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와 천벌, 내리막길에서 발견한 인생의 진실
일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강렬한 역설의 힘
정호승 시의 진수는 삶의 이면을 꿰뚫는 역설의 힘에 있다. 김승희 시인이 “일상성을 아득히 뛰어넘는 역설의 힘이 여전히 강렬하다”(추천사)라고 감탄했듯,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패배와 성공,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를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시인은 세상이 실패라고 규정하는 것들에서 오히려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발견한다. 대표적으로 「패배에 대하여」는 “나는 패배가 고맙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내가 패배했기 때문에 당신은/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패배가 있었기에 생존할 수 있었고, 사랑 또한 가능했다는 이 역설은 세상의 승자독식 논리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이러한 전복적 사유는 시집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시인은 “어리석음은 나를 현명하게 한다”라고 말하며 “어리석은 현명함은 나의 유일한 재산이다”(「어리석음에 대하여」)라고 노래하고, “추락을 경험해보지 않은 새는 날지 못한다” “이별을 경험해보지 않은 자는 사랑하지 못한다”(「추락」)라고 단언하며 이별을 사랑의 필요조건으로 제시한다. 오연경 평론가의 말처럼 “세상의 질서와 논리를 뒤집어 역설적 가치를 깨닫게 하는 말들은 넘어지고 당하고 망가지며 살아남은 우리에게 선물 같은 위로를 전한다.”(해설) 시인이 “사람은 내리막길을 걸어갈 때 가장 아름답다”(「내리막길」)라고 말할 때, 우리는 숨 가쁘게 오르막길만 강요하는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길가의 꽃을 보며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가장 솔직한 언어로 건네는 위로
미완의 삶을 끌어안는 거장의 따뜻한 품
이번 시집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반짝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순댓국 한그릇에서 “이별이라는 과거도 아름다워”(「순댓국을 먹으며」)지는 순간을 포착하고, 새벽에 연필을 깎는 행위를 통해 “죽은 나뭇가지 같은 분노를 깎”(「연필을 깎으며」)아내는 자기성찰의 시간으로 독자를 이끈다. 특히 모든 것을 달관한 현자의 목소리 대신, 끝내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는 인간적인 정직함은 이 시집의 백미다. 이번 시집에는 “아름답고 절제된 언어로 사랑과 용서를 다짐하는 시들과 끝내 다스려지지 않는 부정적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시들이 공존한다”(해설). “사랑은 용서로써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용서를 위한 기도」)라고 경건하게 기도하던 시인은 돌연 “당신의 피 묻은 잔을 거절하겠습니다”라며 “나는 결국 사랑보다 증오의 사람입니다”(「당신의 잔」)라고 토로하기도 한다. 이는 불완전하고 모순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진솔한 목소리로서 더 큰 울림을 준다. 시인은 성자(聖者)의 가르침이나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대신, 실패하고 흔들리는 미완의 삶을 따뜻한 긍정의 손으로 감싸안는다.
시인은 “두조각의 빵이 있는 자는 그 한조각을 수선화와 맞바꿔라. 빵은 몸에 필요하나 수선화는 마음에 필요하다”는 무함마드의 말을 인용하며, “이 시집이 당신의 마음에 필요한 수선화가 되길 바란다”(시인의 말)라고 말한다. 등단 50년을 넘긴 지금도 가장 새롭고 가장 절실한 언어로 우리 곁에 다가온 정호승. “존재의 가장 아름다운 꽃”(「아라연꽃」)으로 피어나는 그의 시는 “사랑이 결핍되고 증오가 팽배한 이 시대”(시인의 말)를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을 평온한 안식의 자리로 안내하며, 내일을 살아갈 힘을 북돋는 따뜻한 밥 한그릇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오래되었지만 가장 새로운 ‘정호승 시의 샘물’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다. 거장의 존재는 한국문학의 자랑이자 우리 시대의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