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누구나 “접어두었던 시간”을 펼쳐보는 순간들이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공터를 구르던 마른 낙엽 같은 방황”과 “탱자나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쓰리고 아린 기억들”을 마주하고는 그것들이 여전히 “모서리 하나 닳지 않은 채 그대로”(「다시, 꽃」)라며 치를 떨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린 기억들은 모서리 하나 닳지 않은 채 과거의 모습 그대로일까? 그렇다면 시집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경순 시인은 오히려 이 시집을 통해서 ‘과거는 돌아오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가 과거를 다시 쓰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시 「죽령고개를 넘으며」를 살펴보자.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는 죽령고개
나무마다 시가 펄럭이고 있다
옛시조를 읊으며 굽이굽이 고개를 넘는다
다가오는 바람이 차다
옛날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연어처럼 다시 돌아오는 것일까
낙엽처럼 가버린 사랑 또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서늘한 바람과 실낱같은 햇살에도
곁을 내어주는 시간
허공을 밟고 내려오는 나뭇잎들의 행렬을 보며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오늘이 삶의 절정이라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추억이라면
가을, 저 붉디붉은 내력을 다시 열어볼 수 있을까
침침한 마음 한 자락 내려놓으면
저만큼 가벼워지는 것일까
당당한 자세로 겨울을 받드는 나무에 공감한다
또렷한 소리 하나가 귀에 들어오고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로 화답한다
숨 가쁘게 넘는 나의 오십 고개가
죽령고개보다 가팔라지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 「죽령고개를 넘으며」 전문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죽령고개를 넘으며, 시인은 문득 지나간 시간을 떠올린다. 바람이 차고 햇살은 실낱같이 스며들며, 나뭇잎들이 허공을 밟고 내려오는 그 풍경 속에서, “옛날”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다시금 현재의 감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회상은 단순한 기억의 소환이 아니다. 시인은 “옛날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연어처럼 다시 돌아오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곧 시간에 대한 전통적 인식을 흔드는 사유이며, 기억과 존재의 역동적인 구조를 가리킨다. 과거는 정말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다시 의미를 덧입히며 되돌아오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이런 심리적 시간의 독특한 성격을 ‘사후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는 기억이 과거에 한 번에 기록되고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사건에 의해 다시 쓰이고 재구성된다고 본다. 즉 어떤 감정적 사건은 그것이 벌어진 그 시점에서 의미를 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오는 또 다른 정동이나 경험과 연결되면서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인용 시 속의 주체는 지금 죽령고개를 넘으며, 과거의 사랑을 ‘지금’의 단풍과 바람 속에서 다시 의미화하고 있다. 사랑은 과거의 한 시점에 박제된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 속에서 계속 다시 살아나는 감정의 구조이며, 그런 점에서 “가버린 사랑 또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시인의 말은, 기억과 정서의 본질이 고정이 아니라 되돌아옴과 재구성에 있음을 암시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원인은 반드시 결과보다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과거의 원인을 재조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간성은 물리적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심리적 삶 속에서는 늘 작동한다. 과거의 의미는 뒤늦게 도착한 정서적 파동 속에서 비로소 감지된다.
- 장예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