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숙맥』에 처음 참여한 것이 2호인데, 그때 원고 마감이 멀지 않은 상황에서 원고 걱정을 하니까, 백초 형이 내가 한 퇴임 교수 답사와 그 이듬해의 입학식 축사-그 둘 모두 핀치 히터로 한 것이었는데-도 좋을 거라고 부추겨서, 거기에 기왕에 나온 다른 글 한 편을 더해 내 책임을 탕감했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숙맥』의 글들에 대한 잘못된 장르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의 수필이라는 장르는 상당히 자유로운 것이긴 하지만, 영어의 essay나 불어의 essai의 장르적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특히 essai는 몽테뉴의 『수상록』(제목 자체가 그냥 복수로 Essais이다)이나 카뮈의 『표리』 같은 예들이 있기는 해도, 일반적으로 오히려 ‘시론’이나 ‘평론’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듯하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부제는 「현상학적 존재론 시론(essai d'ontologie phenomenologique)」이다. 몽테뉴나 카뮈의 경우도 철학적 사유가 내재되어 있음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다. 나는 내 그 두 연설문을 essai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수필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것과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은, 모산 선생님의 「어린 왕자의 한국어 번역들」이다: 정녕 본격적인 훌륭한 번역 평론이다. 우리의 자유로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글에 수필도, essay도, essai도, 내 연설문 같은 것들도 모두 포괄하게 한다.
위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자유의 관점에서 우리 글들의 장르적 자유도 말하기 위해서이다. 시는 이미 제1호에 해사, 북촌 두 분 선생님이 그 사례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소설은 왜 안 되겠는가? 그리고 희곡도? 나는 장래에 단편소설과 단막극 희곡도 『숙맥』에서 읽게 될 기대에 차 있다.
- 곽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