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 김홍정(소설가)
양진모의 노동 현장은 노동자들끼리의 우애로 넘쳐난다.
그들의 사랑은 동변상련의 아픔에서 비롯될 것이나 사뭇 그 뜨거움으로 서로를 감싼다. 열악한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해 추락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참반장이 허물어질 위험의 지붕으로오른다.
며칠째 멈추지 않는 장맛비
작업장 지붕 사이로 녹슨 철골을 타고
쇳가루와 섞인 빗물에 젖는다
(중략)
쇳가루, 용접가스, 페인트, 약품 냄새
노동자 몸에 배인 향수다
어지러운 작업장
빗방울의 장단에 뒤섞인 기계소리
반장은 우의를 챙겨 사다리를 올랐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오후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는 그 일
모두가 외면한 그 일
부러진 사다리, 정강이뼈, 등골, 미래
하반신마비, 더는 쓸모없는 낙인
개인부주의, 누구도 시키지 않았다는 거짓
책임은 모두 노동자 몫이라는 선고
최소한의 환경을 원했고
인간다운 삶을 바랬는데
그것은 사치였다
(「장맛비에쓸려간삶」부분)
멈추지 않는 비로 공장은 아수라장이다. 쇳가루 섞인 빗물이 공장 안으로 넘치고 노동자의몸은 쇳가루와 용접가스로 범벅이 된다. 진퇴양난 물러설 수 없는 작업장, 어린 노동자들이 고참의 눈치를 볼 때 반장은 무너질 지붕으로 사다릴 챙겨오른다. 누구도 시키지 않는 일이라 시인은 전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바꿔주지 않는 노동 현장이다. 시인은 그것을 사치라고 직설한다. 하지만 무너질 지붕으로 사다리를 챙겨오르는 것은 반장인 선배 노동자다.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 감싸고 앞서 나선다.
(전략)
페인트 가루 엉겨붙은 콧속
말라버린 논바닥처럼 타들어 가고
하루가 쇳덩이처럼 무겁다
선선한 바람결 아득하고
삼년 여름을 헤아려도
환기 시설과 도장실 열대야 이룰 수 없다
노을 즈음 공장 한 켠
공장장님 베푸는 삼겹살
몸에 잠긴 페인트를 벗겨내는 특효라며
고소하고 찬란하게 지글거린다
온몸에 내려앉은 상흔조차
동료의 웃음소리에 바람결에 식는다
하루의 때는 술잔으로 씻어내고
힘찬 외침으로 다시 되새기는 하루
고단한 영혼이 쉬어가는 숨결이다
(「작업장풍경」부분)
다시 물러서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작업장이다. 도장 작업은 멈출 수 없다. 멈추면 색상이고르게 나오지 않아 벗겨내고 새로 작업을 해야 하는 난점을 지니고 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노동자들이다. 온몸이 페인트 가루 투성이다.
공장장의 배려는 근거도 없는 삼겹살이다. 애당초 삼겹살이 광부들의 진폐를 씻어내는 음식이었다고 전하지만 페인트 가루를 벗겨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믿고 싶다.
그 열악함을 풀어내는 배려라도 있어야 살맛 나는 세상이 아닌가. 노동자들은 페인트 가루가 엉겨 붙은 모습을 보고 서로 놀리며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술잔을 건네며 내일을
다짐하고 힘차게 건배를 했을 것이다. 우리네가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 시인은 그렇게 서로 생각하며 사는 삶이어야‘고단한 영혼이 쉬어가는 숨결’일 것이라 단언한다.
양진모는 노동 의식을 비로소 깨친 모습으로 부활한다.
그는 노동조합을 향해 나아간다.
(전략)
용접 불꽃 튀는 작업장
쇠를 두드리는 리듬은 심장의 박동과 같아
감각화 된 몸짓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중략)
그들은 틈을 내 노조의 깃발 아래 모인다
청소 노동자들이 마련한 회의실
침묵했던 행진이 심장박동 소리가 되어
작업장 담을 넘는다
노동자의 분신으로 불씨를 던졌다던가
전설은 어둠을 밀어내는 횃불로 타오르고
흩어지는 재는 수천개의 불씨로 피어난다
(「작업장담장넘어」부분)
양진모의 노동시는 전태일 열사의 노동의식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양진모는‘분신으로 불씨를’던진 전설을 이끌어내 오늘 노동현장의 횃불로 삼는다. 그 횃불은 수천개의 불씨로 피어 날 것이라 예견한다.
늦깎이 대학생 양진모는 졸업을 한 해 앞둔 여름 느닷없는 대학 구조조정으로 인한 학과 폐지 난관에 봉착한다. 전문가로 우뚝 설 것이라 기대했던 꿈은 소용없는 허세로 달음질친다. 그렇다고 한두 발쯤 물러나 적당히 졸업하고 대학원으로 진출해야 하는 갈등에 빠진다. 양진모는 이미 노동으로 단련된 몸이다. 어려울 때 물러서지 않는 강건함을 배우며 살아온 현장주의자다. 그는 자신에게 보장된 학과 졸업보다는 학과 되살리기 투쟁에 선다. 이는 그가 노동현장에서 학습한 수천개의 불씨의 하나로 인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찬란한 교문을 지나
삼십년 주름진 손으로 책장을 넘긴다
노동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진주들을
학문의 저울에 올려놓는 야간 수업이다
거친 풍랑을 헤쳐온 녹슨 배는
항구에 닿아도 인정받지 못한다
굳은살 손으로 스물다섯개의 봄을 품었지만
이제 창백한 졸업장 한장으로
평생 꿈을 이룰 참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기계를 다뤄도
설계도를 그리지 못하면 맹인이 된다던가
학교의 철문은 지식의 관문이 아니라
계급의 벽이었음을 뼈저리게 안다
학교 구조조정 서릿발 소식이 교정을 흔들자
폐과라는 칼날이 가슴을 찌른다
혼란스런 아이들의 외침은
텅빈 강의실에 맴도는 허상일뿐
권위를 앞세운 총장의 왕좌는 단단하다
달콤한 거짓 약속조차 이미 사라졌다
황금의자와 고개 숙인 아첨만이 난무하는 회의실
권력의 횡포를 이성과 합리의 탈을 씌워 감추려하나
진실은 쇠처럼 단단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
닳은 손의 펜을 높이 들고
폐과의 서리를 녹이는 뜨거운 함성으로
저 거짓 지성의 전당을 뒤엎으리
(「야간대학」전문)
노동자 양진모에게 대학은 꿈으로 남아 있던 찬란한 곳이었다. 그러나 주경야독의 어려움을견디며 지낸 3년의 세월이 허망해졌다. 대학은 구조조정에 휘말렸고, 전공학과는 폐지대상이다. 이런 허망한 일이라니. 학과조치를 위해 달려간 대학 본부는 디자인학과 졸업장을 보장하겠다는 설득과 회유로 맞섰다. 권력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피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양진모는 깃발을 들고 앞장섰다. 이 싸움의 결과는 결국 대학의 결정이 우선할 것이다. 양진모는 안면있는 변호사를 찾아 소송을 제기하며 자신의 역할은 광고 제작과 현수막 거치, 학과 유지 무대 재현 등으로 맞서고 있지만 불편하다. 시대는 개인의 낭만과 소망을 이념과 정책으로 뭉개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 여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