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방식, 혹은 두 개의 방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본질, 역할, 의미와 관련한 질문에서 자연스레 ‘신체(몸)과 정신’을 떠올린다. 마음이 일의적으로 슬픔, 기쁨, 외로움, 그리움과 같은 감정의 상태를 통해 표현된다는 것을 인정하면, 마음은 감각적 직관에 근거한 신체 반응에 가깝다. 하지만 감각에 직접 소여(所與)되지 않는 가령, 후회와 불안, 고뇌와 희열, 연민과 무관심처럼 개념의 표상과 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그 경계는 생각 이상으로 분명하지 않고, 각 층위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마음은 일차적으로 몸에 깃든 감각의 산물로서 개인적이지만, 그 기원에서부터 사회와 문화, 종교와 철학의 영향 아래 있다. 여기에 덧붙여 예술로서 ‘시’는 언어라는 존재의 가장 강력한 자장(磁場)에 갇힐 수밖에 없다. 문예비평가 N. 프라이는 “시인은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한다. 시는 ‘무지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와 표현’에서 근본적 곤란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마음’을 핵심 주제로 삼았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
최경옥 시인은 ‘삶의 내력(來歷)과 마음의 현현(顯現)’을 구체적인 시어로 형상화해서 명징한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때로 작품의 화자는 표면상으로는 관찰하고 기록하고 상상하는 타자의 시선을 내비치지만, 세상의 모든 사태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성질을 끝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시적 지향이 되어버린 마음의 어떤 ‘사태’, 그 내력은 아래 인용한 작품에서 그 기원을 엿볼 수 있다.
하필 단칸방으로 이사한 날이었다 정월 그믐이었다 엄마의 산통이 시작되었다 장판 밑에 금이 간 줄 모르고 아버지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눈비에 젖은 땔감을 넣고 불을 피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궁이는 쿨럭거리며 매운 연기를 토해냈다 연기는 자욱하게 방을 덮었다 엄마는 매운 연기의 힘으로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가 바로 나였다 나는 연기의 딸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나는 연기(煙氣)에 익숙했으며 연기(演技)에 능했다 슬픔을 감추고 웃는 아이가 되었다 암울한 가정사도 나를 묶지 못했다 어떤 결정도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운명처럼 단숨에 연기보다 매운 남자와 결혼을 했고 연기보다 더 천방지축인 아이 둘을 낳았다 이 유전의 연기는 어디서 왔을까? 연기의 내력을 찾고 싶어서 책을 뒤적이다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하얀 연기 속에서 할머니가 아기인 엄마를 안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섣달그믐이었다 알고 보니 엄마도, 나도 연기의 딸이었다
- 「연기의 내력」 전문
이 작품은 존재의 숙명에 대한 자전적 기록이자, 다양한 방법으로 시인의 고유성을 침해하는 세계에 대한 응전 방식의 표방이다. “엄마는 매운 연기의 힘으로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가 바로 나였다 나는 연기의 딸로 태어났다”라는 시적 진술은 영웅 신화의 미시적 버전으로 적절하다. 이어지는 “나는 연기(煙氣)에 익숙했으며 연기(演技)에 능했다 슬픔을 감추고 웃는 아이가 되었다”라는 부분은 존재의 한 자질이 성격이 되는 과정에 대한 진술이다. ‘연기(煙氣)’ 탓에 ‘연기(演技)’에 능하다는 인식은 그 자체로 ‘연기(緣起)’를 긍정한다. 그렇기에 한 생을 넘어서는 ‘내력’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고, “하얀 연기 속에서 할머니가 아기인 엄마를 안고 희미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연기를 매개로 한 최소한 3대의 내력이 드러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연기’는 물질이고 징후다. 물질을 태워야만 연기가 발생하므로 비록 변형되었다 할지라도 연기는 그 물질의 구성성분을 모두 갖고 있다. 물질의 이 속성에서 유추해서 연기는 ‘유령’으로 이해된다. 실재와 실체의 경계가 불분명한 존재로, 그러나 연기가 그곳에 불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강력한 징후인 것처럼 마음의 사태를 이해할 수 있는 최상의 장치이기도 하다. 「부활절 아침」에서 “목련나무 아래 벤치에/회색 야구 모자 쓴 남자가 고꾸라져 있다” 그는 노숙인이 분명한데 “빈 소주병을 베고/먼 등을 긁고 있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인의 시선은 이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누군가 발밑에 두고 간 “십자가가 그려진 달걀 두 개”에 꽂혀 있다. ‘부활절 아침’이기 때문이다. 여기의 ‘누군가’는 ‘유령’이다. 행위의 결과는 선명하게 남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 사태를 누군가의 ‘부활’을 기대하는 간절함으로 마주한 시인의 마음을 감싸고 있기에 이 유령은 또한 자신의 ‘매운 연기’일 수도 있다.
- 백인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