸의 옥수수를 생산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데 최근에는 60에이커에 800부셸을 생산했다(41-42쪽, 지빠귀새 6마리를 잡거나 3마리의 까마귀를 죽여야만 결혼할 수 있는 이스트햄의 조례)“

고래떼를 추격하는 장면
거기 서 있자니 “한 떼가 또 나타났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돌고래의 검은 색 등과 북쪽 1마일 거리에서 고래들이 물을 뿜어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돌고래 떼는 말처럼 바다 위를 뛰어다녔다. 몇몇 배들은 이미 해변을 향해 돌고래 떼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바다 쪽으로 달리던 다른 어부들과 소년들은 배에 뛰어올라 내가 서 있던 곳에서 배들을 밀기 시작했다. 만약 마음만 먹었더라면 나도 따라갔을 것이다. 곧 스물다섯 척에서 서른 척의 배가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몇몇 큰 배들은 돛을 단 채로, 다른 배들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아직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했다. 고래 떼에 가장 가까이 있는 배들은 뱃전을 두들기고 나팔을 불어 고래 떼들을 해변으로 유인했다. 흥미로운 경기였다. 만약 고래 떼들을 해변으로 모는 데 성공하면 각각의 배가 한 몫을 챙긴 다음, 각각의 사람에게 그 몫을 다시 나누어주게 된다. 하지만 만약 공격을 해서 고래 떼들을 해변에서 멀어지게 하면 선박 회사가 공격당한 고래를 차지하게 된다.
나는 재빨리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걸었고, 어부들은 동료들과 결합하기 위해 훨씬 더 빨리 노를 젓고 있었다. 내 옆에서 걷고 있던 어린 소년들은 자기 아버지의 배가 다른 배를 이긴 것에 대해 자축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났던 한 눈먼 어부는 “도대체 어디에 있수? 원 당최 보여야지 말이우. 잡았수?” 그 동안에 고래는 방향을 돌려 북쪽 프로빈스타운 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 다만 이따금씩 등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작살을 던져야 했고, 몇몇 배들이 서둘러 4~5로드를 저어 자신이 잡은 고래에게로 가서 그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고래는 마치 경주마처럼 바닷물에서 뛰어오르면서, 등으로는 피와 물을 내뿜은 채 거품 자국을 남기면서 곧장 해변으로 다가왔다. 모래사장에서 어부가 작살을 꽂는 것이 보이기는 했으나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어진 북쪽 해안 근처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고래잡이 그림과도 같았다. 한 어부 말에 의하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첫 작살질에서 그는 너무 흥분했었고 서두른 나머지 작살집을 빼지도 않고 찔렀다. 하지만 상당히 깊숙이 고래에 상처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며칠 전 180마리의 검은 돌고래가 한 떼를 지어 남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이스트햄 해안으로 유인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빌링스게이트 포인트 등대지기가 어느 날 아침 똑같은 시간에 밖으로 나가 밤새 해안에 몰려 온 고래의 등에 자신의 이름 첫 글자를 새겨서 그 소유권을 천 달러를 받고 프로빈스타운에 넘겨주었는데, 아마 프로빈스타운은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어부는 19년 전 380마리의 돌고래가 그레이트 할로우에 한 떼로 몰려왔다고 했다. 『자연사 도서관』을 보면 1809년에서 1910년 겨울 1120마리가 “아이슬란드의 흐랄피오에 도착해서 잡혔다”고 되어 있다. 드 키De Kay는 왜 고래들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어부는 돌고래 떼들이 오징어를 잡으러 육지 쪽으로 갔다가 7월 말경이면 다시 해안으로 돌아온다고 장담했다(143-145쪽, 고래떼 추격장면).

교회당과 풍차
육지 사람들에게 염전과 더불어 대구곶에서 가장 이질적이고도 그림 같은 구조물은 풍차이다. 그것들은 회색빛의 팔각형 탑으로서, 뒤편에는 기다란 목재들이 땅 쪽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고, 거기에 수레바퀴가 기대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풍차의 날개들이 바람이 오는 쪽으로 돌려져 있다. 이것들 또한 어느 정도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퀴 때문에 건물 주변에는 커다란 원형 모양의 홈이 파여져 있었다. 제분소를 바람으로 돌리기 위해 모인 마을 사람들은 풍향계 없이도 바람의 방향을 잘 알 것 같다. 풍차들은 한쪽 날개 또는 다리를 저는 상처 입은 새처럼 축 처지고 활기가 없어 보여서, 네덜란드 사진 중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솟아오른 땅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높은 풍차들은 지표로 이용된다. 왜냐하면 수평선 저 멀리 언제나 볼 수 있는 키 큰 나무나 다른 물체들이 없기 때문이다. 육지 자체의 윤곽이 너무도 확고하고 뚜렷한 까닭에 시시한 봉우리나 모래 절벽이 바다 건너 꽤 먼 거리에서도 잘 보였다. 육지로 향하고 있는 선원이라면 풍차나 예배당 덕분에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것이다. 시골에서는 예배당만을 보고서 갈 길을 찾아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운영하며, 교리나 여론의 바람, 혹은 더 드물게는 천국의 바람에 의해 돌아간다는 점에서 예배당은 일종의 풍차이다. 예배당이라는 제분소에서는 다른 종류의 곡식을 빻는데, 설사 모두가 다 밀기울이 아니고 오래되어 눅눅하다 하더라도, 혹은 ‘반죽’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생명의 빵을 만들기 위해 믿는다(38-39쪽, 교회당과 풍차: 시골마을에서는 풍차나 예배당을 지표로 해서 방향을 잡는다. 교리나 여론의 바람 혹은 천국의 바람에 의해 돌아간다는 점에서 예배당은 일종의 풍차, 예배당은 생명의 빵을 만들기 위한 제분소).

5. 대구곶은 모래를 움직이는 바다에 의해 현대풍의 해변들이 하루 만에 만들어졌다가 부서지는 매력적인 곳이다. 그러므로 이를 만끽하고 싶다면 폭풍이 불어닥치는 가을이나 겨울에 여행하길 소로우는 권한다. 그리고 숙소는 하이랜드 등대나 근처 오두막에서 몰아치는 푹풍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으뜸이라고.


목차


1장 난파선 7
2장 역마차에서 바라본 풍경들 23
3장 노셋의 평원들 35
4장 해변 59
5장 웰플릿의 굴잡이 81
6장 그 해변에 다시 103
7장 곶의 맞은편에서 129
8장 하이랜드 등대 149
9장 바다와 사막 175
10장 프로빈스타운 209
옮긴이 후기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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