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남겨달라”
기억이 머물 집으로서의 에세이
“정기용을 취재하면서 그의 말을 정리해 놓은 표지에 ‘DAYS’라고 적혀 있는 주황색 노트가 있었다. 이 노트에는 완성된 영화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정기용의 다른 ‘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영화의 메인 플롯에 포함되지 못했던 다른 플롯의 조각들이 외장하드에 남아 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어쩌면 영화에 넣지 못했던 그것들이 훨씬 중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기용은 왜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나는 왜 그 말들을 이리 빼곡히 필사해 두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단초가 되어 이 책을 엮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에 처음으로 도전하면서 느꼈던 마음의 갈등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썼다. 언젠가 이 기억들도 사라질 수 있으니 어서어서 책이라는 형태의 머물 집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 서문 (9쪽)
처음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논픽션의 세계에 진입할 결심을 한 정재은 감독. 제목 미정 다큐의 주인공은 정기용 건축가로 정해진다. 마침 생겨난 건축에 대한 관심과 전문가들의 조언를 통해서였다. "필름으로 영화를 배운 마지막 세대"였던 그는 아직 카메라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황색 노트 한 권 달랑 든 채 정기용 선생의 "말"을 기록하는 것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다.
“나는 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결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 나를 따라다니며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하면 결코 응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응한다. 그 차이가 뭘까. 정기용을 만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주인공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주인공이란 스스로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주인공으로 태어났고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여긴다. 언제나 주인공답게 먼저 생각하고 앞서서 행동한다. 그들에게는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자신만의 사명이 있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닥친 사건의 본질을 누구보다 깊게 알아챈다. 주인공은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한다. 주인공은 사랑받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사랑을 주변에 베푼다. 나는 어떤가. 어디 가면 숨을 구석부터 찾는다.” - 영화로 남겨달라 (12쪽)
영화감독의 눈에 정기용 건축가는 "타고난 주인공"이다. 정기용 선생은 흙건축의 대가이자 무주등나무운동장과 추모의 집 등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 MBC 〈책! 책!책! 책을 읽읍시다〉 "기적의 도서관(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 김해)" 프로젝트와 고 노무현 대통령 사저 "김해 주택" 등으로 한국 건축사에 중요한 궤적을 남긴 건축가다. 촬영 당시 그는 투병 중이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을 앞에 둔 정기용 선생은 평생 건축을 통해 인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했던 건축가로서 자신의 마지막 말을 세상에 남기고자 했다. ‘통제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이라는 강렬한 ‘서사’를 카메라에 담고, 인터뷰하고, 편집하며 정재은 감독은 예술가로서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영화"를 찾아나간다.
“영화 안에서 자신의 삶을 보여준 정기용.
그리고 정기용을 둘러싼 타인들의 말과 감정들은
한 인물의 초상을 만들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그린 초상화처럼.”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종종 만나게 되는 잘 연출된 장면 같은 현실을 접할 때마다 극영화 감독 출신인 나는 당황한다. 과연 현실은 무엇일까. 다큐멘터리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애초에 현실은 이미 많은 상징을 가진 채 멋대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 현실들을 취사선택한다고 해서 감독의 독자적인 영화가 가능할 수 있을까. 현실이 담고 있는 기호와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다큐멘터리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111쪽)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은 정기용 선생의 건축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선생의 마지막 시간과 "말"을 그리움으로 기록한 회고록이 될 것이다. 영화와 창작을 고민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영화와 예술 창작에 관한 사유가 담긴 흥미로운 교과서이자 "다큐멘터리 워크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책에 수록된 15편의 에세이는 〈말하는 건축가〉의 기획부터 개봉까지의 전 과정이 영화감독의 시선에서 펼쳐진다. 주제와 주인공 선정, 촬영과 플롯, 인터뷰와 대사, 편집, 아카이브 활용, 이야기라는 목적지를 향한 통찰과 함께 피칭, 개봉 후 관객과의 에피소드 등도 생생하게 옮겼다. 책 속에 기록된 정기용 선생을 비롯 다양한 인물들의 "말"은 정재은 감독이 노트, 녹취, 필사와 인용 등을 통해 당시 영화의 재료로서 채집하고 수집한 원재료의 형태로 담겨있다. 그 원재료들은 때때로 길고, 거칠고, 그래서 더욱 영화 속 대사처럼 생생하게 그 인물을 묘사한다.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영화이고 "문장"으로 쓰여진 것이 책이라면, 책 속 "말"은 "글자"라는 도구를 통해 종이 위에 영화를 옮기려 한 작가의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이 한 편의 영화라면 주연은 〈말하는 건축가〉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예술가 정기용 건축가와 정재은 영화감독이다. 두 예술가가 자신의 생을 바쳐 사랑한 건축과 영화라는 두 예술이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의 주인공이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독자는 건축에 인간과 생태를 담으려 헌신한 건축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게 된다. 그 시간을 단순한 기록으로 끝내지 않으려 끊임없이 자문하고 집요하게 답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스트의 분투를 목격하게 된다. 타인의 삶을 재료로 창작하는 일의 무게, 예술가로서의 윤리, 한편으론 감정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까지 지키고자 했던 예술적 가치에 관한 고민에 함께 몰입하게 된다.
한 편의 영화가 된 건축가, 책으로 영화를 기록한 영화감독. 그들이 들려주는 영화, 그리고 영화 너머의 영화 이야기가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