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 속 작은 의원, 진료가 끝나도 이야기는 남는다
서울의 정겨운 동네, 경리단길에 자리한 작은 의원. 그곳은 단순히 아픈 몸만 고치는 공간이 아니다. 도시의 팍팍한 삶에 지쳐 문을 두드린 이들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쌓이는 곳이다. 병리학자이자 의사인 작가는 경리단길의원에서 묵묵히 진료를 보며 동네 주민들의 삶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실제 경험을 모티브로 한 특별한 소설집을 탄생시켰다.
이 책은 고단한 현실 속에서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기록이다. 짙은 피부색 덕에 주름이 덜 보인다며 농담을 던지는 의사부터, 어깨 통증과 정체성의 혼란을 동시에 털어놓는 입양인 출신 헬스 트레이너, 은근히 무시 받지만 꿋꿋하게 제 삶을 살아가던 박수무당, 아들을 위해 삶을 버티던 노부부, 감염을 감수하며 진료를 봐준 병원에 막무가내로 따지고 드는 진상 고객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을 담담히, 때로는 능청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특별하지 않아 오히려 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진료실이라는 작은 공간을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엉뚱하고 애틋한 대화는, 서로의 삶을 조용히 어루만지며 깊은 울림을 남긴다.
또한, 이 소설집은 삶의 다양한 면모를 손바닥소설과 엽편소설이라는 압축된 형식 안에 고밀도로 담아낸다. 나이 들어감을 성찰하는 「원장님 얼굴색」, 노년의 고독과 소통의 어려움을 다룬 「깔때기 보청기」, 그리고 코로나 시기를 함께 겪어낸 노부부의 사랑을 그린 「노부부의 코로나」와 같은 이야기들은 짧으면서도 긴 여운을 선사한다. 유머러스하지만 가볍지 않고, 사려 깊지만 무겁지 않은 이야기들은 작가의 따뜻하고 단단한 시선을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진정한 치유는 약이 아니라 누군가의 조용한 이해에서 시작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경리단길의원을 일부러 찾아오거나 가볍게 스치는 사람들 모두가 병과 상처를 넘어, 삶의 고통을 껴안고 함께 걸어가는 동료 시민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경리단길이라는 소박한 공간, 또는 그곳에 자리 잡은 작은 의원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통해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마주하게 된다. 늙음, 질병, 죽음, 가족, 편견, 팍팍한 생계 그리고 코로나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을 되짚어 보게 된다.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보자. 지친 일상에 따뜻한 위로와 조용한 공감이 필요한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