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시학
이 호(문학평론가)
“나는 빛바래고 메마르고 쓸모없는 나무
7부 능선에 거북등 같은 樹皮를 두르고 서 있는 고목
어제 쓴 시를 다시 읽어보면 ‘이게 시가 맞나!’
라는 필력의 한계를 느낀다.
내가 걸어가는 시문학의 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속에서 영혼이 맑아지는 詩心을 닮고 싶다.
세상에는 못생긴 꽃도 있고 예쁜 꽃도 있다.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겠다.”
필자가 편의상 윤문한 「시인의 말」의 일부이지만, 실로 오랜만에 담백하면서도 진솔한 시인의 변을 만난다. 자신의 시와 시 쓰기에 대한 성찰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말-글’이기도 하다. 위 말에 힘입어 필자도 사족을 달아볼 기운을 낸다. 고민관의 이 시집을 펼쳐보면 가장 많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래서 금방 눈에 띄기도 하는 단어이자 심상, 소재이기도 하며 주제이기도 한 라이트 모티프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움이라는 어휘, 정서다.
푸르던 잎새는
벌써 누렇게 변해 하나둘씩
떨어지고 흘러간 시간 속에
잠자듯 소식 없는 네가 그리워진다.
…(중략)…
봄처럼 건 듯 지나버린
푸른 시절 어찌 꿈에서
만나게 되는가! 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만 가고 아픈 맘 치유하기 위해
시를 쓴다. 그리운 친구야
-「그리운 친구」 부분.
그렇다, 그리움이 이 시집의 핵심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움’이란 매우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이야기되는 모티프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토록 강하게 이처럼 자주 반복적으로 노래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시집을 토대하고 있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이 시집을 독해할 수 있는 많은 방법 가운데 한가지 등산로로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택해 보도록 하자.
‘아! 그립다!’ ‘오, 그리워’ ‘보고 싶다……’라는 탄성과 감정 상태에서 탐구 쪽으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Worstward Ho) 않는 우리의 사고 방식을 뒤로 하고 질문을 몇 개만 던져보자.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왜 생겨나는 것인가? 그리움과 관련된 요소들은 무엇인가 등등. 먼저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부재의 인식과 관련된다. 지금-여기(hic et nunc)에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다시금 재인식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그리움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움은 감정이자 정서의 일종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언가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그리움’이라는 감정 상태로 겪게 되는 경험의 한 종류인 것이다. 부재를 인식하는 순간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정동(affection)을 발현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분노나 미움으로, 어떤 이는 절망이나 저주로, 어떤 이는 소망이나 기도의 어조로, 어떤 상황에서는 비웃음이나 비판적 성토로 부재 인식의 다음 연쇄 감정을 발산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그리움의 형태로 경험하는 것은 모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당연한 프로세스가 아니다. 주로 문학인들을 비롯한 예술적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물론 그리움이라는 파토스의 깊이조차도 각 개인마다 매우 다를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하고 그리움을 자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관심을 기울여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두 번째는 무언가 있던 것이 사라졌다(없어졌다, 지금-여기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매우 단순해 보이는 이 정동에도 생각보다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요소들이 개입해 있음을 알게 된다.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인지, 그리고 그것의 있지 않음을 지각하고 둘의 차이를 공백이자 무로 인식해 내며, 그것에 반응하는 한 가지의 감정 형태 그것이 그리움이다. 몇몇 고지능의 포유류는 애착 대상의 부재까지는 인식하는 것 같은데, 그것을 그리움이라는 감정 형태로 승화시켜 내면서 언어화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만이 가진 매우 고차적인 감정 표현 방식일 것임에는 틀림없다. 없어진 것, 있던 것과 현재의 차이를 인식하는 사고 활동이자 감정 활동이 그리움이라는 얘기다.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인식해 내는 활동은 너무 쉽거나 자동적인 인간의 사고 프로세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없어진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 그리움을 느낀다든지, 있다가 없어졌다고(Fort-Da) 심리적인 통증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신적 문제를 유발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즉, 그리움은 고도로 전략화된 인간의 대(對)세계적인 대응 방식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넘어가자.
세 번째로 그리움(의 토로, 노래)는 부재를 지금 여기에 현존시키려는 형이상학적 스트러글의 일종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문학적 언어인 시 뿐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기념비적 건축, 각종 의례들도 포함될 것이다. 물론 우리의 관심은 고민관 시인의 언어들 주변을 멀리 떠나서 그리움을 탐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로 부재를 재현전화 시켜보려는 몸짓의 언어, 그것이 고민관 시의 한 특징이라고 언표(에농세)해도 될 것이다. 그것이 더욱 압축되고 은유(감춰진 비유) 상징화(symbolization)되고, 승화(submiliation)되어야 하는 것이 고집스러운 과제처럼 주어져 있다고 해도 말이다. 사라진 것을 지금 여기에 되불러와 현전화시킨다(「나의 고백」)는 의미에서 고민관의 시적 언어들은 시라는 장르 탄생의 원장면과 유전자적 친연성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종교적 제의 말이다. 종교적 제의의 언어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다는 쪽으로 가게 되면 기도와 소망의 언어(종교적 언어) 쪽으로 가게 되고, 그것을 인간 이성과 다자간 합의 쪽으로 발현시키면 정치-사회적 언어 쪽으로 가게 마련이다. 그 사이에서 있었던 것이 그립다라고 말하게 되면 예술의 언어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예술의 언어 쪽으로 접어 들어야 한다.
끝으로 그리움은 ‘시간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감정 양식이다. 생각해 보자. 물건을 분실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 양식을 생각해 보라. 애타게 찾으려고 노력한다. 아까워 한다. 분실한 물건들의 경제적 가치를 생각해 하며 손실을 아파하지만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가까운 사람을 상실했을 경우에도 일정한 시간이 흘러야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경험하지, 즉각적으로는 상실감으로 인한 고통이 지배적이지, 그리움이 곧바로 엄습하지는 않는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움이라는 것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상실에 대한 인간의 감정 경험의 일종이다. 그 시간대-시절에 대한 그려봄이 그리움이라는 사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계절적 순환을 순차적으로 배열하며 노래하는 3부 역시 그러한 인식의 소산이다. 「홍시」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좋아하시던 홍시 하나
챙겨드리지 못한 무심한 자식
해마다 이맘때 홍시만 보면
감빛 회상에 젖어 눈시울이 자꾸 붉어진다.
-「홍시」 부분
몇 가지 사고실험을 해보자. 우리들의 어머님이 쓰시던 물건이 우리에게 하나 남아 있다. 그걸 보면 우리는 그 물건을 통해 어머니가 그립고, 어머님이 그것을 사용하시던 그 모습이 그립고(보고 싶고), 그 시간들이 그리운 것이지 그 물건들이 그리운 것이 아니다. 즉 물건은 매개체이지 그 자체가 대상은 아니다. 다른 상황으로 근대생활사 박물관에 가서 잊고 있었던 물건들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 물건들을 통해서 그런 생활을 하던 그 시간들이 그리운 것이지, 그 물건 자체가 그리운 것은 아니다. 박물관에서 그 물건을 구입해서 집에다 가져다 놓는다. 그런 경우에도 그 유물이 좋아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그 물건이 상기시키는 그 시간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그 감정들을 목적하는 것이지, 그 물건 자체가 목표는 아닌 것이다.(그 물건이 오랜 시간 후에 발생시킬 경제적 가치를 계산하는 것은 전혀 다른 계산이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박물관의 유물들도 그 물건들로 한 시대를 복구시키고, 물건들을 통해 옛 사람들의 삶과 생활방식을 기억하고 보관하려는 것이지, 물건 그 자체를 보관하려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리움의 정서는 시간성 문제와 연결되고, 인간 존재가 초시간적인 존재가 아니라 시간 속에 유한하고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감정이라는 점을 우리는 재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일상생활에 별로 생산적이지도 않고, 손익 계산상 경제적이지 않기 때문에 깡통을 발로 차버리듯 처리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그리움은 우리들의 시간 경험, 시간 관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더불어 우리 시대와 사회에서 통용되는 시간 학습 때문에 발생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종교적 신심이 매우 투철한 사람들은 아마도 그리움을 극복할 세계관이나 시간관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의 부재와 무가 어떤 식으로든 재충전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경우는 그런 인식(차이 인식) 자체를 소멸시켜야 고통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제의적이지만 종교성을 피하고자 했을 때 이런 문제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언어는 철학자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일 것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심포지엄」에서 그리움을 에로스(Eros)라고 규정했다. 「심포지엄」에 따르면, 에로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생일 축하연을 계기로 풍요의 신 포로스(Poros)와 결핍의 신 페니아(Penia)가 만나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에로스는 어머니의 결핍을 닮아 진, 선, 미 모든 것에서 가난하고 결핍된 자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닮아, 이 모든 것에 대한 풍요를 언제나 그리워하면서 그것을 이루려는 중간자이다. 그래서 언제나 참으로 있었던 것에 대한 영원한 동경과 열병적 연모를 그 본성으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민관의 시를 과거와 현재의 결핍을 오가는 시적 화자의 그리워하는 정신 활동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다. 다음의 시를 살펴보자.
사랑의 냄새 물씬 풍기는 고구마
손으로 껍질 벗겨 입으로
넣으면 단맛이 스스륵 스며든다.
군것질 없던
그 시절 살며시 떠오른다.
달고도 실팍한 생고구마
깎아 먹고 점심은 의례 대신했다.
고구마 찔 때 김이 모락모락
콧속으로 스멀스멀
들어온 구수한 냄새가 그립다.
겨울의 맛이 가득 담긴
시원하고 새콤한 파래김치
함께 먹던 찐 고구마
입맛 사로잡는 별미였다.
추운 날 화롯불에
구워 낸 고구마 몹시 뜨거워
이손 저손 옮기며 호호 불어
껍질을 벗겨 주시던 어머님
따뜻한 어머님의 사랑 담긴
고구마 맛 잊을 수 없다.
고향의 추억이 새록새록 묻어난다.
-「고구마」 전문.
과거에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진 그 부재를 기억으로 재현전 시킬 때의 감각적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하는 정신 활동이 잘 드러난 장면이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마음(영혼) 안에 현전하게 하는 능력을 영혼의 ‘상기의 힘(vis memoriae)’이라 불렀다. 이 힘을 통해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파악되며 정신을 분산(distendo animae)시키고 그 결과 삶도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는 것,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신의 집중’ 작용을 통해서 시간은 분산하는 것이 아닌 집결된 것, 곧 하나의 통일체가 되며, 흘러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나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현전’과 ‘미래의 현전’으로서 현전하는 것이 된다. 이 때문에 이러한 ‘상기의 힘’은 단순히 지나간 것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장소(spatium memoriae)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 안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불러일으켜 생생하게 의식시키는 힘이다. ‘상기의 힘으로서의 기억’은 지나간 것을 결합시키고, 다가올 것을 고려하고 기대하게 함으로써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전하게 하는 힘이다.
산자락 밭 한쪽에 초가집
방 하나에서 일곱 식구가 모여
오순도순 살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때가 생각난다」 부분
이러한 인간 보편의 정서인 그리움에 예전 서구인들은 노스탤지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노스탤지어(nostalgia)란 단어는 ‘되돌아감’(nostos)와 ‘아픔’(algos)의 합성어다. 즉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이다. “만나지 못해도 향수를 가슴에 담고 있으면 사랑은 눈물이 되어 떠나지 못한다.”(「가슴에 담아둔 사랑」) 노스탤지어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데서 연유하는 슬픔의 정서이며 극복 불가능한 상실에서 생기는 고통의 감정에 다름 아니다. “늘 푸르던 젊은 날 우리가 함께한 그 시절 정겨운 시간을 가졌는지 너무나 아쉬운 세월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그 꽃 당신께 꽃등 하나 달아드리고 싶소.”(「늘 고마운 당신」) 그것은 향수를 유발시키는 이유-대상이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가 소유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향수의 대상은 ‘부재’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이 든 이제야 철든 마음 그냥 여기 두고 갈게 그리운 어머님!”(「그리운 어머니」) 말하자면 노스탤지어와 부재는 상호연관적이다. 이러한 감정의 대표적인 경우는 떠나온 고향(장소)에 대한 그리움(「마음의 두레박 물」, 「추억의 뒤안길」, 「고향 바다」, 「골목길이 그립다」, 「내 고향」, 「섬마을 고향 집」 등), 돌아갈 수 없는 과거(시간)에 대한 회상(「그때가 생각난다」, 「그때 그 시절」, 「단짝 친구」, 「가난 연작」, 「기억의 편린(片鱗)들」) 등인데 이것들은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차이 속에서 느끼는 심상을 토로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고민관 시인에게 이제 과거는 한갓 지나가 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시간들’이 현재의 삶에 가진 생생한 의미를 일깨워 주게 된다. 이러한 정서적 고백의 대표적 시편들은 「소싯적 친구」, 「그때가 생각난다」, 「그때 그 시절」, 「단짝 친구」, 「마음의 두레박 물」, 「정겨운 만남」 등 1부의 시편들과 「슬픈 기억들」, 「용서를 빕니다」, 「나이가 드니」, 「추억의 뒤안길」, 「코뚜레 모임」, 「홍시」, 「잔설」, 「고구마」 등이다. 이런 시들이 고민관 시의 서정적 핵심의 한 축을 이루고 있고, 그의 시에 서정성을 촉촉하게 부여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잘살아 보려 다짐하며
한양 천리 떠나간 친구
길고도 험난했던 그 시절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 텃밭
언덕에 넘어져 다리에 남은 상흔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다들 엄마 손잡고 가는데
둘이 서로 의지하며 입학했지,
우리의 우정 영원한 기억
연필 끝에 무릎이 찔러 푸르스름한 점
고스란히 남아 잊을 수 없는 우리의 봄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마음의 별이었지
어느 날 홀연히 내 곁을 떠나가
무거운 짐 생각나 그리움을 지울 수 없네,
길가 편백 나무 군락지에 둥지 틀고
정답게 지내던 새들 찬 바람 불자
온몸에 한기를 휘감고 저 멀리 날아가네.
시골 인심 가득한
말바우 시장 길 터벅터벅 걷는 소리
친구야 얼굴 한번 보자! 그대 음성 들려 오네.
-「단짝 친구」 전문
이처럼 시간 속에서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의 필연적 감정이 바로 그리움이다. 게다가 그리움은 대상의 충족으로 소거될 수 있는 정서가 아니다. 그리움이란 다시 되돌아갈 수 없거나 그 대상을 영원 안에서 소유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연유하는 슬픔의 정서이며 극복 불가능한 상실에서 생기는 고통의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그리움을 유발시키는 이유-대상이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가 소유하거나 다시 반복해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리움의 대상은 ‘부재’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그리움과 부재는 상호연관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민관의 그리움 시편들은 인간 존재의 본원적 그리움에 대한 성찰을 던져주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리움의 정서적 경험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한편, 그리움의 정서는 좋은 정념은 아니다. 그것은 슬픔의 정념이다. 그리움, 즉 과거에 대한 회상은 지금 여기 되불려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의식의 현전이므로 과거 그 자체는 아니다. 그리움은 언제나 실패로 귀결되는 운동일 뿐인데 그것은 대상에 가닿지 못하고 지금 여기서 그것을 그리워하는 주체의 정념만을 생산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움은 현재에서 과거 속으로 사라진 시간이나 대상을 되불러 보는 현재 의식의 운동이다. 그런 한에서 그리움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은 것, 부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의식 속에서 재현전시키려는 정동이다. 그리움을 아무리 따스한 추억으로 환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이곳에서 에너지로 충만한 생성을 낳지 못하고 과거를 부재로 인식하는 슬픈 정념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옛 시절의 가요를 부르거나 더러는 과거의 공간을 되찾아가 보아도 그 시간에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이유이며, 지나 버린 과거가 현재나 도래할 미래와는 절연된 잠깐의 감상적인 파토스만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일상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고민관의 작품들 속에는 슬픔의 정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을 긍정하고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자기몰입적 그리움의 심정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주는 작품들이 한켠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시편들로는 「그대가 있어 난 행복하다」, 「늘 고마운 당신」, 「널 만나면」, 「사랑의 꽃」, 「아름다운 꽃 민들레」, 「감사한 마음」, 「소싯적 친구」, 「단짝 친구」, 「따스한 온정」, 「정겨운 만남」, 「사랑하는 손주에게」, 「마음의 상처」, 「공감과 배려」, 「누군가에게 관심을」 등을 꼽을 수 있다.
“선의를 이용한 그들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 답답하고 속상해서 술 한잔 마신다”(「마음의 상처」)라거나 “친구야 얼굴 한번 보자! 그대 음성 들려 오네”(「단짝 친구」)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소싯적 친구여! 강물처럼 조용히 흘러가는 너의 모습 너무나 보고 싶다.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자”(「소싯적 친구」)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언급했던 그리움은 결국 나 이외의 것들, 부재와 결핍을 메워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또 다른 존재자들(타인들)에 대한 그리움(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리움이라는 질병, 그것은 주체의 숙명, 존재의 질병이지만 다른 말로 인간을 타자에 대한 지향의 영역으로 이끌어 주는 고귀하고 숭고한 동력이 되는 것이다. 되돌아 갈 수 없는 곳에 도달하려는 주체의 운동이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낳고 그것을 토로하고 추구하는 언어가 시라는 토로의 형식으로 구체화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고민관의 시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그리움, 존재의 본향을 그리는 운동이자 고민관의 시학적 핵심, 무한을 더듬는 그리움의 시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고민관 시의 어법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대 생각나 찾아가는 길 촉촉이 내리는 봄비는 아픈 비가 되어 그리움을 더한다.”(「그대의 모습」)
그 외에도 고민관 시집의 언어 가운데 ‘가난’(있어야 할 것의 없음의 문제)과 ‘고독’(함께 있을 수 없음)의 문제를 다루지 못했음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끝을 맺기로 하자. 이 그리움의 시들은 가난과 고독의 문제와 어울려 삼중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