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달아난 늦가을 밤입니다
어두운 마음에 순백 달항아리 하나
데려와 앉혔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영상으로 본 적이 있는
둥글고 커다란 그 항아리를
마음의 한가운데 앉혀놓고 싶습니다
마침 창 너머 보름달 둥그렇게 뜨고
귀뚜라미 합창이 한창이며
별들은 내려올 듯이 반짝입니다
그런데 왜 가슴엔 낙엽 지고
마음은 정처 잃은 채 어두워질까요
요즘 세상 탓이기만 할는지요
언제부턴가 순백 달항아리를
마음속에 끌어당기면서 동경했습니다
세상은 발을 허공에 뜨게 하지만
허공에 떠서 환하게 어둠 밝히는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 같은 항아리의
우아한 기품을 꿈꿔왔습니다
-‘달항아리’ 전문
시인은 ‘달항아리’에서 그리듯이, 순백 달항아리를 마음의 한가운데 앉혀놓고 싶어 한다. 내부가 텅 빈 달항아리를 마음의 한가운데 앉혀놓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비움을 통해 대자연의 무한을 채우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다. ‘소나무들은 하나같이/마음 낮추듯이 등을 구부리고 있’(‘솔숲길을 걸으며’)는 솔숲길에서는 그 모습을 보며 깨달음에 이르고, ‘겨울 입새에서’는 비우고 내려놓았을 때 나는 본래의 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그래도 지금 여기가 좋다는 생각이 든다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마음이 가난해야 복 받는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마음 따로, 몸 따로인 채였다가
뒤늦게 몸도 좇아가려고 하기 때문일까
창가에 앉아 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 기울인다
가는 길이 온 길과 달라져야 할 텐데
채우려고 하기보다 비우고 내려놓으면서
물이 흘러가듯이 구름이 가듯이
주어진 길, 거스르지 않고 갔으면 한다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서
-‘그래도 지금 여기가’ 전문
‘지금, 여기’에 대한 긍정과 순응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그래도 지금 여기가’는 채우려고 하기보다 비우고 내려놓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의 지향을, 마음과 몸이 하나 되는 지점에서의 순간적 체험을 형상화한 ‘어느 한나절’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꿈꾸는가 하면, ‘한밤의 눈’은 환정적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본질적 자아와의 만남을 암유적으로 떠올린다.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태수 시인은 ‘은파’, ‘먼 여로’, ‘유리벽 안팎’, ‘나를 찾아가다’, ‘거울이 나를 본다’ 등 스물세 권의 시집과 시선집 ‘잠깐 꾸는 꿈같이’, ‘먼 불빛’ 등을 냈으며 시론집 ‘예지와 관용’, ‘현실과 초월’ 등 여섯 권을 냈다. 한국시인협회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천상병시문학상, 동서문학상, 대구시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매일신문 논설주간,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