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길임을 알고서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나라의 현실을 알고서 또 다른 길을 택해야 하는가. 나는 한참을 고민했고, 그 고민이 꿈으로 나타났다고 믿는다. 친일파를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기에 이를 포기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지, 아니면 끝내 맺어지지 않아도 좋으니, 그의 곁에 남아서 정도正道를 포기할지를 한참 고민하던 꿈속의 나처럼. -「작가의 말」 중에서
한 편의 꿈에서 시작된 정도正道의 고민
극야의 시대에 투쟁했던 독립 투사들에게 바치는 헌사
『물빛 안개 上,下』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 연해주에서 일제의 탄압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을 다룬 소설이다. 일본 총독의 조선인 아들인 후지와라 히로유키 중위와 그의 밑에서 일하는 여급 정화의 금기 어린 사랑을 중심으로, 극야의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한 사람의 감정 사이에서 오가는 고뇌, 조만간 해가 지지 않는 밤, 백야가 오리라는 꿈을 품고 거사를 치르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역사학도인 저자는 친일파 장교 밑에서 일하다가 떠나기를 거부했던 꿈을 꾸면서, 그를 사랑했던 것인지, 그가 정말 친일파인지 의문을 품었다. 이러한 꿈은 올바른 역사학도의 길을 걷기 위한 작가의 고뇌에서 비롯되었으며, 작가는 수차례 고민한 끝에, 더 나은 세상과 올바른 가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한 독립 투사들에게 헌사를 바치기 위해, 치밀한 고증과 아름다운 문체를 바탕으로 소설 『물빛 안개 上,下』를 집필하였다.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한 ‘물빛 안개’ 같은 조국의 독립
태극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그려낸 ‘푸른 하늘에 붉은 해’
이 소설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물빛 안개’로 표현한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한 강물처럼,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조국의 독립’이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는 고향의 안개조차 그리움의 대상일 것이라 생각하여 탄생한 말이다. 아울러 흐릿한 안갯속에 가려진 진실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또한 대한의 독립을 바라는 가상의 독립군단인 ‘명중경단明中景團’이 존재한다. 밝고 맑은 하늘에 떠오른 볕은 태극이다.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고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는 혹한의 땅에서, 그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을 바랐을지 생각하던 차에 나온 이름이다. 같은 의미의 ‘푸른 하늘에 붉은 해’라는 상징이 독립을 염원하는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대변해 주기를 바랐다. -〈작가의 말〉 중에서
“‘물빛 안개’가 무언데?”
“Наша цель. (우리의 목표.)” -본문 2부 「물빛 안개」에서
“약조하리다. 조선의 푸른 하늘에 붉은 해가 떠오르는 그날까지, 절대 그대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말이오. 그땐 그대의 고향도 가 보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경성의 그곳에도 다시 가 봅시다.” -본문 3부 「푸른 하늘에 붉은 해」에서
이 책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친일파를 향한 금기 어린 사랑과 고뇌,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이다. 그리고 두 가지 주제 모두 ‘조국의 독립’을 향해서 하나로 모여든다. 1920년에 일어난 ‘연해주 4월 참변’을 모티브로 삼아, 가공의 인물인 정화와 히로유키뿐 아니라,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모티브로 삼은 윤관영과 최자현, 연해주에서 실제로 활동했던 최재형, 김이직, 이범윤, 엄주필, 최성학, 이상설, 이인순, 정창빈, 김마리아 등이 ‘물빛 안개’처럼 닿을 듯 말 듯 한 독립을 목적으로, 일제의 탄압에 맞서 무장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다룬다. 머나먼 타국에서 태극기를 펼치기를 소망했던 순국선열들의 투지를 다룬 소설을 읽으면, 우리도 푸른 하늘에 붉은 해가 떠오르기를 바랄 것이다.
친일파를 향한 인간적인 악연, 그리고 사랑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한 편의 기억 같은 소설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저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내기에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도움을 받았음이요, 조선인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 하기에는 그 가 직접 짓밟은 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으니 더 어떤 청을 해야 할까.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렀다. 연유는 알 수 없었다. 연모와 두려움 사이에 놓인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대하였다 믿었건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자를 더 깊이 사랑했었구나. -본문 3부 「석별」에서
소설의 배경은 1910년대 경성과 연해주로, 주인공은 관저 여급 정화와 일본 총독 출신 조선인 양자이자 군인인 후지와라 히로유키이다. 上권의 1부는 정화의 시점에서 어떻게 그녀가 히로유키를 연모하고 그 속에서 어떤 시련을 겪고 갈등하는지, 下권의 2부는 히로유키의 시점에서 그가 어떻게 연해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정화를 어떻게 각별히 대하고 연모하게 되는지, 下권의 3부는 정화와 히로유키가 헤어진 뒤 연해주에서 재회하며 어떻게 거사를 펼치는지 다룬다.
친일파와 악연을 맺은 뒤, 그와 금기 어린 사랑을 펼치다가 연해주에서 거사를 치르는 과정까지, 그 과정에서 만나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이 비장하면서 세밀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서술된다. 당대의 고문 방식이 상세히 드러나면서, 그 속에서 갈등하는 정화의 고뇌가 생생히 묘사되며, 1부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히로유키의 감정과 비밀 역시 2부에서 밝혀지면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51만 자의 긴 장편소설에서 등장하던 복선이 3부에서 모두 해소되면서, 치밀한 소설의 플롯을 보고 감탄할 것이다. 연해주라는 배경 특성상 자주 등장하는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어의 매력을 알 수 있는 것은 덤이다.