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우선 도착하는 것이 내 상태였다”
불발되는 존재들을 향한 무한한 발걸음
혼잡한 세계를 증명하는 가장 깨끗한 목소리
“바깥을 들이마시지 않아도 충분한 여백”(시인의 말)을 느끼며 세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나 자신을 바깥 없이 사유해보는 불가능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실물감을 획득하는 시인 강이현의 첫 시집 『다른 명찰을 보여주는 관계자』가 아침달 시집 52번째로 출간되었다. 강이현은 이번 시집을 통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신인으로, 시집은 총 60편의 시를 3부에 걸쳐 담아냈다. 정직하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담긴 문장에 매료된 아침달 큐레이터 정한아, 박소란 시인은 시인의 시 세계를 “활달한 상상력과 그 배면에 스민 쓸쓸한 감수성”이라 평하며 명징한 시적 정황들이 서로 일으키는 미세한 마찰과 균열이 삶과 자주 어긋나는 운명을 지닌 존재들의 불일치가 세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또 다른 시선이 될 수 있음을 예견했다.
‘다른 명찰을 보여주는 관계자’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에 맞게 강이현의 시 속 화자들은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면서도 몸 어딘가가 자꾸 뒤틀리는 경험을 한다. “꽃 문제를 겪고 있다”(「꽃 먹는 사람」)는 진술로 출발하는 시집의 첫 화자는 먹었던 꽃들을 입에서 다시 꺼내 그것들의 내용과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기이한 태도를 취한다. 꽃과 나의 긴장 상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간 대 자연 관계로는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침을 뱉는 꽃과 꽃을 계속 먹는 사람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인 상정을 일면 거스르는 측면을 보이면서도 삶에 익숙한 구분이 남기는 명확한 영역을 역설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시인은 시가 그려내는 풍경과 조화로운 관계를 잘 맺지 못해 자신의 존재 의미가 지속적으로 불발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틀린 장소”에 있다는 자각과 함께 휴일에서 돌아와 양복을 입고 사무실에 갔는데 아무도 없고 자신을 대신할 사람도 없이 텅 빈 상태로 있거나(「그는 휴일에서 돌아왔다」), 무슨 대회인지는 설명되지 않은 채 이곳저곳 출입하고 문을 관리하면서 빈 무대를 돌아다니다가 ‘진짜’ 대회의 관계자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명찰이 부정당하고(「관계자」), 예쁜 구름을 덮어도 원하는 날씨가 되지 못하는(「구름」) 화자들이 꾸준히 등장하는 연유는 바로 장소나 환경에 쉽게 조응하지 못하는 ‘위화감’이 곧 강이현이 세계를 감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위화감은 통상적으로 어딘가 조화롭지 못하고 어설픈 느낌이 들 때 그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지만, 시인은 이 지점을 비틀어 어떤 대상과의 관계나 자신이 닥친 환경과 부조화를 겪는 일 자체가 우리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닥치는 어긋남이며 나 자신을 어딘가 끼워 맞추려는 노력보다 “어느 쪽에도 들어맞지 않고 단지 기억과 어색한 사이를 유지”(「여름」)하는 의지가 세계와 나눌 수 있는 능동적인 대화임을 살핀다.
꿈과 잠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깨어나
자기 증명에 실패한 얼굴들을 다시 그려보는 자화상
강이현의 시에서는 수많은 ‘나’들(주체)이 등장하는 만큼 수많은 ‘너’들(객체)도 등장한다. 시 속 화자들이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은 조금 기이하다. 스스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나’는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너’를 지켜보는 입장을 고수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조명을 들고 “나의 무용수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거나(「나의 무용수」), “모르는 개들이 몰려”와 골목을 헤매다 “나의 얼굴을 다 빼앗기고 나서야 긴 잠에서 깨어”나거나(「얼굴」), 녹으면서 걸어오고(「녹는 사람」) 모자를 쓰고 친구가 오고 있는데 친구를 그리워하며 슬픔을 느끼는(「모자」) 식이다. 지켜보는 ‘나’도 걸어오는 ‘너’도 누구 하나 특별히 적극적이라는 느낌 없이 관계를 피상적으로 견지하는 태도는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현실 속 균열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오히려 시집을 읽어나갈수록 점점 강화되는 객체들의 적극성에 주체는 고유한 자리를 잃어버리고 무의식적인 경계를 오가면서 가변적인 상태에 놓인다. 이러한 시간으로 쌓이는 얼굴들로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얼굴을 가진 것처럼”(「칠면조 가방」)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무화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가능성을 확보한다.
시인은 계속 끊어지는 관계를 접합하려는 시도를 ‘꿈’과 ‘잠’에서 찾는다. 꿈과 잠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요구하면서도 가끔은 꿈 없이 잠드는 밤처럼 혹은 속절없이 뜬눈으로 보내는 새벽처럼 서로를 배척하면서 육체(몸)에 저항한다. 삶이 “몸에 맞는 옷”을 찾는 여정이라면, 강이현의 시는 꿈과 잠을 배회하는 방식으로 육체가 견뎌야 할 풍경의 윤곽선을 무의식적인 경계로 전유하고, 그 속에서 깨어나는 숱한 얼굴들과 조우하며, 종래에는 “비상용 망치를 쥐고/ 누군가 빠져나간 거울을 내리”(「망치」)치기에 이른다. “깨진 들판”(「들판」)처럼 산산조각 난 풍경은 상상력으로 기른 시의 양태지만 시인에게는 이 풍경 또한 세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실이 된다. 얼핏 보면 풍경이 남긴 파편들은 구획이 사라져 모든 경계가 사라진 한계 없는 장소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더 이상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해진 실금의 세계 속에서 앞으로도 ‘나’가 삶에서 순응하고 저항하기를 반복해야 할 관계의 문제들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문학평론가 황사랑은 발문에서 “꿈의 절단면들을 건너가며 화자는 다양한 세계를 보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강이현의 시 세계가 품은 “절단면들”의 직조와 해체가 앞으로 우리가 살면서 풀어갈 관계임을 적확하게 풀어낸다. 또 추천사를 쓴 시인 정한아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선 없는 윤곽”이 구성하는 미래로 나아가보는 일일 것이다. 강이현은 시인이 모든 세계와 관계할 수 있는 무한한 목소리로서의 관계자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자기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나 정확한 증명을 요구하진 않는다. 시인이라는 관계자는 계속 다른 명찰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거듭되는 마찰과 어긋남 속에서도 자신을 잃고 있다는 두려움보다 충분히 위화감을 느끼고 그 어느 곳에도 온전히 도착하지 못하고 있기에 어디에든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이현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가 말하는 세계가 이토록 방대한데 그가 들려주는 목소리는 너무 침착하고 고요하며 단정하고 깨끗하다. 이것은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벅찬 와중에 간신히 도착한 강이현의 시가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