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와 재생의 생존법
- 김겸 시집 『바로 그 어둠의 심연이었네』
소설가로 문학평론가로 전방위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 김겸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바로 그 어둠의 심연이었네』를 달아실시선으로 펴냈다.
김겸의 이번 시집은 인간이 살아가는 자리에 드리워진 어둠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어둠은 단순한 절망이나 종말의 징표가 아니다. 오히려 다시 살아가도록 삶을 이끄는 조건이다.
그런 조건 아래에서 시인은 소모와 재생의 생존법을 택한다. 감정과 경험을 오래 붙들어두지 않고, 그때그때 소진하고 다시 시작하는 방식이다. 시 「일회용 슬픔」은 이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준다.
나는 그래야 한다
오래 지니고 있어선 안 된다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웃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 슬픔을 비웃을 다른
시선 하나쯤 있어야 한다
일회용이어야 한다
즉시 재생되어야 한다
얼른 주먹으로 눈자위 한 번 닦아내고
먹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슬픔을
정면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링 옆을 빙빙 돌며
한 대 칠 용기도 없이
내가 괜히 이 짓을 하나
생각해선 안 된다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결코 슬픔에 지지 않는다
슬픔이 나를 탕진할 수
없도록
떼로 달라붙는 슬픔을
한 장 한 장 떼어내고
뒤돌아서 다시 웃는
나는야, 일회용 전사
- 「일회용 슬픔」 전문
여기서 핵심은 ‘즉시 재생’이다. 감정이나 경험을 퇴적하지 않고, 곧장 소모하고 다시 살아가는 태도. 소진되는 존재이면서도, 반복적으로 다시 살아내는 존재의 초상. 이런 생존법은 시집의 첫머리에 놓인 시 「근기根氣」에서도 확인된다.
내 의지를 시험한다는 건
갈 때까지 가 보는 게 아니라
내 수치를 피학의 운명과 맞바꾸는 일
너도 벗으라는 요구에
알몸으로 기타를 치는
그의 비극은
당신의 외면을 알면서도
알몸을 내미는
내 오욕과 맞닿아 있는 것을
몇 권 더 낼 거냐는 말이
부질없음을 가리킨다 해도
당신의 조롱이 나의 그 몇 권을
다 가리지는 못하리
당신의 존귀가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내 비루는 반백년이 빚은
바닥의 힘인데 말이지
- 「근기根氣」 부분
여기서 의지란 장엄한 승리를 위함이 아니라, 오욕과 수치를 감내하는 힘이다. ‘오욕과 수치’는 물론 ‘바닥’조차 다시 살고 다시 쓰는 힘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근기’다.
그러나 다시 살기가 언제나 화해와 위안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결이기도 하고 단절이기도 한 애매한 이음새와 틈새 속에서 사람은 살기 때문이다.
슬며시 꺼내놓은 내 비극은
단번에 희극이 되고
네가 가진 슬픔은
누구나 가진 일상이 되지
우린 만났으되 만나지 못하고
영영 헤어지지 못할
사람처럼 또 다음을 기약하네
각자의 흡음판을 달고
각자의 진공 속에서
너와 나 사이를 왁자지껄
가득 채운
저 컴컴한 텅 빔
- 「대화」 부분
만남은 끝내 성취되지 않는다. 각자는 “흡음판을 달고/ 각자의 진공 속에서” 살아가며, 그 사이에 채워지는 것은 “컴컴한 텅 빔”이다. 그러나 이 공허와 실패 속에서도 만남을 기약하는 행위 자체가, 다시 살기의 또 다른 모습이다.
시집 『바로 그 어둠의 심연이었네』는 어둠의 기록이자, 어둠 속에서 멈추지 않고 소진과 반복을 통해 삶과 언어를 새로 시작하는 생존법이라 할 수 있다.
임지훈 평론가가 해설에서 “삶의 지난한 고투 속에서 손쉬운 절망 대신 그것을 다시 셈하고 헤아리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평했듯이 말이다.
결국 김겸의 시는 말하고 있다. 저 어둠과 바닥에서 시작된 언어와 존재는 소모되지만 다시 쓰이며, 다시 살아남는다고. 삶에 대한 의지가 절실한 당신이라면 꼭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