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찰 떨지 말고 이쪽 등강에서 저쪽 비탈로
염소 가자는 대로 따라가라 했다
삶이란 원래 절망하면서 사는 거니까
산이 너를 받아줄 그때까지만 참으라 했다
- 「살고 싶다고 했더니」 부분
삶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시인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끝내 버티며 살아내려 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Hat man sein Warum? des Lebens, so verträgt man sich fast mit jedem Wie.)”고 말했다. 니체에게 고통은 삶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삶 전체와 함께 긍정해야 할 무엇이었다. 그는 고통을 인간 의지의 힘으로 끌어안고, 그것까지 포함한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amor fati).
허림 또한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 다만 그 방식은 다르다. 니체가 고통을 의지의 힘으로 긍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면, 허림은 고통을 삶의 본질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견디려 한다. “삶이란 원래 절망하면서 사는 거니까/ 산이 너를 받아줄 그때까지만 참으라 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언어가 지닌 무게는 시 「단풍」에서도 드러난다.
단풍나무 둥치에 빨랫줄 맸다
사흘에 한 번 속옷가지 빨아 널고
날 좋으면 이불과 요를 내다 넌다
곱게 잔 듯해도 가위눌린 땀이 배고 악몽에 흘린 눈물의 얼룩과
눈물 묻고 잠든 베개
이번만은 견뎌보자던 날들 주름진다
들창에 서성이는 새벽
눈 절로 떠 습관성처럼 인력시장 처마 밑에 줄을 선다
이골이 난 듯해도 잡부 셋
냉큼 달려간다
우물가에서 세수하고 목장갑과 양말을 빨아
어둠이 내려앉은 빨랫줄에 넌다
저녁마다 손이 퉁퉁 붓고 마디마다 뻐근한 작업풍이 도진다
여기저기 파스를 붙이고 좀 심하다 싶어
하루쯤 쉬자
마음먹고 집구석 돌아보는데
목 졸린 단풍나무가 유독 붉다
빨랫줄만 기억나고 나무는 보지 못했다
서서히 목 조이는 일이 파다했는데 핏줄이 선 나무
가을이라고 단풍이 든다
-「단풍」 전문
이 시에서 단풍은 계절의 색이 아니라, 노동의 고통과 함께 새겨진 삶의 흔적이다. “이번만은 견뎌보자던 날들 주름진다”는 구절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삶은 끊임없이 목을 조이지만, 그 고통을 감내하며 버티는 과정이 곧 단풍의 붉음이 된다. 저녁마다 손이 붓고 마디마다 작업풍이 도지는 몸의 고통은 단풍잎의 색으로 치환된다.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삶이 하나로 겹쳐지며, ‘견딤의 흔적’이 언어로 형상화된다.
허림의 시에서 견딤은 울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설움이 아니다. 시 「사월」은 울음이 곡진한 울림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울음을 곡哭이라 하지
애걸하듯 북방산개구리 우는 사월
아홉사리고개
울음이 곡曲을 넘는다
봄이어서 꽃들도 산을 넘는데
한 소절 한 소절 곡진하다
지금 울지 않는다면 언제 울까
울음이 산을 키운다
푸른 울음으로 도지는 사월
여기저기 쓸어놓은 울음의 발랄
내게 돌아오는 메아리도 점점 푸르다
- 「사월」 전문
울음은 응어리로 머물지 않고 산을 키우는 힘이 된다. 개인의 눈물이 공동체적 울림으로 번져 나가며, 그 울림은 곧 타인을 향한 배려로 이어진다. 이런 태도는 시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골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꽃으로 산 날은 길지 않았다
꽃만 보려 했지 안부는 묻지 않았다
아파도 아픈 척하지 못하고
괜찮다 괜찮다고 꽃만 보여주었다
꽃으로 산 길지 않은 날들
사랑만큼은 뜨거웠다
꽃으로 무거워
가지가 찢어지고 흥건해지기도 했다
그런 계절이 다시 와서
코트 자락 여미고 밤길을 걷는 골목
그녀의 손끝에 피었다 지는
꽃의 느린 듯 여린
적막
-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골목」 부분
시인은 아픔을 드러내지 않고(사실 견디면서) 끝내 꽃과 적막을 건넨다. 자신의 울음을 삼키며 타인을 안심시키는 태도, 그것이 허림의 견딤이자 사랑이다. 그리고 끝내 저무는 빛 속에서도 결기는 남는다.
세상에는 눈물이 차고 넘쳤다
모래톱 따라 걷다가 뼈처럼 반짝이는 조개를 보았다
끝까지 살아보겠다는 결기 같다
- 「노을이 가는 곳」 부분
노을은 허무가 아니라 결기의 자리다. 소멸 속에서도 살아내려는 힘이다. 니체의 변신 은유를 빌려 말하자면, 끝까지 살아보겠다는 그 결기는, 낙타의 견딤이면서 동시에 용맹한 사자의 태도이기도 하다.
허림은 “삶이란 원래 절망하면서 사는 거니까/ 산이 너를 받아줄 그때까지만 참으라 했다”고 노래했다. 고통은 고통일 뿐, 다만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겸손한 견딤은 어느 순간 결기로 전환되고, 그 자리에서 허림의 시가 태어난다.
니체에게 고통은 의지적 결단을 통해 삶 전체와 함께 긍정해야 할 대상이었다. 반면 허림에게 고통은 본래 삶의 자리이며, 그 속에서 묵묵히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울음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울음을 곡曲으로 바꾸어, 곡진한 노래로 길어 올린다. 그것이 허림의 시가 보여주는 힘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깊게 전하는 허림의 말이다. 겸허한 견딤이자, 타인을 향한 사랑이며, 삶을 긍정하게 하는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